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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된 삶 (1) / 고전4:1-5

2010.05.01 11:29

이상봉 조회 수:6341

26.사람의 판단에 주의하지 않고 하나님의 판단에 주의함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에서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서로 분열하여 다투는 것에 대해 그들이 무슨 동기와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했든지 그들이 어떻게 그것을 변명하며 합리화하든지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성령의 인도 하에 있지 않은 육신의 일이요 하나님과 진리를 거스려 행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목적인 영광스러운 교회의 건축을 방해하는 거역적 일이라고 책망했다. 그러다가 바울은 그들이 추종하는 바울이나 아볼로, 베드로 같은 지도자들은 누구이며 어떤 존재들인가에 대해 형제들에게 바르게 말해 줄 필요를 느끼고 그들의 존재 의미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이 사람들이 단지 하나님의 도구요 수종드는 종이라는 사실을 말했다. 모든 일은 하나님 자신이 친히 하신다. 사람은 그 하나님의 일을 집행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을 세워서 수행케 하는 일의 내용에 대해서도 말했다. 즉 바울과 아볼로와 베드로 같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는 그들의 일이 바로 하나님의 집 곧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 안에 하나님을 심어서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서 꽃피고 열매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목적을 위해 부름받은 모든 사람들(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집(성전)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 자기 안에 온전한 성전을 세우고 유지해야 한다. 이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터(기초) 위에 서 있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라는 재료로 건축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완성되는 건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부라는 이름이 붙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이요 또는 새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이 붙게 될 이 성전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도록 단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로 조성된 이 영광스러운 교회는 가장 큰 특징이 세상과 구별되어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누구의 말도 듣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추구하고 세상의 헛된 영광은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전에 대해서 말한 후 고전3:18-23에서 올바른 인생 건축을 위해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자랑하거나 사람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강조했다. 사람이 자신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거나 자기를 자랑하면 헛된 인생을 살게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사람의 뜻에 의해 지어지고 사람의 뜻대로 될 것이 아니라 다 하나님의 뜻(목적)대로 지어졌고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만물은 다 하나님의 것이다. 그것은 사람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그 근본적인 길과 운명이 이미 하나님에 의해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인간의 운명을 잘 깨닫고 받아들여서 자기의 정함 없는 모든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부응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지혜란 잠시 좋다가 최후에는 망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잠시는 괴롭더라도 최후에는 잘되는 인생을 사는 것이다. 그런 인생만이 견고한 인생이요 성공하는 인생이 될 것이다.

이런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셨다. 그는 오직 하나님께만 관심을 가지고 그의 뜻에 순종하는 생을 살았다. 그 결과 그는 세상으로부터는 멸시와 버림을 받고 고통 속에서 죽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 올리사 온 우주의 통치자가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기초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진 인생의 기초 위에서 인생을 건축하지 않으면 그 인생은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불에 타버리는 나무 집처럼 되고 말 것이다.  

여기까지가 고린도전서 3장의 내용이다. 이처럼 고린도전서 3장에서 바울이 언급한 진리의 내용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 초점은 교회의 관심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삶의 중점은 사람 자신(육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이란 사람에게 부속된 존재가 아니라 사람보다 월등하신 하나님께 부속된 존재이므로 사람을 자랑하거나 사람을 의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사람이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그 나름대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사람을 존중히 여기며 합당히 대접해야 한다는 사실도 무시하지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대리자이다. 아무리 좋은 일이요 대단한 일이라도 도구 없이 일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그 가치대로 즉 적어도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부여하신 가치대로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사람에게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을 하나님의 시각대로 보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을 보시는 시각은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데 가장 일반적으로는 [아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여러 번 언급했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라는 의미에서 백성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의 영원하신 목적을 달성하는 사역과 관련하여 사람을 보시는 시각은 [일꾼]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사람은 일꾼이다. 일꾼 곧 [주인]이 아니라 일꾼(종)이며 [구경꾼]이나 열외자가 아니라 일꾼이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고전4:1)  일꾼은 일하는 자이므로 마땅히 일을 열심히 하고 일을 잘해야 한다. 이것이 충성이다. 주인의 입장에서 가장 좋은 일군은 그가 맡은 일을 잘하는 사람이다. 다재다능한 것도 필요 없고 일과 상관없이 잘난 것들은 다 필요 없다. 오직 주인이 시킨 그 일을 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 하나님의 사람을 판단할 때 먼저 그가 무엇을 맡은 사람인가를 볼 필요가 있고 다음으로 그가 그 일에 얼마나 충성하고 있는가를 볼 필요가 있다. 일은 은사만큼 하는 것이요 받은 은혜만큼 가진 믿음만큼 하는 것이다. 작은 은사를 받아서 작은 일을 하는 사람도 있고 큰 은사를 받아서 큰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각각의 일에 충성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요구된다. 어떤 사람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크든 작든 자기 맡은 일에 성실히 봉사하고 있으면 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소중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우리는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아야 하며 합당한 지지와 순종을 보여주어야 한다.

지금 나는 사람의 가치는 정확하게 하나님과 관련하여 정해진다는 사실을 여러 번 강조하고 있다. 사람 자체로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흠모하고 추종할 자는 아무도 없다. 다 약하고 흠 있는 죄인일 뿐이다. 그러나 마른 막대기라도 하나님의 손에 잡힌 도구는 그 자신의 본래적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하여 얻게 된 새로운 가치에 따라 귀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모세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가 하나님께 충성하는 한 사람들은 그를 반드시 따르고 순종해야만 했다. 모세를 거스른 미리암, 고라와 그 일당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많은 백성들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무서운 징계를 받았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보면 그를 멸시해도 된다. 자기 스스로 높이며 자기를 드러내는 사람은 천하에 없는 사람이라도 더러운 죄인 이상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잡혀 있는 한 마땅히 존중히 여기며 받들어 순종해야 한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인물 흔히 말하는 목사나 지도자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5:23)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누 안에서 순종하라"(엡6:1)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6:5-7) 누구에게든지 그가 하나님과 관련하여 일정한 맡은 일을 가지고 그것을 수행하고 있는 한 그에게 순종할 부분을 순종해야 하며 그를 존중히 여길만큼 존중히 여겨야 하는 것이다.

참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을 대할 때 일꾼 이상도 아니고 일꾼 이하도 아닌 대우를 할 필요가 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과 관련없이 터무니없이 인간적으로 높이고 과도히 추종해서는 안된다. 일꾼을 터무니없이 높여서 주인처럼 따르고 대우하는 것은 주인을 무시하는 일이다. 주인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는 대리인은 마땅히 거부해야 한다. 주인의 영광을 위해 일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위해 일하는 대리인을 그대로 수납하면 그 책임은 나중에 그를 받아들인 사람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받드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 이유 때문에 어떤 사람을 따르고 귀히 여기는 것이지 그 이상은 결코 아니다. 만일 그 이상으로 즉 하나님과 관계없는 그 사람 자신의 어떤 인간적 장점이나 개성 때문에 그를 추종하거나 과도히 높인다면 그 사람도 어렵게 되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어렵게 된다.    

고린도교회의 시기와 분쟁은 바울을 따르는 사람들과 아볼로 혹은 베드로를 따르는 사람들이 서로 마찰을 일으킨 데서 생긴 것이었다. 각 지도자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각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못 보고 그 사람들만 보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개성과 장점의 차이에 따라 서로 나누어졌던 것이다. 사실 바울은 자기의 부르심 곧 자기가 받은 은혜와 은사에 따라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한 도구였고 아볼로도 베드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어떤 그룹의 보스 노릇을 하려고 한 사람들도 아니고 추종자들 사이에서 터무니없이 높임을 받을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사람들이 그들을 터무니없이 추종하고 높인 것은 다 인간 자신을 높이고 인간 자신을 자랑하고 싶은 본성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바울을 높이는 척 하면서 자기를 높이고 자기 주장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바울이나 아볼로라는 지도자들은 사실 고린도교회 신자들 안에 내재해 있는 그런 욕구의 표현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다음으로 우리는 일을 맡은 일꾼들을 멸시해서도 안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반드시 일꾼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일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법이 없다. 하다못해 어떤 사람의 막연한 기도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사람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그의 일을 하신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시8편) 이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하나님의 생명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 대하듯 대해야 한다.

사실 사람에 대한 한 가지 치우친 태도 즉 한 사람을 그의 가치를 넘어서 지나치게 높이 대하는 것이나 지나치게 무시하는 것은 결국 전부를 다 치우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바울을 지나치게 높이는 사람은 자연히 아볼로를 지나치게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어떤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이 부여하신 가치 이상으로 높이는 사람은 다른 한편으로 반드시 어떤 다른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이 부여하신 가치 이하로 낮추어 멸시하는 우를 범하게 마련이다.

이 사실을 말한 후 바울은 자신을 모든 일 맡은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가져야 할 한 가지 태도에 대해 말한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전4:3-5)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은사대로 그의 생명의 분량대로 일을 해왔기 때문에 자기가 자신을 돌아볼 때는 스스로 책잡을 만한 일이 없었다. 그는 참으로 충성된 자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온전함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했다. '내가 보기에' 내게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지 남이 보기에도 그렇다는 것은 아니며 더 나아가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내 문제를 들여다보는 나는 하나님의 판단과 시각을 따라 온전하게 나를 판단할 능력이 있는가? 그렇지 못한 것이다. 기준과 잣대가 벌써 온전치 못한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내가 온전하다는 것이지 내가 모르고 있는 기준과 잣대로 나를 잰다면 나는 틀림없이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온전하고 책망할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내가 스스로를 의롭다고 하거나 나와 다른 사람들은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모든 은혜 곧 구원과 영적 은사, 일반 은사, 여러 가지 삶의 여건들과 일의 성취들이 다 우리 자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후3:5) 우리의 만족은 우리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다. 물론 많은 일이 우리가 일을 수고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러나 우리의 일은 다 먼저 하나님이 해 놓으신 일 곧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역사에 기초하여 일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우리가 한 모든 일은 결국 '그리스도를 믿은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리스도를 선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이 온전하냐 온전치 못하냐 한 것은 우리가 열심히 일을 했느냐 불성실하게 했느냐 하는 것에도 달려 있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누렸으며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한 사람이냐 하는 것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아는 그리스도는 이런 분이므로 나는 이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 이상은 아니다. 내가 한 것이 하나님이 완전히 행하신 것처럼 완전히 행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내가 그리스도의 모든 풍성하심으로 충만한 사람이어야 한다. 아들의 생명이 있느냐 하는 것과 아들의 생명으로 완전히 충만하냐 하는 문제는 다른 문제이다.

내가 나를 보는 것이나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는 것은 다 아무 것도 아니다. 오직 마지막 날 주님이 오셔서 우리의 실상을 드러내실 때 나타나는 평가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을 비롯한 사역자들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과 평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고린도 교회 형제들이 '바울이 최고다, 아볼로가 최고다, 베드로가 최고다'라고 말하는 것은 다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들이 바울이 최고다 라고 말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바울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하고 사람들이 평가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고 평가하시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아는 바울과 아볼로는 이 일에 대해 형제들에게 본을 보였다. 그들은 자기 아는 만큼 말하고 자기 받은 은혜만큼 일했지 자기들이 큰 일을 했다 할지라도 자기를 자랑하거나 자기들이 한 일이 마치 자신의 능력으로 한 것처럼 말하지도 않았고 또한 다른 사역자들에 대해 그들이 이러니 저러니 그들의 일이 이러니 저러니 하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하나님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도구인데 그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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