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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왕노릇 함 / 고전4:6-21

2010.05.01 11:30

이상봉 조회 수:6635

28.스스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만족에 이르도록 그리스도를 추구함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가) 왕 노릇하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 이 말에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을 살리고 또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세우려는 전도자 바울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다. 그의 말을 통해 우리는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도 알 수 있다.

고린도교회 형제들을 향한 바울의 심정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심정이다. 그는 말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는 또한 갈라디아서 4:19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다음의 여러 구절들은 다 전도자로서 바울이 자기보다 약한 형제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말해 준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고전4:14)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고후6:13)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데살로니가전서 2:7)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데살로니가전서 2:11)
요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의 모든 편지의 처음부터 끝까지 형제들을 자녀라고 부르며 아버지의 심정으로 글을 쓰고 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요일2:1)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한일서 3:18)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요한일서 4:4)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 하라" (요한일서 5:21)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요한이서 1:4)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요한삼서 1:4)

자녀를 향한 아버지의 심정은 무엇인가? 빨리 커서 온전하고 영광스러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이가 아프거나 밥을 많이 먹지 않아서 성장이 멈추든지 느리게 성장하면 그는 답답해서 견딜 수 없다. 아이가 공부를 하며 생활에 필요한 기술과 요령을 익히는 데 있어서 성실치 못하여 앞으로 살아갈 때 어려움을 겪을 것이 예상되면 또한 답답하여 견딜 수 없다. 그래서 종종 어떤 일을 채근하며 강요하기도 한다. 그래도 안되면 아버지는 자녀에 대해 분노하며 책망하고 징계한다. 아버지는 대체로 자녀에 대해 급하다. 왜냐하면 자기는 이미 어른이고 완전하고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세계가 너무도 명백하고 너무도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아이가 그보다 못한 작은 세계에 만족하며 거기서 머물려고 하면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아버지의 심정으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 형제들에게 두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다.

첫째는 그들이 아직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는데 터무니없이 스스로 만족하여 진보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지식과 은사로 인해 자기들이 무엇이나 된 줄로 생각하고 교만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진정으로 순종하지 않고 범죄하며 자기를 자랑하며 서로 다투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지식이 있으므로 말은 그럴듯하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에게 '내가 가면 너희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능력을 알아 볼 것이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그 자녀를 오직 그 생명으로서만 판단하신다. 우리 동화에 보면 호랑이가 떡 팔고 오는 어떤 엄마를 잡아먹은 후 아이들만 있는 집에 가서 목소리를 위장하고는 '엄마 왔다 문 열어라' 하고 아이들을 기만하여 아이들마저 잡아먹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듣고 아이들이 '엄마구나' 하면서 얼씨구 문을 열어 주었는가? 그렇지 않다. 아이들이라도 엄마 소리를 위장한 것과 참 엄마를 구분할 줄 아는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이 경건에 대한 지식만 있고 실제 경건한 삶은 없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시겠으며 경건의 흉내만 내는 것과 실제 경건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고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을 어찌 구분하지 않으시겠는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고 인격과 삶이며 원함이 아니고 실제이다. 교만과 그로 인한 실패의 위험은 문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문 앞에 거의 도달한 상당한 수준의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아주 어릴 때는 항상 부모를 의지하던 아이들이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 되면 부모의 말을 잘 듣지 않으려고 한다. 그것은 부모를 의지하지 않고서도 자기가 다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러한 아이를 볼 때 답답하게 여긴다. 그것은 아버지가 보기에 그는 여전히 불완전하고 불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학생 아들이라도 아버지에게는 못미더운 구석이 여전히 있는 법이다. 물론 사람의 염려와 사람의 판단은 온전치 못한 것일 수 있다. 60살 먹은 아들을 염려하는 90세 어머니의 염려는 불필요한 것이고 지나친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염려와 노파심, 채근과 독려, 믿음으로 그를 온전히 의지할 것을 요구하시는 이 요구는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의 의도에 많이 못 미치기 때문에 조금도 지나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시각,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 우리의 실상을 본다면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그 목표에 얼마나 미달해 있는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절대적이다. 그것은 세상과 비교해서 우리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절대적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이다. 우리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온전히 서게 하는 것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표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8:29,30)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께 영광스럽고 진실하며 의롭고 거룩한 것처럼 우리도 또한 하나님 앞에서 그런 아들로 서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이며 이 의도가 만족될 때 하나님도 우리도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참으로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만족하여 그럭저럭 별 부담 없이 별 생각 없이 살고 있는 것은 너무도 터무니없는 것이다. 바울은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편지처럼 새겨져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기를 대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읽을 수 있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향기처럼 배어있기 때문에 자기를 대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맡을 수 있다고 했다.(고후2:14-3:3)  그가 이러한 수준의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에 대해 그는 자신 있게 이 판단은 자기 기준에 따라 스스로 판단하여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후3:5) 우리도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후2:14-3:5)

우리는 지난 주까지 생각한 바에 따르면 하나님의 일군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는 일군이요 사람을 살리는 일군이요 세상에 자유와 해방과 소망을 가져다 주는 일군이다. 우리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이 얼마나 많은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우리를 필요로 하고 있는가? 지금 세상은 우리를 엉뚱한 방향으로 필요로 하고 있다. 세상은 우리가 그들에게 돈을 벌어주며 바벨탑을 쌓는 일에 참여하기를 바라며 그들의 쾌락과 죄악에 지지를 보내고 동참하며 협조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면에서는 제대로 부응할 수 없는 사람이다. 우리도 세상에서 직업을 가지고 일정한 일을 하며 돈을 벌고 국가 건설과 문화 창달에 이바지하지만 그것보다 하나님 안에서 진짜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봉사할 일이 산적해 있기 때문에 그런 일에 온전히 부응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제대로 소용되어야 한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8:19-21) 물론 모든 일이 온전하게 이루어지려면 주님이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끝내시고 새 세상을 여셔야 한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8:22-25) 그렇지만 세상에서도 우리는 할 일이 있으며 얼마든지 세상을 위해 일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 견고히 서서 그의 형상을 본받기만 하면 얼마든지 우리로 세상(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일군으로 세우신다. 우리의 일은 하나님의 생명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의 일은 아들의 생명 안에 있는 진리와 거룩을 드러냄으로써 세상을 비추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씨를 뿌리는 것이다. 나머지는 성령님이 다 하신다.

사람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하나님의 영광의 아들로 서고 이 아들들이 세상에 자유와 영광을 가져옴으로써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이 일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성령님은 직접 세상사에 간섭하고 개입하여 역사하기 전에 먼저 그 일의 핵심 요소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열망, 하나님의 간절한 갈망을 알게 하시고 그 갈망과 염원을 따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의 생명을 충만히 누리도록 만드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8:26,27)

일이 이러할진대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가를 판단해 보아야 한다. 남을 판단하고 세상의 어떠함에 대해 판단하기 전에 내가 지금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내 할 일이 무엇이며 나의 상태가 어떠하며 나의 태도와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먼저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아들은 언제나 조금 된 것을 가지고 다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아버지가 볼 때 아들은 언제나 달려갈 길이 먼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열망과 재촉하는 말을 듣고 앞으로 온전한 것이 올 때까지 또한 아버지로부터 만족이 올 때까지 쉼 없이 달려가는 사람은 온전하고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는 사람은 아무 데도 소용없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세상에서도 승리한 사람을 보면 한결같이 그들은 만족이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작은 승리, 작은 성취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큰 것을 향해 끝없이 달려가는 특성을 지닌 사람들이 다 성공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형제들이 왕도 아니면서 왕 노릇하고 있다고 책망했다. 그들은 참 자유가 무엇인지, 권세가 무엇인지, 높아짐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것을 알았다면 그들은 형제들끼리 싸우지 않았을 것이며 자기를 스스로 높이고 남을 무시함으로써 억지로 높아지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참으로 왕이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종으로, 형제들의 종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들은 섬기는 가운데서 순종하는 가운데서 사람들의 존경과 소용이 되는 삶을 몰랐던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진짜 왕이 되어서 지금 만족하고 높아졌고 자유로워졌는 것인가? 아니면 터무니없이 왕 노릇하고 터무니없이 만족하며 평안한 것인가?

둘째, 바울은 아버지의 심정으로 형제들을 위해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자기를 희생했다. 그는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주었으며 모든 수고와 희생을 감수했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고전4:9-14)

그가 이렇게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오직 고린도교회 형제들이 잘 되고 온전하게 그리스도 안에 서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고린도교회 형제들을 위해 그런 고생을 한 것은 그들이 그만큼 존귀하고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종은 주인의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주 예수님을 비롯하여 바울과 우리에게 복음을 전한 전도자들, 우리의 부모님들, 그밖에 우리를 낳고 우리를 이끈 모든 하나님의 종들을 생각해서 하나님의 부르신 자리에 온전히 이르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스스로 만족하는 것, 이것이 가장 문제이다. 우리의 만족과 안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제 너는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섰다고 말씀해 주실 때 그때 가서 해야 한다. 그때까지는 오직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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