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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징계 / 고전5:1-13

2010.05.01 11:32

이상봉 조회 수:6486

30.신자와 교회의 거룩을 위한 하나님의 징계  

도덕적으로는 형편없이 해이해져 있으면서 약간의 지식과 은사를 가지고 자기를 자랑하며 서로 다투는 고린도교회의 신자들은 그 마음이 크게 교만해져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이 자기에게 있는 하나님의 은혜, 곧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가진 은사들을 가지고 마치 자기 육신의 자랑거리를 자랑하듯이 자기를 자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들에게 있는 심히 부끄러운 일들에 대해서는 무감각하여 통한히 여기지 않는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크게 책망했다.

바울은 교회 안에서 버젓이 세상에서도 부끄러워할 짓을 하는 사람을 왜 성도들이 그냥 두느냐고 책망했다. 그는 그런 일 행한 사람을 가르치거나 권면하거나 용납하라고 말하지 않았고 도리어 그런 사람을 왜 교회가 쫓아내지 않느냐고 책망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첫째도 거룩, 둘째도 거룩, 셋째도 거룩해야 한다. 교회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지만 근본적으로 사람과는 상관없는 곳이고 오직 하나님께만 상관있는 하늘 처소요 하나님의 집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고 사람의 비위를 맞추어주고 사람의 육신적인 감정을 상하지 않음으로써 화목하고 연합하기를 추구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되고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안식하시고 만족하실 수 있도록 그의 생명의 특성을 따라 모든 것을 행해야 하는 곳이다.

교회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집인만큼 교회답게 거룩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성질 곧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과 맞지 않는 것들은 다 배제해야 한다. 교회에서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과 완고한 악인들을 내쫓는 것은 인간의 교만이나 무정하고 사랑 없는 처사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엄성, 하나님의 영광이 달려 있는 문제이며 교회의 생사가 달린 문제이다. 거룩하지 않은 교회, 아들의 생명과 어긋난 길로 가는 교회는 그 자체로서 교회가 아니다. 거룩을 추구하다가 실수와 실패는 있을 수 있지만 처음부터 거룩을 무시하고 죄악을 용인하는 태도를 나타낸다면 그것은 실수나 실패의 문제가 아니라 지향성(指向性)의 문제이다. 지향성 자체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큰 문제이다. 바울은 교회 안에서 있으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죄인, 악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보통으로 생각하거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죄인들, 곧 마치 망하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마음이 완고하고 교만하여 도무지 성령의 음성을 청종하지 않고 교회를 죄악으로 오염시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불쌍히 여기거나 권고하거나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일 어떤 사람들이 멸망되기로 작정된 적그리스도의 무리에 속한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들은 권면하더라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벧후2장)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요일5:16)

바울은 범죄한 사람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전5:3-5) 즉 그는 범죄한 자의 육신을 사탄에게 내어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고린도교회 형제들과 바울은 몸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들이 동일한 생명을 가졌기 때문에 영으로는 항상 함께 있는 것과 같았다. 이처럼 영으로 함께 있던 바울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고 그에게 부여된 권세를 가지고 행악자를 사탄에게 내어주기로 결정했을 때 고린도교회는 회의를 열고 그를 교회에서 쫓아내도록 결정해야만 했다.

사탄에게 내어준다는 말은 옛날부터 그 정확한 의미를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 중의 하나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단순히 파문 즉 교회 밖으로 쫓아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또 어떤 이들은 이것이 그 이상 즉 그 사람을 사탄의 파괴하는 능력 아래로 내어주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사탄에게 내어준다는 말이 단순히 파문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탄에게 내어주는 것'이 2절의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않느냐'는 말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그렇다고 주장한다. 또한 세상은 사탄의 나라이므로 사람을 교회 밖으로 쫓아내는 것은 그를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사탄의 나라로 쫓아내는 것이므로 '사탄에게 내어준다'는 말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파문 이상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거는 첫째, 성경이 사탄의 공작으로 말미암아 사람에게 육체적인 재난이 가끔 임하는 사실을 계시하고 있다는 것이고, 둘째, 그리스도의 사도는 어떤 경우에 필요에 의해 어떤 사람에게 그러한 재난이 임하도록 그를 사탄의 파괴하는 권세 아래로 내어줄 수 있는 권세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다고 보는 것(행5:1-11 ; 아나니아와 삽비라에 대한 베드로의 저주와 그들의 죽음, 행13:9 ; 박수 엘루마에 대한 바울의 저주와 그의 소경됨)이고, 셋째, 디모데전서 1:20에도 본문과 동일한 원리가 제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거기서도 바울은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라는 악한 자들을 사탄에게 내어 주어 그들로 교회를 훼방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했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행악자를 사탄에게 내어주었다는 바울의 말을 그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육체적인 재난을 당하도록 만들고자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을 바울은 육신을 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육신은 몸을 말한다. 즉 그 사람을 사탄에게 내어준다는 것은 그의 몸 또는 그의 육신적 생활이 어떤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 목적은 무엇인가? 그렇게 해서라도 그의 영혼이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 잠시 세상에서 몸 편하게 사는 것이 진정으로 잘 사는 삶이 아니라 주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에 심판을 면하고 하나님과 영원히 살게 되도록 진리를 받아들여 사는 삶이 진정으로 잘 사는 삶이다.

사람이란 이미 타락하여 부패해 있기 때문에 몸과 영혼의 안락이 병행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몸이 편하고자 하면 영혼이 해를 입고 고통을 당하게 되고, 영혼이 편하고 기쁘게 되고자 하면 몸이 그 정욕대로 살지 못하게 됨으로 고달프고 괴롭게 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사탄이 사람의 육신의 정욕을 발판으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이 땅에서 영혼과 육신이 다 같이 편하고 잘 되는 길은 없는 것 같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그 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혹은 그렇다고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에게서 범죄가 일어나거나 기타 문제가 있을 때 사정없이 징계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오히려 이방 세상에 대해서는 거기서 무슨 범죄가 일어나든지 무슨 문제가 벌어지든지 무관심한 것 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그 곳은 이미 정죄와 심판 아래 있기 때문에 죽든지 살든지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목적을 위해 부르신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불신앙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여러 번 징계하셨으며 결국은 그들이 광야에서 떠돌다가 죽게 만드셨다.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오고 왕이 다스리는 왕국시대에 이르러서도 이스라엘은 그들의 불신앙과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징계를 받았다. 전염병과 기근, 이방 나라들의 침략 등으로 그들은 편히 사는 날보다 고통당하는 날이 더 많았다. 신약 시대에도 하나님은 믿는 자 개인과 교회에 그의 징계의 손길을 여전히 펴셔서 그 부르신 자들을 온전케 하시는 일을 행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온전케 하고 그의 집을 온전케 하는 일에 조금도 소극적이지 않으시다.

어떤 일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부르신 사람들을 버리시는 것처럼 느낄 때도 있다. 광야에서 모세를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의 다 죽은 것이나 아니니아와 삽비라 부부 같이 문제는 있으나 그래도 분명히 예수를 믿는 신자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그들의 죄로 인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지 못하고 버림을 받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다는 아닐지라도 그런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실은 몸은 멸하고 그 영혼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도록 하기 위해 사탄에게 내어줌이 된 것이다. 어떤 신자가 그 회개하지 않는 죄로 인해 주님의 권세에 의해 사탄에게 내어줌이 되어 그 몸이 해를 당하게 될 때, 즉 교회에서 쫓겨나서 세상에서 고난을 겪게 될 때 그는 죄의 심각성 그리고 은혜 밖으로 떨어지는 삶의 심각성을 깨닫게 될 기회를 얻을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것은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을 미리 땅에서 맛보는 곳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곳이다. 여기에 참여하는 것은 지극히 큰 축복이요 영광이다. 교회는 특별히 선심 써서 나와주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특별히 선심을 써서 만나주는 분이 아니다. 교회는 우리 기분을 맞추어주고 우리 육신의 생활에 도움이 되라고 다니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멸망당할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새 삶을 시작하는 곳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거기 속한 모든 사람에게 무한한 축복을 끼치는 곳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소중히 여기고 귀한 곳으로 알아야 한다.

우리가 우리 몸을 소중히 여기고 가정을 소중히 여겨 돌보는 것처럼 교회도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 몸이 우리 영혼을 담는 그릇으로서 날마다 먹이고 입히며 아끼고 병들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처럼 그리고 우리 가정이 우리 각 사람의 몸과 마음을 담는 그릇으로서 서로 돌아보며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여 다루는 것처럼 교회도 그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 각 사람과 교회를 자기 소유로 생각하고 귀히 여기신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인 것은 알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인 것은 모른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밖에 없는 것처럼 하나님에게도 우리밖에 없다. 아들에게 아버지밖에 없는 것처럼 아버지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우리가 망하면 하나님도 손실을 입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완전히 망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는다. 우리가 곁길로 가거나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헛되이 교만하여 그릇 행할 때는 사정없이 우리를 치신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셔서 범사에 오래 참으시고 또한 부드럽고 사랑 안에서 모든 일을 처리하시지만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기 때문에 어떤 일을 처리하실 때 사람들과는 달리 정에 매이거나 적당히 처리하시는 일이 없고 모든 일을 하나님의 정하신 뜻에 따라 확실하게 처리하신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하루 동안 징계를 받아서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돌이킬 수 있다고 판단되시면 아무리 미워도 하루만 징계하신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일년을 징계해야 한다고 판단되시면 반드시 일년을 징계하시는 분이며 혹 일생동안 징계해야 한다고 판단되시면 그가 아무리 불쌍하고 애처로워도 반드시 평생을 징계하신다. 아무리 안타깝더라도 육신 편하게 살다가 영혼이 망하고 말아버리는 것보다는 육신이 고통을 당하더라도 영혼이 살게 되는 것이 낫기 때문에 하나님은 필요하다면 일평생 동안 고생을 시키면서라도 그의 부르신 자녀들을 반드시 진리 안으로 이끄시고자 한다.

우리가 하나님이 이런 분인 줄 안다면 우리는 마땅히 교회를 거룩하게 보호하고 아끼지 않으면 안되며 또한 우리 영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우리 몸을 아낄 줄 알아야 한다. 세상에 고생을 전혀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진짜 고통을 당해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흔히 고생을 우습게 본다. 말이 징계이지 징계는 그 자체가 바로 고통이다. 징계는 나중에 그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우선은 아픈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교회가 무엇이며 하나님의 성전으로 부름받은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거룩하게 보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는 여러분이 영혼을 아낄 뿐 아니라 육신도 아끼기를 원한다. 우리 하나님에게는 '적당히'라는 것이 없는 분이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 나오게 하실 때 제일 먼저 하나님이 하게 하신 일은 그들로 죽음의 재앙이 있는 날 직전에 어린 양의 고기를 먹고 그 피를 바르고 누룩 없는 떡과 쓴 나물을 먹게 하신 일이다. 이것은 다 체질을 바꾸는 작업이며 그 백성들을 거룩한 백성들 곧 순수하고 진실한 사람들로 바꾸는 작업을 한 것이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가 우리의 희생 제물이 되셨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희생시키기까지 우리를 당신의 거룩한 아들들로 세우고자 하셨다. 그러므로 그가 얼마나 우리를 온전케 하기 위해 확실하게 우리를 다루실 지 벌써 감이 오지 않는가? 나는 여러분을 아낀다. 여러분의 영혼도 아끼지만 여러분의 육신과 육신의 생활 곧 여러분의 일생도 아낀다. 부름 받은 자에게 성령의 인도에 따라 순종하는 것은 생명과 평안이고 거역하며 정욕대로 사는 것은 곧 고생임을 인식하라.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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