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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삶 / 고전6:1-11

2010.05.01 11:32

이상봉 조회 수:6840

31.그리스도인의 생명에 맞는 삶  

고린도전서 5장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도덕적 해이에 대해 책망했다. 즉 음행에 대해서 그리고 그런 무서운 범죄를 보통 일처럼 생각하고 용납하는 교회의 태도에 대해 책망했다. 6장에서 바울은 그 문제에 이어 소송 문제로 다시 고린도교회 형제들을 책망한다. 아마도 고린도교회의 소송 문제는 음행과 관련되어서가 아니면 돈과 관련되어 일어났을 것이다. 자기 부인과 어떤 형제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세상 법정에 그들을 고발했든지 아니면 어떤 사람이 한 형제에게 돈을 빌고는 안 빌렸다고 잡아뗐든지 혹은 돈을 갚지 않았으면서도 갚았다고 우기기 때문에 세상 법정에 소송을 의뢰했든지 그랬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바울은 폐일언(蔽一言)하고 소송 당사자인 둘 다가 잘못하고 있다고 책망했다. 누가 원인을 제공했든지 누가 잘하고 잘못했든 간에 한 그리스도인이 자기 이익과 명예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된 다른 그리스도인을 고발하고 그와 싸우려고 달려드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런 소송을 세상 불신자에게 제기하여 그리스도인이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 죄인들로부터 심판을 받는 자리에 서게 만든 것은 더욱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교회 안에서라고 해서 즉 형제들 간이라고 해서 다툼과 분쟁이 일어날 수 없다고 보지는 않았다. 그는 그럴 가능성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에서 형제들 간의 혹 다툼과 시비가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차원이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분쟁은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영적 문제 곧 진리 문제, 생명 문제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어야지 그것이 아니고 세상적인 문제 곧 탐욕과 불의와 범죄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종종 그 어리석음과 또한 사탄으로부터의 방해로 인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깨닫고 어떤 사람은 저렇게 깨달음으로써 교회 형제들 간에도 진리에 대해 생각이 다르게 되어 논쟁과 다툼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도 그 판단과 지각에는 한계가 있어서 다른 그리스도인과 생각이 온전히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다툼과 분쟁은 당사자들이 성령의 인도에 깊이 주목하면 결국 해결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일은 세상으로 가져갈 필요가 없으며 세상의 판단이 개입될 여지도 없다. 뿐만 아니라 이런 일로는 서로 감정 싸움을 할 필요도 없고 오직 하나님에 의해 참 진리가 서게 될 것을 믿으며 서로 인내하며 성령의 인도를 기다리면 된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의 다툼과 소송은 그런 문제가 아니었으며 그것은 전적으로 육적이고 세상적인 다툼이었다. 사실 영적인 문제였으면 세상으로 가져갈 필요도 없고 가져갈 수도 없었을 것이나 육적이고 세상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세상으로 가져간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과 교회라고 해서 세상 법정에 전혀 호소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 자신이 세상 법정의 보호를 받은 적도 있고(행18:12-17) 또 자기가 로마 시민의 신분을 가진 자로서 유대인들에게 억울하게 고소되었으므로 친히 로마 황제(가이사)에게 송사하기도 했다.(행25:9-11) 다만 바울이 고린도교회가 세상 법정에 송사한 것을 책망한 것은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당한 억울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벌어진 일 곧 형제간에 생긴 육신적인 일을 가지고 세상에다 판단을 청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보통 사안도 아니고 세상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부끄러운 일들을 포함한 각종 불의와 범죄의 건으로 말이다.  

바울은 어떤 논지로 어떤 근거로 그리스도인들이 불의한 자들 곧 세상 사람들에게 송사를 하거나 판단을 구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큰 자이고 더 권위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생명이 있고 세상은 생명이 없다. 그리스도인은 천지의 주재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아들이요 그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이며 그의 지도를 받는 선생이고 세상 사람들은 사탄에게 속아서 사탄의 거짓말을 듣고 있는 자요 그에게 종노릇하는 죄인들이다. 누가 선생이고 누가 판단자인가? 누가 권세와 여유를 가진 자인가? 세상인가 그리스도인인가?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이 세상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히 큰 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다 판단을 구하고 도움을 청하는 것은 사람이 개에게 판단을 구하고 도움을 청하는 것과 같고 어른이 아이에게 판단을 청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브라함은 소돔에 살다가 잡혀간 그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소돔을 침략한 네 왕들을 쫓아가서 빼앗긴 사람들과 재물들을 도로 찾아왔다. 돌아오는 도중에 그는 두 사람을 만났다. 하나는 살렘 왕이요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이었고 다른 하나는 소돔 왕이었다.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서 아브라함을 축복했고 소돔 왕은 아브라함에게 '사람은 내게 보내고 재물은 네가 취하라'고 말했다. 이때 아브라함은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그는 누가 큰 자인가를 살폈다. 아브라함은 세 사람의 순서를 금방 확정했다. 제일 큰 자는 멜기세덱이었고 다음은 자기였고 마지막이 소돔 왕이었다. 그 순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해진 것이었다. 하나님과 제일 가까운 사람이 제일 큰 자이고 제일 먼 사람이 제일 작은 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는 축복을 받았고 그의 떡과 포도주도 기쁘게 받았다. 그리고 자기가 가진 것의 십분의 일을 예물로 드렸다. 그러나 소돔 왕에게는 아무 것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본래 그의 소유였던 재물들을 다 그에게 돌려주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소돔 왕이 자기보다 작은 자였기 때문이다.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창15:21-23)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으니....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빎을 받느니라"(히7:4,7) 왜 하나님의 영광을 소유한 교회가 영광이 없는 세상에다 영광을 구하는가? 왜 의로운 교회가 불의한 세상에게 판단을 구하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이 그가 입은 약간의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손해로 인해 형제를 고발하는 것과 더 나아가서 그의 일을 세상에 호소하여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사탄에게 미혹된 것이다. 그것은 정상이 아니며 당연한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은 자이다. 그 영광에 이미 부분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장차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될 것이다. 아들은 그냥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씨를 받았고 아버지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부름 받은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썩어질 육신의 작은 이익과 명예를 위해 형제와 다투고 고소하고 더 나아가서 그것이 교회 안에서 해결이 안된다고 해서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야 할 만큼 가난하고 초라한 사람들인가? 불의한 세상의 도움으로 자기 육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태도는 개 밥그릇에 있는 밥을 뺏어 먹으려고 개와 다투는 것과 같다.  

굳이 호소를 하려면 큰 자에게 가서 호소를 해야 한다. 큰 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이다. 형제들 간에 억울한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가서 기도하면 된다. 하나님은 죽지 않았으며 그를 찾고 그의 도움을 청하는 자들의 호소를 못 들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바울은 성도가 세상을 판단하는 자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서 세상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천사도 판단한다고 했다. 세상을 판단한다는 것은 세상을 심판하는 자라는 말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어떤 일을 판단한다는 말 즉 세상 이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깨닫는 자라는 뜻이 아니라 세상을 심판하고 다스리는 자 즉 세상 전체를 판단하는 심판자라는 뜻이다. 그만큼 큰 자인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주인인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판단하는 것이다. 이때 말하는 세상에는 지금 불법으로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악한 천사들 즉 사탄과 그 졸개들도 포함된다.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들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사탄을 진리로 제어하고 결박하는 자이다. 그의 모든 거짓말을 드러내며 그의 모든 망령된 일을 막고 부수는 자로 살고 있다.

불의란 무엇인가? 음행이란 무엇인가? 도둑질, 사기, 그리고 그런 일들로 인해 형제를 고소하여 기어이 내 이익을 챙기려는 행위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사탄의 거짓말에서 나온 망령되고 허무한 일들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우주, 이 세상이라는 그의 집에 세워놓은 질서를 허무는 일이며 그의 집을 야금야금 씹어서 축내는 일이다. 몸에 붙은 한 손이 다른 손의 손가락을 훔쳐오는 일이 바로 도둑질이다. 여러분은 도둑질의 실체가 이런 것인 줄 느끼는가? 남의 아내를 탐하고 음행하는 것은 내 살 내가 뜯어먹는 일이다. 도대체 세상에 남이 어디 있는가? 모든 사람은 다 하나의 공동체로서 하나 망하면 다른 지체들이 다 망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 세상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 삶의 원리이다. 세상은 진리를 몰라서 그런 일 곧 물고 먹으면서 망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안에서는 그런 불의가 저질러지고 있었고 또한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자기를 위해 유익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 곧 우리가 천국이라고 부르며 소망하는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리적 본성적 특성을 무시하고 억지로 이상하고 무리한 길을 펼치는 곳이 아니다. 천국이야말로 인간의 생리적 본성적 특성이 가장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정상적인 나라이다. 내가 내 몸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내 이웃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 천국이다. 자신에게 어떤 잘못이나 허물이 있을 때 조금 괴로워하다가도 결국 스스로 용서하고 앞으로 잘 하면 되지 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도 용서하고 격려하여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 천국이다. 천국은 작은 이익을 놓고 다투고 그로 인해 고소와 고발, 소송을 벌이고 그로 인해 형제가 완전히 망하고 쓰러져도 내가 그 위에 서서 홀로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탄의 망상대로 일이 전개되는 곳이 아니다.

바울은 말한다.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육신적인 문제로 다투고 소송하는 것보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편이 훨씬 낫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넉넉하고 온전한 생명을 소유한 자요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광과 여유를 드러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의 영광과 승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손해보고 지고 핍박받을 때 그 진가를 드러낸다. 이는 마치 오뚜기가 넘어져봐야 그 진가를 나타내고 씨는 묻어봐야 진가를 나타내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을 때 가장 큰 권세를 나타내었다. 세상에서 누리는 육신의 생명과 육신적인 삶, 일시적인 재미와 이익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왜 그런 것들을 조금 잃게 될 때 그렇게 억울해 하고 견디지 못하는가?

불의는 저지르는 것보다 당하는 것이 훨씬 낫다. 아들의 생명으로 인해 그것을 넉넉히 당하는 사람은 천국에 속한 자이고 아들의 생명이 없음으로 인해 작은 육신적 이익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범죄하고 소송하고 자랑하는 자는 천국에 속하지 않은 자이다. 그리스도인은 소송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이기는 자이며 져도 이기는 자이다. 그에게 이미 이기는 생명, 이긴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너희 관용을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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