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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지식 (1)

(골로새서 1:9-12)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지난 주일로 창세기 말씀 상고를 마쳤다. 우리가 창세기를 처음 공부하기 시작한 때가 1997년 9월 28일이었고 오늘이 1999년 9월 26일이니 꼭 2년이 걸렸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새로 신약 고린도전서를 상고하게 될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 계속 그럴 것이지만 우리는 매주일 함께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상고하고 있다. 성경을 상고하는 일은 무엇보다 소중하고 의미 있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준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성경을 공부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또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것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일의 참 목적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고 성경을 목적대로 합당하게 공부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성경을 공부하고 말씀을 나누는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종들의 체험과 말씀을 통해 그분 자신을 친히 계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곧 하나님이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항상 잊지 말아야 사실이 바로 이것이니 곧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단지 성경을 알거나 기독교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요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기 위함이라는 사실이다.

1.성경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의 차이

부활을 믿지 않던 사두개인들이 어느 날 부활에 대해 가르치신 주님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주님을 찾아왔다. 그들은 주님께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마22:25-28) 이에 주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22:29) 주님은 무엇을 말씀하셨는가? 성경을 잘 안다는 사람이 실제로는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일이 있으며 또 성경은 어느 정도 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 곧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계속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마22:30-33)

사두개인들은 성경에 무식한 자들이 아니요 상식과 교양이 없는 모리배들이 아니라 제사장 그룹의 유대교 지도자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성경도 하나님도 알지 못했다. 주님과 사두개인들은 다 같이 구약 성경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인용하여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주님은 진리를 정확하게 알고 바로 가르쳤지만 사두개인들은 진리에 대해 무지했으므로 말씀을 왜곡시켰다. 그 차이는 어디서 온 것인가? 그것은 바로 사두개인들은 한 번도 제대로 하나님을 경험한 적이 없음으로 인해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데 비해 주님은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의 생명과 그의 능력을 깊이 체험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깊이 알고 계셨다는 차이에서 온 것이다.

성경을 잘 아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사두개인들은 성경을 어느 정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의 많은 부분에 대해 여전히 무지했다. 특히 성경의 문자적 의미는 알았으나 그 정신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성경을 잘 아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하나님을 잘 아는 것이다. 만일 사두개인들이 하나님을 알았더라면, 즉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분이요 생명을 살게도 하고 죽게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심을 분명히 알았더라면 그들이 혹 성경은 잘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충분히 믿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구약 성경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그렇게 명확히 설명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구약 성경이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는 것은 비단 그 사실뿐이 아니다. 가장 궁극적인 지식인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도 성경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그것은 성경 저자들이 그런 사실에 대해서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본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소개하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 곧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들이 섬겨야 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목적으로 쓰여진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이나 그가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 또는 하나님을 믿어야 할 필요에 대해서나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힘들여서 입증하지 않는다. 그런 사실에 대해서는 다만 그렇다는 말로 족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에는 의문도 없고 논쟁도 없다. 하나님은 단지 '내가 전능하다'고 말씀하실 뿐이지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길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을 잘 이해하려면 먼저 하나님을 믿어야 하며 하나님의 능력과 인격을 깊이 체험해야 한다. 하나님을 잘 알아야만 하나님의 말씀도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의 책망을 받은 사두개인들은 어느 정도 성경을 알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조금 있었지만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 능력을 실제적으로 경험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주님이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2.하나님의 뜻을 알 때까지 기도함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성경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되려면 이제 말한 대로 먼저 하나님과 관계를 가져야 한다. 내가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참으로 나를 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스스로 확증할 때까지 하나님을 알아 나가야 한다.

(1) 주 예수님

주님은 마지막 순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마26:39-45)

여기서 주님은 같은 사안(事案)을 놓고 하나님께 세 번 기도하셨다. 한 번 기도하시고는 그 다음에는 될 대로 되겠지 하는 식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 때까지 계속 기도하셨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확정하기 위해 한 번 기도하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두 번째로 기도하러 가셨을 때 제자들은 피곤하여 자고 있었다. 그때 주님은 제자들이 자기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함께 고난에 참여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러한 주님의 싸움에 동참하지 못했다. 주님은 홀로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세 번째로 기도하신 후 자신이 죄인의 손에 팔려 십자가에서 죽게 될 것을 확신하시게 되자 더 이상 기도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이제는 자고 쉬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처음에 기도하실 때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26:39)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세 번 기도하신 후에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나중에 원수들이 주님을 잡으러 왔을 때 베드로가 칼을 빼어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며 대항하자 주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18:11)고 말씀하셨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주님이 세 번 기도하신 후 자기가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기까지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는 일을 중단하지 않으셨다.

(2) 바울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바울에게는 몸을 괴롭게 하는 무엇이 있었다. 그것이 신체적 질병이나 약점이든지 아니면 자기를 괴롭게 하는 어떤 사람이나 환경이었든지 그는 그것으로 인해 매우 큰 고통을 겪었다. 그는 그것을 가리켜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라고 했다. 바울은 이것이 그의 사역에 많은 지장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아뢰고 그것을 제거해 달라고 간구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고후12:7,8) 그는 세 번이나 하나님께 간구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그 가시가 제거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기 문제에 대해 주님으로부터 분명한 답을 들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 문제로 기도하지 않았다. 그는 네 번째 다섯 번째 기도하지 않았은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9,10)

바울은 자기 생각을 따라 문제를 결정하거나 해결하지 않고 오직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기 위하여 기도했고 그러한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가졌으며 하나님을 점점 더 깊이 알아갔다.

(3) 모세

모세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모세와 아론은 므리바 사건에서의 그들이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는데 그 내용은 그들이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민20:9-12)

그러나 모세는 약속에 땅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므로 자기로 그 땅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기 시작했다.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였사오니 천지간에 무슨 신이 능히 주의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신3:23-25)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지 않으셨다.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너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보라 네가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하고 그를 담대케 하며 그를 강경케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로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라"(신3:23-28)

이 말씀을 들은 모세는 다시 그 일로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았다. 그는 그 문제로 두 번 세 번 기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첫 번째 간구 때 이미 하나님의 응답이 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곧 '누구든지 하나님을 참으로 알기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알게 될 때까지 중단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게 되면 더 이상 그 문제로 기도하지 않고 오직 그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기도를 하는 목적은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그대로 하고자 하는 데 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정해진 뜻과 계획이 없다. 우리는 무엇이 길이며 어디로 가야 옳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믿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인생의 길을 아시며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과 때를 아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과 그의 뜻을 담는 그릇이요 토기장이는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적은 오직 그 분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는데 있지 단지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는데 있지는 않다.

우리의 목적이 거기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게 될 때까지는 결코 만족할 수 없으며 안식할 수 없다. 성경을 조금 읽었고 기도를 몇 번 했다고 해서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교회 생활을 오래 한 사람은 누구나 기독교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지식의 대부분은 성경의 사건과 말씀에 대한 어렴풋한 지식 내지 교회의 습관과 문화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지식은 반드시 성경을 참으로 아는 지식으로 발전하지 않으면 안되며, 또한 성경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참으로 아는 지식으로 발전하지 안된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을 다음과 같은 예를 통해 생각해 보자. 우리는 각각 우리 안에 있는 이런 저런 죄들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화내는 것을 이기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교만을 이기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세상을 이기지 못한다. 여기에 화를 잘 내는 사람 곧 남과 대화를 하다가는 끝에는 결국 다투고야 마는 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자기의 문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든 처리해 보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그것이 잘 안되어서 항상 고민한다. 그러던 중 로마서 6:14에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는 말씀을 보게 된다. 더 나아가서 로마서 8:1,2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는 말씀을 보게 된다. 이 말씀으로 인해 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을 수 있다는 성경 지식을 얻게 된다.
그러나 그 지식에도 불구하고 그는 실생활에서 여전히 화를 낸다. 분명히 진리를 소유하고 있건만 그것이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얼마든지 있으며 또 상당 기간 계속되기도 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성경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 지식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마치 인물 자신은 만나지 못하고 그의 사진이나 편지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사진이나 편지는 분명히 그 사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 사람 자신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만으로 그 사람을 충분히 알 수는 없다. 그것이 그 사람을 아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초에 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아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을 전부 보여주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을 즉각적으로 온전히 알게 해 주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죄를 이기는 비결이 나와 있으며 그 지식은 실제로 죄를 이길 수 있게 만드는 참 진리다. 그러나 그 지식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실제로 죄를 이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단순한 성경 지식과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간에는 큰 간격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체험을 통해 성경의 여러 진리들을 깨달았으며 그것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후대에 전해 왔다. 우리는 그런 형제들의 도움을 통해 많은 진리를 손쉽게 소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연 진리란 손쉽게 얻어지는 것일까? 책 한 두 권을 읽거나 한 두 사람의 말을 청종하면 그들이 일생을 통해서 배운 진리를 금방 체득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론적으로 보면 17세기의 그리스도인보다 20세기의 그리스도인은 훨씬 많은 영적 지식을 소유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 왜냐하면 앞 세대의 유산을 후대의 사람들이 물려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의 승리와 누림을 보면 별로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적은 지식을 가진 과거의 성도들이 많은 지식으로 무장하고 있는 현대 신자들보다 실제 생활에서 훨씬 강하고 풍성한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지식으로 무장하고 있는 현대 신자들이 이처럼 무력한 것은 진리의 지식은 단순히 머리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헌신과 체험을 통해 몸으로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 박사가 무식한 농부보다 하나님을 더 모를 수도 있다. 어째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문제는 성경 지식이나 진리에 대한 양적 지식이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믿고 순종했느냐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알 때까지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고 지속적으로 가졌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위대한 신앙인들은 단지 성경이나 신앙 서적을 읽고 진리를 깨달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읽고 깨달은 말씀을 바탕으로 하여 하나님을 실생활에서 조금씩 깊이 있게 체험해 나가는 중에 진리를 하나씩 분명하게 깨달았다. 그러므로 그 진리는 참으로 그들의 것이었다. 누구에게든지 진리는 처음에는 다 남의 것이다. 죄인으로서 우리 안에는 본래 진리가 거의 없었다. 다만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흔적이 본성 안에 미미하게나마 남아 있어서 하나님을 어렴풋이 아는 지식이 있을 정도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도록 기도하고, 하나님을 알도록 말씀을 읽고, 하나님을 알도록 다루심을 받은 사람은 진리가 그 속에 제 것으로 자리잡는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양한 과정을 거쳐서 깊이 가짐으로써 그의 문제를 처리했다면 그는 다른 사람이 같은 문제를 지니고 있을 때 그를 확실하게 도울 수 있다.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음을 분명하게 지식적으로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깨닫고 누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화를 잘 내는 다른 사람들을 너끈히 도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단지 성경 지식만 약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화를 잘 내는 어떤 사람이 자기를 찾아와서 조언을 구할 때 고작 자기가 알고 있는 성경 지식을 말해주는 것밖에는 달리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혈기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당신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당신의 그 화내는 성질을 뽑아달라고 하시오"

그러나 화내는 성질은 나무 뿌리를 뽑거나 이를 뽑듯이 그렇게 사람 안에서 쏙 뽑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질과 사람은 일체이기 때문에 사람이 죽지 않는 한 성질은 절대로 뽑히지 않는다. 죄를 뿌리뽑으라고 조언하는 것은 죄와 인간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데서 나온 헛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이 충고를 받은 사람은 그렇게 하려고 애를 써 보다가 이내 실패하고 말 것이다. 화를 안 내려고 하면 할수록, 화내는 성질을 뿌리뽑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화를 내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위치를 '형제를 돕는 자'에서 '진리에 대해 도움을 청하는 자'의 위치로 옮겨보도록 하자. 즉 앞에서 화내는 문제 처리를 위해 형제를 찾아가 조언을 구한 사람의 입장으로 가보자는 것이다.

그는 엉터리 조언을 받았기 때문에 문제 해결을 보지 못했고 따라서 더 나은 방법을 찾게 된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로 도움을 청한다. 이때 하나님은 성경이나 어떤 사람을 통해서 그에게 로마서 6:6,7의 진리를 알게 만드신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실은 '하나님은 죄인에게 있는 하나 하나의 성질을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 자체 곧 옛사람 전체를 다루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머리털이나 수염을 뽑듯이 죄를 육신에서 뽑는 것이 아니라 옛 사람 자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심으로써 사람을 죄에서 놓임 받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그 사람은 자신이 더 이상 화를 내거나 성질을 부릴 수 없는 자 즉 죄에 대해 죽은 자임을 깨닫는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안 후에도 여전히 화를 낸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다른 형제를 찾아가 조언을 구한다. 그 형제는 말한다. "형제는 유혹이 올 때마다 자신이 이미 죽었다고 여겨야 합니다. 나는 이미 죽었으므로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자라는 사실을 안팎으로 천명하며 자신의 죽음을 공고히 해야 합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매일 자신이 죽었음을 생각하며 천명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그는 여전히 살아 있으며 성질은 계속 나온다.

결국 그는 금식을 하며 고행도 하며 자기를 죽은 자처럼 방구석에 쳐 박아두기도 하고 아무 생각도 없는 자처럼 멍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애쓰기도 하며 각가지 방법으로 죽은 자가 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그는 여전히 죽지 않으며 성질을 버리지 못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그가 믿음으로 죽음을 누리려고 하지 않고 실제로 죽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가 죽은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포함되어 죽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믿음으로써 죽음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헛된 노력이다. 우리 옛 사람의 죽음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선물이며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다. 이 외에 산 사람이 (실제로 죽기 전까지) 죽은 자처럼 되는 다른 길은 없다.

죽은 척 하는 것이 실제로 죽은 자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죽음(自己否認)의 필요성을 느낀 나머지 산 상태에서 억지로 죽은 자인 척 하려고 하지만 아무 효과도 거두지 못한다. 내가 안 죽었다는 것은 내가 알고 마귀가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속이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자신의 죽음을 믿음으로 누리는 자가 아니면 아무리 죽은 척 해도 여전히 혈기를 내며 펄펄 살아있는 자신을 보게 될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죽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죽음을 '우리의 대표자'의 죽음으로, 그리고 우리의 죽음으로 알고 믿을 때 그 죽음이 우리 것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죽음이 우리가 죽어야 할 그 시간에 (유혹이 오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천년 전에 이미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안에서의 주관적인 체험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확실하게 이루신 역사를 의지해야 한다.

이것을 깨달은 그 사람은 승리를 누린다. 그러나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는 다시 혈기를 내며 화를 내게 된다. 하나님께 이유를 물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자신을 신뢰하지 말고 겸손히 계속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가르치신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자신의 죄성과 무능을 뼈저리게 느끼며 탄식했듯이 우리도 그렇게 깨닫고 절망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구원의 주께서 곁에 계시더라도 늘 겸손하게 그를 의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진리 위에 서 있는 사람에게도 실패와 무능과 무기력에 빠지는 것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다루심을 통해 이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단지 메마른 지식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범사에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붙잡게 된다.

어떤 경우에는 그렇게 하여 승리를 거둔 후에도 또 실패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는 하나님께 '이번에는 왜 또 화를 내게 되었습니까' 하고 묻는다.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네가 단지 '화내는 성질'에 대해서만 다루고 나머지 다른 죄들은 처리하지 않고 내버려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을 깨달은 그 사람은 급한 현안 문제(화내는 문제)만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다른 모든 죄들도 함께 처리하기를 추구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를 한 부분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의지함으로써 전체적인 거룩을 도모하게 된다.

그런 후에도 다시 실패를 하기도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가 승리한 후에도 기도와 말씀 연구를 통해 계속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져나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혼자가 아니라 형제들과 함께 모여서 주님을 찬송하며,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고 격려함으로써 한 몸으로 연합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한 지체가 다른 지체와 분리되어 혼자 있을 때에는 비록 승리하더라도 그 승리는 불완전한 승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승리는 단체적 승리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승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이 우선 하나님과 연합하고 다음으로 함께 부르심 받은 형제들과 연합하여 다 한 몸을 나타내기를 원하신다. 그리하여 각 사람의 승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승리가 되기를 바라신다.

바로 이와 같이 이런 저런 과정을 겪는 중에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의 문제를 처리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통을 가지게 되며 그 교통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알아가게 된다. 이렇게 얻은 지식이 진정한 영적 지식이다. 성경 공부는 이러한 지식을 얻는데 있어서 절대적인 기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상고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출발이요 기초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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