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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지식 (2)

(골로새서 1:9-12)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지난 주에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기 위해 많은 말씀 상고와 기도의 경험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했다.

만일 우리가 여러 번의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점점 깊이 알게 되고 지속적인 관계 증진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깊이 아는 자가 된다면 우리는 어떤 형제가 문제에 처해 있을 때 그 사람이 어느 지점에서 통과를 하지 못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으며 또한 그 사람을 올바르게 도와줄 수 있다. 우리는 이미 10번 혹은 20번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처리를 받았기 때문에 어떤 형제에 대해 영적 조언을 해 줄 때 성경에 관해서만 말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령 충만을 추구한다고 하고 있고 그것에 대해 여러 가지 말을 하고 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매우 논리 정연하고 성경적이다. 그러나 그 말에서 우리는 종종 무언가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 성령에 대해 말하고는 있지만 그들의 말에서 무언가 그들이 하나님을 잘 모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과 성령 충만에 대해 말하면서도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한다. 성령의 인도에 대해 말하면서도 깊이 기도하고 주님의 뜻을 알 때까지 주님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일은 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서 오랫동안 듣기도 하고 말도 하다보니 우리 역시 종종 별 생각 없이 진리에 대해서나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 삶은 지식과 실제 간에 큰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또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 지식만으로는 하나님에 대해 충분히 아는 것이 아니며 충분히 말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참으로 말할 수 있도록 충분히 배워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오직 실제로 주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을 때만 가능하다. 주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아는 것과 그것에 순종하는 일에 온 힘을 다 쏟았고 그것에 목숨을 걸었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마음에 확정하고 그 뜻에 순종할 수 있기 위해서 그는 간절히 기도하셨다. 그는 한 번만 기도하고 자기 편한 대로 생각하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질 때까지 세 번 연거푸 기도하셨다. 사도 바울도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다. 그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을 듣기까지 말이다.

하나님을 아는 문제에 있어서 사람들은 성경을 보든지 설교를 듣든지 연구를 하든지 해서 자기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문자 그대로 '자기'가(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지 하나님이 그를 아시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자기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실제대로(계신 그대로) 아는 것과 다른 것이다. 세상 종교인들이나 미신을 믿는 사람들도 다 자기대로 신을 알고 자기대로 하나님을 안다. 다 하나님을 알고 있지만 문제는 그것이 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자기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는 안된다.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계시 가운데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가지려면 십자가를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 여러 번 하나님의 처리를 받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참으로 알게 된 지식이 아니라면 그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다. 자기도 살지 못하고 남도 살리지 못한다.

나는 요즘 어떤 사람들이 진리에 대해 말을 할 때 그 말을 조금 듣다보면 그가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는지, 그가 참으로 그 진리를 알고 있는지 어떤지에 대해 알 수 있음을 느낀다. 딱히 이러저러하기 때문에 이 말이 진실이다 혹은 거짓이다라고 말하기는 어렵더라도 느낌으로 우리는 어떤 말이 진정한 말인지 겉으로만 하는 말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마가렛 바버라는 여자 선교사가 있었는데 그는 진실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그가 얼마나 주님을 잘 알고 있으며 얼마나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인가를 분명하게 나타내었다. 그는 기도할 때마다 주님께서 언제 오시느냐고 물으며 속히 임하시기를 구했다. 1925년 마지막 날에 그는 하나님께서 기도하면서 "1925년이 이대로 지나가도록 두십니까? 하나님께서는 1926년이 되기까지를 기다리십니까? 저는 이 해의 마지막 날인 오늘이라도 주님이 오시기를 구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는 형제들을 만날 때마다 "형제여, 주님께서 아직도 오시지 않으신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라고 물었다. 그는 참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그의 말과 행동은 그가 종말과 재림과 예언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라 진정으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나그네임을 보여주었다.

세상에 종말에 대해서 예언에 대해 연구하고 그것에 대해 말을 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참으로 종말을 어떻게 기다려야 하며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고 행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몇 년 전에 시한부 종말론이 성행할 때 주님의 재림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며 많은 말을 했다. 그때 많은 신자들과 신학자들이 시한부 종말론자들을 이단이라 하며 비난했다. 그들은 종말은 결코 1992년 10월에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들이 주님의 재림은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1992년 10월에는 결코 주님이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잘못이다. 1992년 10월 뿐 아니라 1992년 8월이나 9월에도 주님은 오실 수 있었다. 만일 시한부 종말론자들을 비난한 사람들이 참으로 주님을 대망하는 자들이었다면 시한부 종말론자들을 책망할 때 그들의 잘못된 신앙과 종말을 잘못 대비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지적하고 책망했어야 했지만 그들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하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공감을 나타내고 함께 그러한 열망을 보였어야 했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염려에서 놓이고 세상의 소망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소망을 두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주님을 참으로 대망해야 하며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기도처럼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라고 항상 구해야 한다.

내가 볼 때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문제는 그들이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린 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기다린 내용이었다. 사실상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고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들이 현세에서 못 이룬 육신적 소망이 미래에 이루어질 것을 기다린 것이다. 그들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세상에서 하던 일들을 포기하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던 것은 내용상 잘못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옳은 것이다. 당시 종말론에 대해 극력 반대하며 비난한 신자들 중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 여전히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반대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아직 버리지 못한 많은 세상 일들이 있고 그런 것들이 매우 소중하였기 때문에 종말을 두려워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 즉 종말과 재림에 대해서 혹은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이런 저런 말을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 그런 말을 한다는 식으로 말을 한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배우고 그의 처리 안에서 뼈저리게 느낀 것을 따라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 말한다면 우리는 그 말을 할 때마다 전율을 느낄 것이다.

나이 든 신자가 한 분 있었는데 그는 성경 지식도 많지 않았고 여러 자녀의 아버지로서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진실로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지내시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주님이 모든 일에 책임을 져 주신다고 말했다. 비록 그의 가족은 가난하였지만 그와 그 아내는 행복하였다. 그는 그의 삶에 많은 어려운 문제들이 있지만 그리스도께서 그 문제 하나하나를 책임져 주신다고 말했다. 그때 곁에 있는 사람이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책임을 집니까?" 하고 묻자 그는 "나는 찬송할 책임이 있습니다." 라고 답했다. 이것은 마치 여호사밧 왕이 전쟁에 임할 때 다른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오직 노래하는 사람들을 앞에 세워서 하나님을 찬송케 함으로써 전쟁을 치른 것과 같다.(역대하 20장) 그는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 삶의 아버지가 되시고 보호자가 되시는지에 대해서는 완전한 전문가였다. 이것은 한 두 마디 성경 구절을 앎으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며 주님을 실제로 따른 데서 온 결과였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는 사실은 지난번에도 언급한 바 있다. 그래서 조금 기도하고 말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불분명한 것이 분명해 질 때까지 지속적으로 기도하여 기어이 응답을 받아내어야 한다. 기도는 전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지속될 수 있다. 그러므로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기도의 응답이 속히 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않고 계속 기도할 수 있다. 한 번만 기도하고 포기할 것 같으면 차라리 전혀 기도를 하지 않는 편이 낫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얼마나 신뢰하고 얼마나 귀히 여기는지에 관심이 있지 기도에서 행해지는 몇 마디의 말 자체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지 않다. 말이 문제라면 처음에 정확하게 아뢰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같은 내용의 기도라도 때로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심지어는 열 번이나 백 번 반복되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우리가 참으로 그를 믿고 인내하는 것을 보시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급하게 서두르는 일은 믿음 생활, 기도 생활에서 금물이다. 믿음은 인내와 길을 같이 간다. 만일 하나님께서 친히 어떤 일을 이루어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백 살까지라도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이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신다. 다만 우리가 그 일을 보느냐 보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기다리느냐 기다리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 사이비한 일을 해 버리느냐에 달려 있다. 열왕기하 13:14-19에는 아람이 이스라엘을 지배하여 이스라엘이 크게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의 한 일을 기록하고 있다. 선지자 엘리사가 죽을 병에 걸려 곧 죽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그를 찾아가 당신이 죽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눈물을 흘리며 답답할 때 엘리사는 그에게 '활과 화살을 취하여 창을 열고 쏘라'고 말한 뒤 요아스가 그렇게 하자 다시 '화살을 가지고 땅을 치라'고 말했다. 그때 요아스가 세 번 치고 그쳤다. 그러나 엘리사는 왕에게 '적어도 대여섯번은 쳐야지 세 번만 치고 그치느냐'고 화를 내었다. 만일 화살로 땅을 계속 쳤더라면 아람을 완전히 멸할 수 있게 될 것인데 그렇지 않았으므로 조금만 대항하고 말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한 번이나 두 번 기도하고 자기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다고 기도를 그쳐서는 안된다.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이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아들들이 아니고서는 가질 수 없는 특권이다. 기도하며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는 것은 두 세 번 하고 그쳐서는 안된다. 그것은 의무나 힘든 노동이 아니라 영광스럽고 복된 특권이며 재미있는 일이다. 기도란 마치 종이를 저울에 올려놓는 일과 같다. 천칭의 한편에는 100g 짜리 추를 놓고 다른 한편에는 종이를 놓는다면 처음에 놓는 종이는 저울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한 장 한 장씩 올려놓다가 마침내 마지막 종이를 놓는 순간 저울은 움직이게 된다. 기도도 이와 같은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예수 믿고 구원받는 일이 그처럼 수고와 노력과 공을 들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사람은 처음에 죽은 상태에 있으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생명의 성장은 하나님과 사람이 같이 하는 것이다. 부모가 밥을 주고 지켜주기 때문에 우리는 부모님이 우리를 키웠다고 말한다. 그러나 부모님이 우리 살을 찌게 하고 우리로 직접 자라도록 무슨 조작을 한 것은 아니다. 성장은 아이 자신이 부모로부터 얻은 밥을 '먹고 소화를 하고 운동을 하는 가운데서'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생명을 키우시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우리가 숨도 안 쉬고 움직이지도 않는데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역사에 믿음과 인내와 찬양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가지는 데는 깊은 주의와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죽을 몸에 관하여, 그리고 우리의 사업에 관하여, 우리의 가족에 관하여, 우리의 환경에 관하여, 우리가 겪는 모든 사건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그 일에 개입하셔서 처리해 주시는 것을 기대해야 하고 그렇게 되도록 간구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기어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해서 기어이 하나님의 능력을 알아야 한다. 성경만 아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하나님을 아는 경험 없이 성경만 알면 아무 것도 모르게 된다. 나중에는 성경마저 곡해하고 그 의미를 제대로 모르게 되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게 되면 성경도 알 수 있다. 주님의 마음을 아는 자는 주님의 말씀을 다 이해할 수 있다.

바버 여사는 그의 삶에 있어서 그 무엇 하나라도 우연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곁에 있는 형제들이 정말로 그러냐고 물었을 때 그 자매는 반드시 그렇다고 말했다. 그때 한 형제가 속으로 '중요한 사건이야 그렇겠지만 사소한 일까지 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그 무렵에 한 형제가 감기가 걸렸다. 그때 바버는 그에게 그 감기를 통하여 어떤 교훈을 배웠는지를 묻는 편지를 썼다. 그것을 본 이 형제는 속으로 '만일 그가 장티푸스에 걸렸다면 그것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었느냐고 물을 수 있지만 보통 감기에 걸린 것을 가지고 그렇게 물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감기 걸렸던 형제는 그 자매로부터 실제로 큰 도움을 받았다. 그 형제는 그의 회답 편지에서 '처음에는 그런 사소한 일에는 아무 관심도 가지지 않았지만 자매의 편지를 받은 후로부터는 크게 깨닫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고 세밀하게 가지기 시작했으며 그로 인해 큰 변화를 겪었다'고 말했다.

그런 바버 자매 자신이 병이 들게 되었다. 그는 고열과 고통으로 신음하게 되었다. 그때 그는 나이가 많았고 곁에 돌봐줄 사람도 없었으며 돈도 없었다. 그는 병석에서 주님께 기도했다. 그는 왜 자신이 그런 병에 걸려야 했는지를 하나님께 계속 여쭈었다. 하나님은 마침내 그에게 '그 병은 자연적인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도 아니고 오직 마귀의 공격으로 인한 것이라'고 일러주셨다. 그때 자매는 일반적인 병이라면 요양하고 치료해야 하지만 사탄의 공격으로 인한 병에는 굴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사탄을 꾸짖고는 자리에서 즉각 일어났다. 그리고는 찬송을 지었다.

"원수를 향한 나의 말은 항상 '아니다' 이다. 아버지를 향한 나의 말은 항상 '예' 이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언제나 성취되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의 법칙에 순종할 때 나에게 권능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내 속의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 찬송의 작사를 마치자마자 그 자매는 일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그의 병은 사라져 버렸다. 이 자매는 자신이 어떠한 상황 속에 처해 있든지 그 상황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권능의 손을 보았다. 이 자매는 그리스도의 승리가 무엇을 말해주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항상 형제들에게 "그리스도의 승리만 안다면 능력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자매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전에 성경에 나오는 여러 그리스도의 승리에 관한 말씀들을 알고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승리를 참으로 경험한 그 자매가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을 때 그 어느 때보다 실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한 번은 어떤 형제가 병이 났는데 바버 자매가 그를 보러 왔다. 그때 그 형제는 육체적으로도 고통스러웠을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여러 가지 일로 괴로웠다. 그래서 그 형제는 자매에게 자기의 괴로운 형편을 조목조목 토로하였다. 그러나 형제가 무슨 말을 하고 나면, 자매는 그를 바라보면서 "그리스도는 승리자이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자매님에게 "나는 이 육체적인 병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적인 어려움이 해결되지 않으므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때도 그 자매는 다시 "그리스도는 승리자이다."라고 말했다. 그때 그는 말했다. "이 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매님이 그리스도의 승리가 사탄을 이겼고 그 피가 우리 죄를 깨끗하게 한 것을 말한 것은 물론 옳습니다. 또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셨기 때문에 제 병이 치료된다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문제는 제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고 범죄한 데서 온 것입니다. 저는 지금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매님은 그리스도가 승리자이다 라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이 말을 들은 후에도 자매는 여전히 그리스도는 승리자라는 주장을 하였다. 바버 자매는 그 형제에게 성경을 두 구절 읽어주었다. 그때 그 형제는 그리스도의 승리가 외적인 문제만 해결할 뿐 아니라 내적인 문제도 해결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날부터 그 형제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승리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과거에 그가 가지고 있었던 지식은 단지 성경적인 지식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 일을 계기로 하여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문제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이전에 그가 가지고 있던 승리는 마치 갈대로 만든 무기와 같아서 아무 힘도 쓸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승리 안에 들어 있는 전체를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승리에는 적과 죄와 질병과 모든 것을 이기는 승리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 관계를 깊이 가지는 경험을 거듭거듭 가지고 있던 그 자매는 그리스도의 승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곁에 있는 형제들을 도와줄 수 있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말로는 성경, 성경 하면서 실제로는 성경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여러분은 어떤가? 성경 66권 중에서 여러분이 아주 익숙하게 잘 알고 있는 책이 어떤 책인가?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위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성경 가운데서 단 한 권도 철저하게 알고 있는 책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슬픈 일은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원한다면 우리는 그 무엇 하나라도 소홀히 지나쳐서는 안된다. 우리 개인 신상에서 발생하는 일이자 가족 가운데서 발생하는 일이나 직장에서 발생하는 일이나 육체에서 발생하는 일이나 환경에서 발생하는 일이나 다 그냥 지나쳐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우리가 정신질환자처럼 매사에 지나치게 예민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들어야 한다. 성령께서는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고 계시므로 우리가 조금만 주의를 놓쳐도 그 음성을 들을 수가 없다. 우리 생각으로 우리 고집으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는 그의 뜻을 알 수 없으며 그의 위로나 책망을 받을 수 없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믿음은 본래 그런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확신을 얻을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을 자유롭게 나타내고 증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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