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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린도전서 서론

오늘부터 우리는 고린도전서를 상고하고자 한다.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이다. 바울 당시 고린도는 헬라와 마게도니아 거의 전역에 뻗어 있는 아가야(Achaia)라는 로마 영지의 수도였다. 이 도시는 총독이나 그 영지를 다스리는 자가 거하는 곳이었다. 사도행전 18장에 의하면 바울이 고린도에 머무는 동안의 총독은 갈리오라는 사람이었다. 갈리오가 아가야 지방의 총독으로 있었던 시기는 A.D. 51년 봄부터 52년 봄 무렵까지 혹은 52년 봄부터 53년 봄까지였다. 사도행전 18:12에 의하면 바울 일행은 갈리오가 고린도에 취임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고린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주후 51년 봄이거나 52년 봄이었을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때부터 고린도전서를 쓸 때까지 고린도교회에서 발생했던 여러 일들은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내용을 근거로 판단할 때) 약 2년의 기간 동안 발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는 주후 53년이나 54년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을 하는 중의 어느 봄에 에베소에서 쓰여졌다.(고전16:8) 바울의 생각은 오순절 때까지 거기서 머물다가 마게도냐를 거쳐 고린도로 다시 나아가려는 것이었다.

2.고린도 교회의 문제와 원인

고린도전서는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전해들은 바울이 고린도교회가 진리 위에 바로 서도록 말씀으로 경계하고 경고하며 권면한 편지이다. 고린도교회가 다른 교회에 비해 특별히 문제가 더 많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여러 가지 문제가 나타난 교회였다. 고린도교회에서 발생한 문제는 크게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형제들이 신앙 사상이나 배경, 출신 등의 차이로 서로 분열하여 당파를 짓고 다툰 것이다. 둘째는 형제들이 하나님께로부 받은 은사를 가지고 서로 사랑하고 섬기지 않고 누구의 은사가 더 낫고 더 신령하냐 하면서 자랑하고 다툼으로써 은혜와 은사를 오용한 것이다. 셋째는 성도답지 못한 부도덕한 생활이나 저급한 삶을 용인한 것이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겠지만 궁극적인 것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도 처음에는 바르게 출발했을 것이다. 그들이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고전 9:1) 구원을 받은 자들임을 생각할 때 그들은 바른 진리를 접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밖에서 들어온 악한 무리들로 인해 거짓 가르침에 빠졌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그 복음의 길에서 벗어나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들이 만일 그리스도를 바울에게 들은 대로 알고 배우기를 계속 힘썼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갔을 것이며 문제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주님과의 관계를 가짐에 있어서 한 두 번 관계를 가지고 그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주님을 알되 주님과 생명 안에서 하나로 연합하기까지 계속 배우고 제대로 관계를 가지며 주님을 경험했다면 거짓 무리들의 미혹이 있더라도 거기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온 은혜와 은사를 마치 자기 육신의 재능을 자랑하듯이 자랑하고 그것으로 서로 다툴 수는 없었을 것이며, 부도덕한 생활을 계속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를 알되 그의 능력에만 관심을 가지거나 구속 사역과 신비적 은사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질 뿐 주님의 인격과 생명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늘날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알고 그 안에서 추구하는 구원의 내용이 무엇인가? 거의 대부분의 경우는 죽은 후에 천국에 가는 것이고 세상에서는 육신적으로 평안한 삶을 누리는 것이다. 좀 나은 사람은 주님의 보혈로 죄 용서를 받으며 하나님의 보호와 위로로 인해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을 추구한다. 이것은 신체적 만족을 넘어서 정신적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신비적인 현상을 체험하고 신비적인 능력을 소유함으로써 종교적인 만족을 얻는 것을 추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을 닮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그의 형상으로 혹은 그의 아들로 사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드물다.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스럽고 거룩한 생명(인격)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이 베드로가 형제들에게 권면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지 못하고 기독교의 잡다한 지식과 교회 문화, 종교적 습관을 익히는 그쳤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의 문제 역시 이와 같은 이유로 발생한 것이다. 모든 문제는 그리스도를 참으로 아는 지식이 부족한 데 기인하는 것이다. 당시의 헬라 사람들은 특히 철학적이고 종교적이었기 때문에 진리에서 떠나 잘못된 길로 빠지기 쉬웠다. 이것은 오늘 한국 교회의 신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본래 유교와 샤머니즘적 배경 위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상층의 지식인들의 경우) 유교 영향을 받아서 기독교를 윤리적인 것으로 혹은 철학적 사상으로 받아들이기 쉬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로 하층의 서민들의 경우) 온갖 잡신을 섬기는 습관을 따라서 기독교를 무속적이고 종교적으로 받아들이기 쉬었다. 그러다 보니 한쪽에서는 방언이나 예언, 입신 등과 같은 신비적 체험과 병고침을 특히 많이 추구하게 되고 그에 따라 신비적 집단과 기도원이 성행하게 되었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진리에 대한 바른 지식(소위 정통 교리)을 가지고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주님께 대한 순종은 없이 스스로 만족하고 자랑하며 실생활의 열매 없이 허례허식과 방종과 외식에 빠지는 일이 많이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참 지식 및 경험의 부족과 아울러 고린도교회를 곁길로 빠지게 만든 또 다른 원인은 '복음과 배치되는 거짓 가르침'이 밖에서 들어와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러한 잘못된 가르침의 대표적 사상은 당시 크게 발흥하고 있던 [영지주의 사상(그노시스주의)]였다. 이것은 구원이 특별한 영적 지식을 소유함으로 이루어진다는 세상 철학의 일종인데, 1세기의 초대 교회부터 2, 3세기의 교회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교회들이 이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혼란을 겪었다.

영지주의는 물질은 악하고 정신은 선하다는 이원적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물질적인 이 우주는 악한 신에 의해 지어졌고 따라서 악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이 악한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그 구원은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소위 '靈知'(영적 지식 ; 그노시스)를 얻음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 지식을 얻으면 하급의 아이온인 데미우르고스(조물주)가 지은 이 죄악된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런 사상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대체로 지식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지식이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지식주의란 지식을 모든 것 가운데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정상적이라면 자기 속에서 근본적이고 실제적인 생명의 변화(거듭남)가 일어나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지식주의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단지 어떤 소위 '구원의 지식'이라고 하는 것만 깨닫기만 하면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말하자면 복음을 알고 그 복음이 말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단지 복음을 이해하고 인정하기만 하면 그 상태를 곧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고린도교회 신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구원 진리를 깨닫고 있는 것 자체를 구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어떤 것이 참 진리이며 참 지식이냐 하는 것과 그런 지식을 과연 소유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누구 지식이 옳으며 완전하냐 하는 것을 놓고 서로 다투게 되었고 또 과연 누구 누구에게 그 구원 얻는 지식이 있느냐 하는 것을 놓고 판단하며 싸우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고린도교회의 신자들은 서로 자기가 배운 것,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지식이 참되고 완전한 지식이라고 주장하며 자랑하며 다투었다. 이로 인해 편당이 생기고 논쟁과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가 소유한 지식이 참 지식이라는 것과 자기는 확실히 그러한 구원의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각종 신기하고 특별한 은사를 증거로 내놓았다. 그리고 그런 은사를 서로 최고의 은사요 진짜 은사라고 주장하며 자랑했다.

뿐만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참 지식을 가진 사람은 이미 모든 세상 질서와 문제를 초월하여 구원을 받았으므로 더 이상 세상 삶과 질서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부도덕하고 방종하며 무질서한 삶에 빠져들었다. 구원의 지식을 소유하지 못한 세상 사람들이나 세상 삶의 제한을 받으며 조심할 것이지 이미 세상을 초월하여 하늘에 속하게 된 사람은 세상 도덕과 질서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바로 이런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구원을 오해하고 실패에 빠져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구원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임(믿음)으로써 그의 구속과 승리, 그의 거룩한 인격이 실제로 자기 것으로 누려지는 상태를 말한다.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를 실제로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일 없이 단지 복음을 아는 것을 가지고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탄에게 속은 것이며 망상이다. 그런 사람 안에는 아들의 생명이 없다. 아들의 생명이 그 안에 없기 때문에 부도덕하고 교만하며 이기적인 것이며 또한 그런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데도 그것을 문제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참으로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과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 곧 고린도교회의 일부 신자들과 같이 지식주의에 빠져 망상 속에서만 구원을 받은 사람의 차이는 그가 무엇을 구원의 증거로 내세우는가 하는 데서 드러난다. 참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의 생명이 어떤 생명인가'를 말한다. 즉 구원의 증거로 그의 거룩한 인격과 거룩한 생활을 내 놓는다. 생명의 열매를 통해 자기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진정한 성도의 특징은 믿음과 착한 행실이다. 범사에 하나님의 아들을 의지하고 그 생명을 좇는 태도, 그리고 그 생명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형상이 자기 속에서 이러저러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말하는 것, 이것이 바로 참 신자가 자기의 구원을 입증하는 진정한 증거물들이다.

그러나 지식주의자들은 항상 어떤 특별한 지식을 지니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겸손과 자기 부인, 성령을 좇음과 같은 '믿음의 자세'나 사랑과 거룩한 삶과 같은 인격적 열매를 내 놓지 않으며 언제나 방언이나 예언, 투시, 입신, 신비적 체험, 병 고침 등의 신비적 은사 내지는 어떤 신령한 지식을 소유한 것을 구원의 증거로 내 놓는다.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지식주의자들이 많이 포함된 고린도교회는 기독교 진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과 열심과 은사가 있었지만 생명의 열매는 별로 내놓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지식과 은사를 소유함으로 인한 자랑과 교만, 시기와 질투, 분쟁과 편당은 있었으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말미암은 사랑과 겸손, 덕 세움과 거룩한 행실은 별로 없었다. 거기다가 고린도라는 도시 자체가 향락적이고 번화한 항구 도시였기 때문에 고린도교회는 그 도시의 좋지 않은 환경의 영향을 받아서 더욱 문제 있는 교회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3.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소망과 확신

이런 이유로 인해 고린도교회의 미래는 별로 희망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 교회가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로 볼 때, 고린도교회가 장차 흠이나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신부로서 온전하게 단장될 가망은 별로 없다고 볼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서신의 서두에 그 교회를 책망하는 말이나 탄식과 비관의 말을 담지 않았고 심지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권면의 말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그 교회의 영광스러운 실제에 대해서 말했으며 장차 그 교회가 주님 오시는 날에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교회로 서게 될 것을 확신한다는 말을 했다.

1:3의 축복은 인사치레라 치더라도 1:4에서 바울은 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으며 1:5-7에서는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지식과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으로 인해서 감사한다고 말함으로써 그 감사가 형식적인 인사치레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더 나아가서 1:8에서는 주님께서 그들을 재림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교회로 끝까지 견고케 할 것이라는 지극히 복되고 긍정적인 전망을 피력했다.
바울이 이렇게 문제가 많은 고린도교회에 대해 지극히 긍정적인 전망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답은 고린도전서 서론부(1:1-9)의 첫 두 절과 마지막 한 절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전1:1-3)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1:8,9)

고린도교회가 희망적인 것은 그 교회에 나타난 문제가 많든 적든 간에 그 교회가 주님의 것이요 하나님이 그의 목적을 가지고 부르신 교회이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의 형제들은 자랑꾼이나 싸움꾼이나 바람둥이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자리에서 벗어난 거룩한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그렇게 부르신 하나님은 미쁘시고 확실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어떤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끝은 맺지 못하는 분이 아니며 이러저러하게 만들겠다고 해 놓고는 중간에 포기하거나 일이 틀어지도록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다.

4.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도로 부르심을 받음

바울은 1절에서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했다. 그리고 2절에서 고린도교회 형제들도 사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성도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했다. 바울이 말한 바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든 성도로 부르심을 입었든 우리는 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며,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온 것이고 여기 서 있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이 길을 걷고 있거나 스스로 이 길을 택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은 다 육신의 뜻을 거스른 길이며 우리 본성을 거스려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일은 오직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과 계획을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바울은 어떻게 사도가 되었는가? 그가 훌륭한 사도가 될 것 같은 가능성이 있어서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는가? 아니다. 그는 전에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다. 그가 사도가 된 것은 오직 그를 향한 하나님의 그러한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실제로 훌륭한 사도가 되었다. 그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고 시험도 받았지만 결국 그 일을 잘 감당해 내었다. 그는 죽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딤후4:6-8)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인으로 즉 성도로 사도로 성공했다는 말이다. 이는 마치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바울의 전망에 의하면 고린도교회도 세상 마지막 날 그런 말을 하며 주님 앞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이다. 많은 위험과 큰 실패 가운데서도 교회는 최종적으로 승리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냥 이 자리에 와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부르신 이가 있어서, 부르신 분의 뜻이 있어서 여기 서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교회가 승리하는 것은 부르심 받은 각 사람의 능력이나 가능성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바울이나 베드로가 본래 잘난 사람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리고 고린도교회 형제들이 잘난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처럼 우리도 잘난 사람들이 아니지만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자신 안에 어떤 희망적인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어서가 아니라 뜻을 가지고 우리를 부르신 이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능력과 가능성을 보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고 오직 그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우리를 부르셨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갈1:1)

그리고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희망이 있고 성공으로 끝을 맺는 것이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5: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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