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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교회 (1) / 고전1:1-9

2010.05.01 11:11

이상봉 조회 수:7587

5.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음

사도란 말은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바울은 자기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다. 이것은 누구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그는 누구로부터 무엇을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인가? 그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했다. 이것은 곧 그가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보냄을 받았으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임을 나타낸 것이다.

바울은 참으로 다른 그 어떤 목적으로도 보냄 받은 자가 아니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해 보냄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였다. 그는 자신이 무슨 뜻을 가졌든지 무슨 능력을 가졌든지 어떤 개인적 관심과 계획을 가지고 있었든지 전혀 상관없이 오직 주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을 건질 구주이심을 전하는 일만 수행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주요 우리가 따라가야 할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말하는 것,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를 그러한 구원과 생명으로 이끄는 방편이므로 우리는 다 그의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존재 목적이요 삶의 내용이었다.

그는 참으로 가는 곳마다 오직 예수만 말했고 오직 십자가만 말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1,2)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도요 그 일을 위해 부름 받은 사도였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말고도 복음이라고 하는 것들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수님말고도 자기를 인류의 구원자요 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말고도 자기의 사상과 가르침을 '복음'이요 진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었다. 불교나 회교와 같은 종교 사상이나 헬라의 여러 철학이 다 그런 것이고 또한 최근에 나타난 공산주의 사상도 그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는 제법 그럴듯한 '복음들'도 있고 아무 납득할만한 근거도 없이 자기가 구세주고 자기 말과 행동이 사람들을 구원할 것이라고 하는 이단 교주들의 터무니없는 '복음들'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소식만이 참 복음이라고 힘있게 증거했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삶으로 보이신 내용만이 인류의 참 길이요 진리라는 사실을 증거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기독교 안에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만이 절대적이라고 하는 생각이 너무 배타적이어서 교양 있고 품위 있는 현대인의 모양으로는 적당치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래서 종교 다원주의라는 사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주장하고 강조한 '오직 예수', '오직 믿음'만이 길이 아니고 천주교나 심지어 불교 등에서 주장하는 바도 다 길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이는 마치 이방원이 충신의 바른 길을 가려고 하는 정몽주에게 '이렇게 살면 어떻고 저렇게 살면 어떻느냐'고 시를 읊음으로써 대충 살자고 권하는 것과 같다.

이런 사상이 나타나게 된 것은 오늘날 신자들이 점차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 생각만 옳고 다른 모든 생각들은 다 틀렸다고 하는 배타적인 태도는 민주적이고 교양 있는 현대인의 모양으로는 적당치 못한 점이 있다. 그래서 우리도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에 대해 포용적이고 다원적인 태도를 취하고 싶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 길이 아닌 곳, 그래서 가면 결국 죽고 망하게 되는 곳을 생명의 길인 것처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게 만드는 급한 일이 있다. 그것은 우리로 다른 관심이나 취미에 깊이 빠질만한 여유를 갖지 못하게 만든다. 무엇이 그런가? 예수를 따라가는 일이 바로 그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따라가지 않는 것은 그 세계의 즐거움이나 가치를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 믿고 사는 것이 워낙 급하고 중요하기 때문이며 만일 이 길로 가지 않으면 결국 망하기 때문이다. 지금 바로 죽어가고 있는 가족이 옆에 있는데 그에게 교양 강좌를 베풀 수는 없으며 바둑의 즐거움을 함께 나눌 수는 없다. 그에게 베풀기에 적절한 유일한 행동은 그를 죽음에서 살리는 것이다. 말을 하더라도 그것에 도움이 되는 말을 해야 하고 행동을 하더라도 거기에 도움이 되는 행위를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를 강조할 수밖에 없다. 만일 지금 죽어가고 있는 어떤 사람에게 오직 A라는 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하자.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모른다면 모르지만 그것이 참으로 그렇다는 것을 안다면 A나 B나 C가 다 괜찮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무책임하며 악한 것이다. 어떤 점잖은 사람이 B나 C를 주장하거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주장하더라도 진리를 아는 우리는 그것이 아니고 오직 A여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교양과 체면과 포용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을 실제로 살리는 것이다.

길을 모르면 새로 배워야 한다. 그러나 길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것도 길이고 저것도 길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바울은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일한 적은 없었지만 초기에는 다소 유연한 자세를 취한 것이 사실이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인 것처럼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인 것처럼 행동하는 원칙이 있었다. 이것은 일의 지혜였다. 바울은 헬라 철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 혹은 종교성이 많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접근할 때는 복음과 헬라 철학 또는 세상 미신 종교들 간에 존재하는 약간의 접촉점을 근거로 하여 복음을 전했다. 그것은 복음 외의 것을 복음처럼 인정한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을 더 잘 전하려고 시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별로 효과를 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바울의 말에서 복음은 듣지 않고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그들의 종교 세계에 대한 설명에만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런 방식을 사용한 것은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할 때였는데 그 아테네를 떠나 다음 도착한 전도지가 바로 고린도였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2:1,2의 말을 통해 그가 오직 그리스도와 십자가만 말하기로 작정했음을 밝혔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은 받은 자였다. 사람들이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는 그리스도밖에 생명의 주가 없고 십자가밖에는 구원의 길이 없기 때문에 기꺼이 그렇게 한 것이다.

우리는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그리고 작으나마 사도로도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우리도 바울처럼 사람들에게로 보냄 받은 자들이다. 우리가 부르심을 입은 것은 단지 우리 개인의 구원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해서이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그러므로 우리는 작더라도 그리스도를 전하는 몫을 감당해야 한다. 우리 일생은 그 목적을 위해 바쳐져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위해 우리를 지으시고 부르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일 전심으로 행할 일은 그리스도를 누리고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일이다.


6.교회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이렇게 규정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 및 [각처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

우선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자들'이다.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자라는 사실은 둘로 나누어 생각해야 한다. 첫째는 다른 것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해진 사람들이라는 사실이고, 둘째는 교회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실제로 '거룩해진 사람들' 곧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세상에서 '구별된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오늘은 그 중에서 첫째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교회는 무엇인가? 성경은 우리를 성도(거룩한 무리)라고 한다. 그렇다면 과연 교회는 거룩한가? 교회는 거룩한 사람들이 모인 곳인가? 만일 이 말이 교회는 잘난 사람들과 굉장한 사람들과 무언가 구원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는 의미라면 사실은 그 반대이다. 고전1:26-31에 직접 언급되고 있지만 교회는 사실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고 말하는 편이 훨씬 사실에 가깝다. 대부분의 교회에는 잘난 사람보다 못난 사람이 훨씬 많으며, 많은 사람들이 독특하고 별나며, 해결하기 어려운 여러 골치 아픈 문제들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교회는 세상 기준으로 볼 때 품위 있고 유능하고 거룩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렇지 못한 사람들만 골라 모은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잘나지 못한 사람들이 단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해지는 것이다. 스스로 거룩해질 수 있는 사람은 교회에 올 필요가 없다. 그런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예수가 아니면 거룩해질 수 없는 사람들은 예수께로 와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고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될 수 없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것도 없고 뻐길 것도 없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1:3-7)

우리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다 우리 자신이 마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랑하거나 이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멸시해서는 안된다. 고린도 교회에는 많은 지식과 은사가 있었고 거룩과 자랑할만한 좋은 것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빛을 비추심으로 인해 생긴 것이요 하나님이 공급하심으로써 가지게 된 것이지 자기들이 만들어 낸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자랑할 것도 비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진 자들임을 망각하였기 때문에 서로 자랑하고 다투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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