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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구변과 지식이 풍부함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전1:4-7)

고린도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여러 가지 은사를 소유하게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러 은사들이 나타났지만 두드러진 것은 지식의 은사였다. 고린도 교회 형제들 중 많은 이들이 풍부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물론 이 지식은 바울이 그들에게 증거한 복음으로 인해 얻은 지식이므로 세상 지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관한 지식이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 형제들은 복음에 관해 아는 것이 많았고 말을 잘하였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이런 복음 지식과 기타의 은사들이 충만하여 그들이 그리스도를 깊이 누리고 영광스런 교회로 조성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그는 이런 은혜와 은사의 토양에서 그들이 장차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자들로 견고히 세워질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에 이런 지식과 은사가 풍족하다고 해서 그들이 '지금 현재'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자로 견고히 서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고린도교회 형제들은 그들이 받은 큰 은혜와 은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 견고하게 서 있지 못하였다. 고전3:1-4에서 바울은 그들의 상태를 이렇게 진단하였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한 마디로 말해서 바울은 그들의 영적 수준이 매우 낮다고 진단했다. 그리스도에 대해 아는 것도 많고 은사도 많이 소유한 사람들을 어린아이와 젖먹이 수준의 신자로 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제들이 서로 하나로 연합하지 못하고 나는 누구파다 너는 누구파다 하며 나누어져서 싸우고 있는 것을 보니 그들은 아직 영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그들 안에 사랑이 없다는 증거이며 그들이 생명을 따르지 않고 즉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않고 여전히 자기 생각(지식)과 감정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였다.

세상적 기준을 따라 생각하면 지식이 있다는 것은 지식이 없는 것보다는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무엇이든 있으면 없는 것보다는 좋은 것이 아니고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느냐 하는 것과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기여하느냐 하는 것을 따져보아서 그것이 그러하다면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없는 것보다 못한 것이다.

모든 고상한 지식과 신기한 능력들은 다 주님께로부터 온 것인가? 그렇지 않다. 많은 지식과 능력들이 다른 데서 온 것일 수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해 보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어떤 지식과 능력들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악한 영들로부터 온 것이라면 우리는 단호히 그것을 배격해야 한다. 그러나 고린도교회가 받은 지식과 은사들은 (바울의 증거에 의해) 주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그것을 따질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주님께로부터 이 온 모든 은사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고린도교회에 주어진 은사들은 제대로 사용되고 있었는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그것으로 자기를 자랑하며 다른 형제들과 자기의 은사를 비교하며 싸우고 당파를 만드는데 사용했다.

우리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여러 가지 지식들과 능력들이 과연 주님으로부터 온 것인지를 먼저 점검해 보아야 하며 만일 참으로 그 모든 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 다음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왜 그런 지식들과 기타의 은사들을 주셨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참 지식은 오직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 주신 것이다.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요 오직 수단일 뿐이다.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런 아들들이 되게 하는 데 있고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인 우리로 몸을 섬겨서 영광스런 교회를 건축하게 하는 데 있다. 우리의 구원과 영광은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우리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설령 자랑한다고 하더라도 열매와 결과로 자랑해야지 수단과 과정으로 자랑할 수는 없다. 지식은 수단이요 과정일 뿐 열매가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면 그 아는 것으로 주님을 섬기고 형제들을 섬겨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 옳고 그름, 귀하고 천함은 열매로 판단하는 것이지 은사 자체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시시하게 보이는 어떤 사람, 즉 받은 은사가 시시하게 보이는 어떤 사람이 교회에서 놀라운 영적 열매를 맺는다면 그의 은사는 시시한 것이 아니라 귀한 것이다. 반대로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굉장한 지식과 굉장한 능력을 나타내는 사람이라도 그의 존재와 활동이 교회 안에서 말썽만 일으키고 다른 사람들을 실족케 하며 아무 유익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은사는 시시한 것이며 무익한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 자체는 다 귀한 것이다. 그러나 은사는 은사 혼자서 굴러다니며 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연합하여 사람 안에서 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은사를 법 있게(합당하게) 쓰지 않으면 은사는 가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되고 완전한 지식을 가져야 하며 우리의 지식이 그런 지식이 되도록 바르게 써야 한다. 무엇이 참되고 완전한 지식인지 어떻게 해야 지식을 합당하게 쓰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롬2:19,21,23,24,28,29)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참으로 귀한 지식이다. 율법을 통해서 알게 되었든 선지자를 통해 알게 되었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매우 귀한 것이다. 그러나 그 지식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만들지 못한다면 그 지식은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며 도리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생명에까지 이르지 못한 지식은 무용한 지식이다. 즉 생명에 변화를 주지 못하는 지식은 아무 소용없는 지식이라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지식이 그 사람 안에서 생명의 능력으로 작용하여 그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그 지식은 아무리 고상한 것이요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실패를 통하여 자기 속 사람의 변화 없이 단지 선악을 분별하고 형제를 판단하는 능력을 지니게 되는 정도로 복음 지식을 소유하는 것은 무익하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롬10:2)
'진리에 대한 지식' 없는 열심은 갈 바를 모르고 열심히 뛰는 것과 같으며 목표와 방향이 없이 무조건 달리는 자동차와 같다. 열심은 진리 안에서 즉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내어야 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내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그의 죄와 무능으로 인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이다. 그러므로 열심을 낼려면 반드시 예수를 믿는 열심을 내어야 한다. 이것을 모르고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준수하려고 애쓰는 것은 헛된 열심이다. 이것은 지식을 좇지 않은 열심이다.

여기서 우리는 열심과 지식의 관계를 볼 수 있다. 참된 열심은 참된 지식 안에서 나온다. 유대인들도 지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율법을 열심히 지킨 것이다. 그러나 그 지식은 잘못된 지식이었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 즉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 자체는 옳은 것이지만 사람이 그것을 지킬 수 없는 무능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한 것은 틀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냥 지식을 가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지식, 복음 지식,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지식을 가져야 한다.

생명(성령) 안에서 인도 받는 사람은 언제나 완전한 지식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그럴 때 열심을 내어도 그것이 합당하고 열매 맺는 열심이 될 것이고 또 많은 경우에 열심도 저절로 나게 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11:33)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지식이 근본적으로 제한적이며 불완전한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지식과 지혜는 하나님의 것처럼 완전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며 또한 그 모든 것을 알되 완전하게 아시는 분이시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사람을 아신다. 그것은 그분이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사람을 아시며 또한 대강 아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아신다. 이에 비해 사람은 다른 사람을 그렇게 알지 못한다. 예를 들어 어느 바리새인은 도둑질을 하는 사람과 간음을 하는 사람 기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어떤 이스라엘 사람들을 안다. 그러나 그가 아는 것은 저 사람이 나쁜 사람이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저런 사람들은 없어져야 한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주 예수님은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며 잘못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그가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을 성취할 자 곧 이 땅에서 마귀를 몰아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영광스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또한 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죄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한편으로 그를 안타깝게 여기며 사랑하시며 그를 위해 대신 죽으시는 것이다. 이것이 완전하게 아는 것이다.

사람은 죄인이든 의인이든 하나님 앞에서 근본적으로 사람일뿐이다. 때가 묻은 아이라고 해서 아이가 아닌 것은 아니다. 때를 씻으면 여전히 예쁘고 귀여운 아이인 것이다. 죄인도 죄를 처리하면 그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며 생각을 바꾸기만 하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쓸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을 이런 사람 저런 사람으로 보기 전에 단지 하나님이 지으신 영광스런 존재로서의 사람으로 먼저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보는 지식이 완전한 지식이다.
바리새인이나 보통의 사람들의 이렇게 사람을 보지 않는 것은 사탄으로부터 선악적 지식을 받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생명을 상실하여 그 속에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이 말씀과 관련하여 바울은 이렇게 분명하게 정리하여 증거한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고전13:2,8)

우리 지식이 완전한 지식이 되려면 우리 지식이 머리의 지성적 활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원하신 생명 안에서 나온 것이라야 한다. 참 지식, 영원한 지식, 천국에서도 폐해지지 않고 존속되는 지식은 생명의 지식이며 그것은 그 속에 사랑이 있는 지식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게 한다. 성령은 우리의 생각이 되시며 지식이 되신다.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 지식은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자비가 있는 지식이며 동시에 그 속에 의와 거룩이 있는 지식이다. 이런 것들이 결여된 지식은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고 진리의 지식에 근거하지 않은 사랑은 거짓 사랑이다.

우리는 종종 진리의 지식을 세우려고 하다가 형제를 넘어뜨리는 일을 한다. 본래 정상적이라면 그리스도인이라면 적어도 '진리로 말미암아서는' 아무도 넘어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약하고 어린 신자는 그럴 수 있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식과 덕을 세우는 일 사이에 성령의 인도를 철저히 받지 않으면 안된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고전8:1-11)

여기서 바울은 우상 제물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없어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약한 형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우상 제물로 바쳐진 고기를 먹으면 망할 줄로 생각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다른 형제들은 아무도 그 고기를 먹지 못하므로 약간 괴롭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약한 형제의 무지로 인해서 강한 형제가 고기를 먹지 못하게 된다고 해서 그들이 넘어지거나 망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강한 형제가 진리에 대한 지식을 따라 대담하게 고기를 먹어버리면 약한 형제는 넘어지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식과 덕 중에 어느 것을 우선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바울은 단연코 덕을 앞세웠다. 가장 중요한 것 곧 궁극적인 진리는 아무 것에도 양보할 수 없다. 그것은 믿음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이 신자의 모든 덕목 가운데 제일 앞에 오는 것이다. 덕과 지식은 다 그것 밑에 있는 것이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벧후1:5-8)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12:8-11)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전14:1上)

지식을 비롯한 모든 은사는 한 성령이 주신 것이며 또한 성령님 안에서 통제되도록 주어진 것이다. 지식이든 지혜든 따로 놀 수 없다. 다 몸 안에서 몸을 위해 쓰여져야 하는 지체들일 뿐이다. 성령께서 이 모든 은사들을 하나로 묶어 전체 목표에 기여케 하는 원리는 사랑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으며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사랑이 없으면 지식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13:11-13)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과 목적을 안다면 우리가 지금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지식과 생각을 은사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여기거나 영원한 것인 것처럼 자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단지 수단과 과정에 지나지 않으며 불완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지식은 우리 생명이 아들의 생명으로 충만케 되어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될 때 완전해 질 것이며 우리의 존재 자체가 다 그렇게 완전하고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이는 곧 반대로 우리가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은 다 임시적이며 불완전한 것이라는 말이 된다. 그것은 다 우리 죽을 몸, 썩어질 육신 안으로 말미암아 제한되어 임시적으로 작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믿음과 소망과 지식과 은사 이 모든 것은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변케 하실 때까지 필요하며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땅에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으로 조금씩이나 총명해지면 우리의 삶은 땅에서도 하늘의 삶의 맛볼 수 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빌1:9,10)

우리의 삶 곧 우리의 사랑은 지식과 지혜로 풍성해진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우리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알게 하신다. 이 지식은 생명의 충만을 따라서 충만해진다. 이 지식이 풍성하고 충만해질수록 우리는 누구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며 어떻게 섬겨야 할지를 더 깊이 알게 된다. 사랑하고 싶고 섬기고 싶어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모르기 때문에 제대로 사랑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빗나간 자녀를 둔 부모들 중 많은 부모들은 그들이 자녀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자녀를 방치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돕고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에도 지식이 필요하며 기술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알면 알수록 사랑은 풍성하고 완전해진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3:8,9)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귀한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다. 이것이 다른 모든 지식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이 지식이 우리의 모든 지식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알면(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면) 다른 모든 것은 저절로 된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기"(골2:3) 때문이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벧후3:18)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딤전6:20)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딤후3:1-7)

여기서 우리는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는 불행한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단순하고 겸손하게 열려 있지 않고 복잡한 자기 생각과 세상 생각으로 차 있으면 아무리 진리에 대해서 배우고 그리스도를 따라 다녀도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이런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안타깝게도 이미 이런 상태에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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