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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음

세상 지혜라는 것은 죽지 않고서 어떻게든 잘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죽지 않고서' 라는 것이 바로 문제이다. 죽으면 (즉 자기를 부인하고 낮추어 어떤 일에서 양보하고 손해보면) 못할 일이 없고 안될 일이 없다는 것을 세상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죽음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삶의 목적 자체가 생존(삶의 유지)과 세상 영광에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은 다 받아들이더라도 죽거나 고통을 당하는 등 자기를 부인하는 일은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 뒤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죽으면서까지 무엇을 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너도 안 죽고 나도 안 죽고서 일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 제일 좋고 만일 그렇지 못해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면 너는 죽고 나는 안 죽는 쪽으로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불가피하게 내가 죽어야 한다면 최소한으로 죽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지혜이다.

그러나 세상 지혜는 금방 한계를 만난다. 결국은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지혜밖에는 영구하고 참된 지혜가 없다. 왜 안 죽으면 안되는가? 그것은 첫째, 사람이 살아서 자기를 나타내는 한 인간의 모든 문제들이 근본적으로는 해결이 안 되기 때문이며 둘째, 설사 인간적 지혜를 발휘하여 어떤 문제들을 해결한다 하더라도 문제가 있는 사람이 계속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문제의 근원이 타락하고 왜곡된 인간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사람이 살아 있는 한 문제는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인류 역사는 이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인류는 늘 개선과 개혁을 시도해 왔다. 이 사실 자체만으로도 인간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문제는 그런 개선과 개혁이 많은 경우에 신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간단한 예를 하나를 들어보자. 이것은 중국의 문화혁명 기간 동안 벌어진 모순에 관한 것이다.

문화대혁명이란 중국공산당 주석 모택동이 중국 혁명정신을 재건하기 위해 자신이 권좌에 있던 마지막 10년간(1966~76)에 걸쳐 추진한 대격변을 가리킨다. 중국이 소련식 사회주의 건설노선을 따라 나아갈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자신의 역사적 위치에 대한 우려 때문에 모택동은 역사의 흐름을 역류시키기 위해 사상 유례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그로서는 중국을 잘 살게 하기 위해 전에 없는 지혜를 다 짜낸 결과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아무 소득도 없었고 도리어 중국의 여러 도시를 대 혼란 상태로 몰아넣고 말았다.

당시 공산당은 철 생산이 국가 경제에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말이 떨어지자 말자 지역 공산당 지도자들은 온 힘을 철 생산에 기울였다. 자기 지역에서 보다 많은 철을 생산했다는 말을 듣기 위해 온 나라에 집집마다 소규모의 용광로가 만들어졌고 거기에는 가정의 생활 필수품인 솥이나 냄비, 농기구들 중 상당량도 들어갔다. 그 결과 가정에는 생필품이 부족하게 되었으며 농사를 지을 도구조차 모자라게 되었다. 그리고 당이 양곡 생산을 독려하자 참새가 먹어치우는 곡식을 아끼자는 운동이 일어났고 전국적으로 참새 잡는 운동이 벌어졌다. 그 결과 많은 참새들이 사라졌으나 그로 인해 논과 밭에는 수많은 벌레들이 생겨나서 농사를 망쳤다. 그리고 그나마 남은 농사조차 농기구들이 철 생산을 위해 용광로에 들어가는 바람에 큰 지장을 받았다. 많은 논과 밭이 농기구의 부족으로 곡식과 채소들이 논과 밭에서 그냥 썩어갔다. 그리고 그렇게 무리를 하여 가정과 지방의 용광로에서 생산한 선철은 무르고 조잡하여 산업용으로 쓰이지 못해 거의 폐기되고 말았다. 이것은 문화대혁명 당시에 일어난 수많은 모순과 억지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1960년대 중국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인류의 생존 현장에서 끊임없이 일어난 일들의 하나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을 고통으로 몰고 간 이러한 비효율적이고 터무니없는 일들은 어디서 왔는가? 이것은 인간이 서로를 망치려고 애쓴 데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 놀랍게도 지혜의 산물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고통스러워진 자신들의 삶을 개선하여 좀더 편하고 좀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꾸준히 지혜를 발휘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 결과 물질 문명이 크게 발달하였고 생활 수준도 높아졌다. 그러나 능력이 부족하거나 타고난 형편이 좋지 못한 사람들까지 다 잘 살게 되지는 못했기 때문에 여러 사회 개혁이 시도되었고 그 중 하나가 공산주의 혁명이었다. 공산주의는 살인과 고통을 주려고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인류의 행복과 문제 해결을 위해 인류가 심혈을 기울여 고안해 낸 지혜의 한 방편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 지혜는 사람들에게 예상치 못했던 또 다른 종류의 문제를 불러왔고 그것에 대처하기 때문에 1960년대에 모택동은 문화대혁명이라는 또 하나의 개혁을 시도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또 다른 예상치 못한 엉뚱한 문제들을 불러왔다.

인간이 최선을 다 하지 않거나 지혜를 발휘하지 않아서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생겼고 그런 문제들이 풀리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인간은 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하며 살고 있다. 문제는 사람이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 해도 그런 결과밖에 초래할 수 없다는데 있다. 문제의 근원은 지혜 없음이나 노력하지 않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병들고 비뚤어진 사람 자신이다.

지난 주에 우리는 인류의 모든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하나님이 내 놓으신 참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사실을 상고했다. 그러므로 인류가 자신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원한다면 그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고했다. 그렇다. 지혜는 생명의 어떠함과 관련된 것이다. 좋은 생명이 곧 지혜이다. 우스개 소리에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말이 있다. 근본적인 문제는 손발이 잘(지혜롭게)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잘(지혜롭게)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이 잘 되려면 손발을 닦달할 것이 아니라 머리를 바꾸어야 한다. 사람에게 문제가 끊이지 않는 것은 생명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생명이 잘못되어 있으면 그가 하는 일마다 다 잘못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서 '이런 일이 잘못되었고 저런 일이 잘못되었습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하면 하나님은 먼저 우리가 잘못되었다는 사실, 우리 생명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고자 한다. 우리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바꾸어져야 한다. 본래 우리가 그 생명으로 지음 받았지만 지금은 마귀의 말을 들음으로써 잘못되어진 것이다.

인생의 길을 내신 분이 하나님이시므로 그분에게로 가서 그 음성을 듣고 그 인도를 따르는 것이 인간 삶의 유일한 정도(正道)이며 행복의 첩경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지혜이다. 그러나 이 지혜는 동시에 우리의 죽음을 요구한다. 먼저 우리 자신의 생명이 죽음 없이 우리 생명을 하나님의 생명으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먼저 우리 자신이 죽는 것이 지혜이다.

자아가 살아 있어서는 하나님이 일하실 수 없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벌어지는 모든 일은 다 내가 한 것이다. 성경을 읽고 한 일도 내가 한 일이고 기도를 하고 한 일도 알고 보면 다 내가 한 일이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실제로 일을 하셔야 되는 것이다.

오늘은 1999년의 마지막 주일이자 1900년대를 보내고 더 나아가서 주님 이후 두 번의 천 년을 보내고 세 번째 천 년대를 맞이하는 주간의 첫 날이다. 인류는 주님 오시기 전에도 적어도 수천 수만 년을 살았고 주님 오신 후에도 2000년이나 살았으니 인류의 역사나 교회 역사도 매우 길다. 우리도 이제 또 한 해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인류나 교회나 우리 개인이나 돌이켜 보면 산 시간에 비해 깨닫고 진보한 것은 너무도 적다. 우리는 배운 것에 비하면 너무 많은 시간을 썼다. 그러나 돌이켜 보건대 우리가 우리 삶을 보다 낫게 유지하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대로 최선을 다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십자가의 도를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의 무능과 죄에 대해 일찌기 깨달은 바 있고 수많은 진리의 지식으로 무장하고 있는 우리는 왜 최선을 다해 왔는데도 한 해의 마지막에 서서 아쉬움을 남기는가? 그 동안 우리는 여러 해에 걸친 교회 생활과 하나님과의 개인적 교제를 통하여 수많은 진리를 듣고 익혀왔건만 그것이 얼마나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모든 문제는 사람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생명의 문제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 이런 저런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문제 있는 사람, 문제 있는 생명으로 남아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여전히 빛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우리 지식이 확실하고 실제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발휘해 온 지혜는 여전히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여전히 살아서 무엇인가를 해 보겠다고 발버둥친 세상 지혜요 끝까지 안 죽고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튀어보겠다고 발버둥치는 그런 지혜라는 사실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우리는 게으르거나 머리가 나빠서 그런 노력조차 제대로 기울이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여전히 실제로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한 해를 보내면서 우리에게 가장 아쉬운 것은 이런 저런 일을 만나거나 그것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제대로 본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억지로 죽는 것은 불가능하다. 죽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죽는 것이고 누리는 것이지 내가 실제로 죽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죽는다고 해서 자아가 죽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아무리 많은 고생을 하고 많은 환난을 겪어도 그것 때문에 저절로 죽지는 않는 것 같다. 도리어 반대의 현상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전쟁 중에는 생의 집착이 훨씬 더 강해지며 자아가 훨씬 더 세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억지로 스스로 죽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미 나를 죽이셨음을 보기를 원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억지로 죽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고 이미 죽은 자로서 가만히 주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사 참으로 여러분과 내가 이미 벌써 죽었음을 우리로 분명히 보게 하시기 원한다.

그것을 알면 우리는 겸손할 것도 없고 교만할 것도 없다. 겸손도 산 사람이 하는 것이지 죽은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죽었는데 억지로 겸손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우리는 시체일 뿐이다. 이제 우리에게 살아 있는 것은 그리스도일뿐 내가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지금 세상은 1999년을 보내고 새 천년 뉴 밀레니엄이라는 것을 맞으면서 큰 희망에 부풀어 있다. 2000년대가 다가오면 무슨 큰 행복이나 다가올 것처럼 큰 변화가 일어나고 큰 진보나 이룰 것처럼 떠들고 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그것은 단지 사람들의 희망과 망상에 불과하다. 사람이 바꾸지 않는 한 근본적으로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보는 신문에는 여러 날 전부터 [이것만은 고치고 넘어가자] 라는 칼럼이 생겨서 여러 사회 명사들이 나와서 이것을 뜯어고치자 저것을 뜯어고치자 하고 외치는 것을 싣고 있다. 그 말들은 다 옳은 말들이지만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말 것이다. 그것들은 새 천년 아니라 새 만년이 오더라도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안 죽는 한, 사람 안에 새겨진 타락하고 비뚤어진 아담의 성분이 지워지지 않는 한, 모든 모순적이고 터무니없는 일들이 그대로 벌어질 수밖에 없다. 아! 십자가 없는 지혜의 말들은 얼마나 공허한, 그야말로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 그치고 마는지.

인류가 1999년까지를 보내면서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다 할지라도 이 한 가지만 확실하게 깨닫고 다음 세기로 넘어간다면 다음 세기는 희망이 있다. 하나님의 지혜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곧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만 살 수 있다면 우리의 미래는 밝다. 우리 각자가 이것을 깨닫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밝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이것을 깨닫는다면 우리 교회의 미래는 밝다. 그리고 인류 모두가 이것을 깨닫는다면 인류의 미래는 밝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인류에게는 그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말세가 지속되는 동안 여전히 모든 일들이 그대로 전개될 것이며 더 심해질 것이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딤후3:13) 그러므로 세상에는 소망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희망은 여러분과 저를 포함한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3:14)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밝혀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었음을 분명히 보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앞으로 영원히 죽은 자로 살며 오직 그리스도로만 사는 사람이 된다면 우리의 미래는 단언하건대 확실히 밝을 것이다.

한 해가 끝나게 되면 업무만 정리하고 학업만 마무리할 것이 아니라 인생도 인격도 신앙도 반성하고 정리하여 새로운 상태로 만들어 놓아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궁극적 정리는 바로 십자가를 우리 안에 확고히 하고 십자가를 우리 안에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일이다. 바울의 일생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것"(빌3:10,11)이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 없으면 그와 함께 다시 사는 것도 없다. 우리 삶이 이렇게 가난하고 무력하고 기쁨이 없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복이요 지혜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부활의 삶이 없는 것은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내년에도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지 않으면, 즉 자기 죽음을 모르고, 안 죽은 자로 여전히 산다면, 올해와 똑 같은 수많은 문제들이 그대로 혹은 모양을 바꾸어가며 또 생길 것이고 여러분은 여전히 나름대로 육신의 지혜를 짜내다가 그것도 안되면 하나님께 기도하며 도움을 청하여 그 문제들을 해결하느라고 정신없고 분주하게 지내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이 아니다. 이것은 신앙 생활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에 십자가로 답하신다. 그 이상 기도의 응답이 어디 있는가? 인생 문제에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 이상의 완전하고 확실한 답이 있으면 하나님이 그것을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이 최선의 답이며 그 안에서 우리를 죽이시고 다시 살리신 이 십자가의 역사가 최고 최선의 축복이요 기도 응답이다. 하나님께 헛되이 구하지 말라. 실망하고 힘만 빠질 따름이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네가 죽으면 모든 문제가 깨끗하게 해결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죽은 자답게 확실하게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만사는 하나님이 알아서 잘 해결해 나가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고 따르는 것 다음으로 우리의 큰 관심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 각자에게는 고생하는 형제들을 보면 어떻게 해서라도 돕고 싶은 마음이 있으며 곁가지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줄기의 문제를 도와서 근본적으로 형제들이 평안하고 복되게 살도록 해 주고 싶다. 그러면 내년에 우리는 어떻게 형제들을 도울 수 있을까? 어떻게 돕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될까? 구체적인 내용들은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그때그때 결정하여 순종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도움의 방법은 분명하다. 그것은 형제들을 십자가 안으로 이끄는 것을 돕는 것이다. 골로새서 3:15,16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라고 말했다. 우리 마음이 평안하려면 우리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육신의 야망과 정욕, 자존심이 죽어야 한다. 그것이 살아 있는 한 우리 마음에 평안은 없다. 세상 만사가 우리의 정함 없고 끝없는 욕심대로 다 이루어진다면 모르지만. 그래서 우리는 형제들이 다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피차 모든 지혜로 가르치고 권면해야 한다. 무엇으로, 무엇을 권면하는가? 말씀으로 권면하는 것이다. 그 말씀은 바로 십자가의 도이다. 그의 죽음을 선고하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우리는 항상 이것으로 서로를 일깨워야 한다. 당신은 죽었다. 형제는 이 점에서 좋은 사람이지만 그러나 그 좋은 사람도 이미 죽었다. 그리고 형제는 이 점에서 좋지 않은 사람이지만 그도 역시 죽었다.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이 사실을 볼 수 있도록 서로를 위하여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최선의 봉사이다.

우리는 형제더러 죽으라고 촉구해서도 안되고 죽여서도 안된다. 억지로 죽으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더구나 현재 죽지 않아서(죽음을 누리지 못해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 취급하여 멸시하거나 밟아서도 안된다. 그렇게 하면 싸움밖에 벌어질 것이 없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말씀, 계시의 빛을 비추는 일을 할 수 있을 따름이다. 성령께 도움을 구하며 다만 사실을 말해 줄 따름이다. 앞으로 우리는 범사에 자신과 곁에 있는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하자. "형제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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