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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쳐서 복종시킴 / 고전9:23-27

2010.05.01 11:43

이상봉 조회 수:10442

몸을 쳐서 복종시킴 / 고전9:23-27
 


39.몸을 쳐서 단련함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바울은 단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복음에 참여하고 복음을 누리는 사람이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그것을 누렸다. 그런데 그가 단지 복음을 전하는 자가 아니라 그것을 자기 것으로 누리는 사람이 되는데는 큰 자기 부인(自己否認)이 필요했다. 물론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는데도 자기 부인은 필요했을 것이다. 그 일은 많은 수고와 희생이 따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래도 그 일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로 말미암아 그에게 주어진 빛과 감동, 마음의 부담이 그를 그 일로 강제로 몰아넣었기에 되어진 일이었으므로 큰 자기 부인이 없다 할지라도 억지로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복음을 자기 것으로 풍성하게 누리는 데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빛 비춤 뿐 아니라 자기를 낮추고 마음을 겸손히 하여 그 모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이 필요하고 더 나아가 그 믿음 안에는 그러한 은혜(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정욕을 좇고자 하는 본성과 자기를 높이려는 본성을 가진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일이 포함되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본래 믿음이라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사람의 반응을 의미하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어떤 반응을 보인다는 것인가? 성경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자면,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어떤 밭에 보화를 감추어두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살짝 알게 하셨다고 할 때 우리가 그 본 것(보화)을 획득하기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어떤 방법으로든지『기어이 받는 것』이 믿음이다.
 
여기에는 첫째, 그 ‘본 것을 확실하게 하는’ 일련의 노력이 필요하다. 보아야 가져가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하나님의 보물이란 상당한 정도로 공개되어 있는 것이다. 객관적인 사실로 말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보물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라는 것은 만인이 다 와서 보고 가져갈 수 있도록 열려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온 세상을 위해 주셨지 몇몇 사람만을 위해 주신 것은 아니며 그것을 결코 감추지 않으셨다. 복음은 골방에 은폐되지 않고 만인이 들을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증거되고 있다.

물론 이 복음이 아직 전파되지 못한 곳이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이것이 만인에게 완전히 공개되었다고 볼 수 없는 점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복음이 증거되고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어진 곳에서도 모든 사람이 다 와서 그것을 가져가지는 않는다. 오직 일부만 그렇게 한다. 그것을 참 사실로 여기고 믿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가져가서 누린다. 왜 이렇게 되는가? 그것은 사람들의 눈이 어둡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여기에 한 방해꾼이 개입되어 있음을 보아야 한다. 곧 마귀의 시험과 훼방이 존재하는 것이다. 마귀는 사실상 모든 죄인들의 왕이다. 마귀는 그의 거짓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특별히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그 상실된 마음을 사로잡아 회복시키지 않으면 사람들은 마귀의 거짓말과 속임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두 눈 멀쩡히 뜨고 두 귀가 멀쩡히 열려 있어도 진리를 듣기 어려우며 보화를 보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며 ‘여기 묻혀 있다’고 보화를 공개적으로 증거해도 그것이 밭에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사람이 마귀의 거짓말과 시험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눈뜨고 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해 준다. 단지 보는 것도 어려울진대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깊이 주목하는 것은 더욱 어렵고 더 나아가서 그 본 것을 마음에 확실하게 받아들여서 모든 것을 팔아 실제로 그것을 챙기는 일은 더더욱 어려운 것이다.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그 보고 깨달은 바를 굳게 붙잡고 또한 그 믿음대로 삶의 틀을 새로 짜고 거기에 맞게 행하기를 거부하는 자기 몸을 쳐서 오직 그리스도만 따라가는 삶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큰 은혜가 필요하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을 때만 우리는 진리를 분명히 볼 수 있으며 또한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을 때만 우리는 기꺼이 우리가 보고 믿은 바 대로 행할 수 있는 삶의 틀 곧 주님을 따르기에 합당한 삶의 틀을 과감하게 짜려고 할 것이다.

이제까지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보화를 보았고 기대 이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가진 것을 과감히 팔아서 보화를 사게 된 것에 대해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믿음이란 바로 이처럼 그리스도란 보화를 본 사람이 ‘그 가진 것을 다 판 것’이다. 본 것에 대해 합당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아직 제대로 보지 못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가진 것을 아무 것도 처분하지 않으면서 보화를 가지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보화에 대한 생각이 없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대가 없이 보화를 가지겠다는 망상에 빠진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은 십자가의 죽음 없이 부활의 영광을 누리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 것에 대해서는 결코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보물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왜 그리스도라는 보물에 대해서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려고 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가 보물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보기는 했지만 그것을 사기 위해 지금 팔아야 할 지금의 보물 곧 그가 지니고 있는 재물과 명예와 자존심과 육신의 야망 등이 여전히 가치 있는 보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신을 가진 사람이 자기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리스도를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팔아야 하는 것, 그가 버려야 하는 것이 지금까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얻고 싶으면서도 실제로는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망망대해에 빠진 어떤 사람을 건지기 위해 헬리콥터에서 밧줄을 내렸지만 그가 그것을 잡지 못하고 빠져죽는다면 그 이유는 그가 지금 손에 쥐고 있는 튜브를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놓으면 죽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가 모든 것을 버리고 참 생명인 그리스도를 얻을 수 있겠는지!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으면 그렇게 할 수 있다.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마19:25,26)

바울도 그렇게 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9상)

그는 왜 자기의 모든 것을 처리하였는가? 그리스도를 얻으려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무엇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가? 바울은 그리스도를 자기의 생명과 인격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그 분이 내 안에서 나를 대신하여 새로운 내가 되도록 모시는 것이다. 그를 받아들여서 내 생명과 내 인격으로 취하려면 먼저 있던 본래의 생명과 인격은 버려야 한다. 본래의 생각, 본래의 감정, 본래의 성질, 본래의 자랑거리는 다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결국 우리는 ‘나’를 팔아서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이 몸 그대로는 하나님의 성전이 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의 방편으로 주셨다. 그는 참으로 크고 완전한 은혜이다. 그 분만 받아들이면 우리에게는 아무 문제도 없다. 완전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완전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스도가 세상에 왔다는 것으로 구원이 저절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알고 기꺼이 그를 실제로 받아들일 때만 그 구원이 누려진다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려면 아들의 생명을 우리 안으로 깊이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에는 필수적으로 믿음의 훈련, 믿음의 단련이 필요하다. 사탄은 결코 우리가 그리스도를 쉽게 받아들이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우리는 날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처럼 다른 한편으로 날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사탄의 지배를 받아왔으며 속아왔다. 우리 체질 안에 아담의 타락한 피가 흐르고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쉽게 알고 그를 쉽게 가까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자체가 진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로 행해왔으며 그것은 어쩌다 보니 일시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체질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여러분은 건강과 관련하여 몸의 잘못된 체질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을 종종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체질을 바꾸려고 시도해 본 사람은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오늘만큼 이만큼이라도 믿고 따라온 것은 우리 체질이 하나님께 순응하고 하나님을 잘 믿는 체질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오늘까지 우리를 가르치고 감동시키시고 역경을 통해 단련하셨기 때문이다.

믿음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성령님이 우리를 많은 환란과 시험을 거치게 하는 과정에서 연습되고 단련됨으로써 확고해지는 것이다. 믿음은 한편으로는 그리스도를 깊이 바라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귀를 분명하게 대적할 때 굳게 된다. 가만히 있는데 믿음이 유지되고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과 함께 그리스도를 깊이 바라보고 그 약속을 깊이 주목하는 데서 믿음이 생기며, 한편으로 그것을 방해하는 모든 사탄의 시험 곧 마음을 흔드는 모든 의심과 육체의 저항, 세상 자랑과 정욕을 추구하려는 욕구, 자아를 높이려는 욕구 등을 성령님과 함께 물리치는데서 믿음이 생긴다.

앞만 보며 달려나가는 사람이 아니면 경기에서 이길 수 없듯이 그리스도를 누리는데 있어서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노력 없이는 그리스도를 누릴 수 없다. 바울은 고대 올림픽 경기를 관전한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인을 경기자에 비유했다. 월계수 면류관을 얻기 위해 마라톤 선수는 긴 시간을 달린다. 눕고 싶고 먹고 싶고 주위 경치를 구경하고 싶은 모든 욕구를 다 물리치고 앞만 보며 달리는 것이다. 목표를 가진 사람은 다 이러하다.

하나의 큰 목표를 가진 사람은 오직 그것에만 집착한다. 참 집착을 가진 사람은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집착을 버린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집착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은 참고 절제하고 버린다. 우리는 우리 가운데 강한 주관과 고집과 집착이 있어서 모두 개성이 뚜렷하다는 말을 종종 듣는데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몰두하고 그를 획득하는데 집착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 된다.

평소에 사람들이 입은 옷에 대해 감상하고 그것을 평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경치를 감상하고 그것에 대해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달리기 할 때는 그것을 보지 않으며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옆에 구경하는 사람의 옷에 대해 곁눈질을 하며 그것이 좋니 안 좋니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달리기에 뜻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이 ‘나는 이것은 할 수 없어’ 라든지 ‘나는 이것은 기어이 해야 돼’ 라고 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군사로 부르심 받은 사람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고 전쟁에 전념해야 하며 경기에 임한 사람은 다른 모든 욕구를 접고 경기에만 전념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분명한 목표가 있다. 이것은 얻어도 되고 얻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얻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얻으려고 나선 우리들은 이것을 얻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기꺼이 하고 이것을 얻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기꺼이 버려야 한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3:9-11)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깊이 체험하고자 하여 그의 고난과 죽으심까지 기꺼이 받아들였다.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부활의 능력과 권세를 분명하게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목표가 분명했기 때문에 바울은 행동도 분명했다. 그는 그의 모든 것이 오직 그리스도를 누리는 데 맞도록 쳐서 복종시켰다. 모자라면 덧붙이고 남으면 잘라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3:12-14)

바울은 죽을 때까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마귀의 시험을 대적하고 마귀를 경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정신을 차리고 자기 마음을 주님께만 고정시키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이제는 되었다고 만족하지 않고 계속 복음을 전하여 생명을 살리고 사람들의 생명을 온전케 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생명이 얼마나 실제적이며 그것이 얼마나 사람들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하시는지,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나라가 얼마나 강력하게 성장하는지를 바라보는 노력을 중단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리하여 마침내 그리스도라는 목표에 도달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4:6-8)

물론 이것이 그가 그리스도처럼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가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켰다고 해서 그가 만년에 능력과 지혜가 그리스도처럼 완전해졌다든지 육신이 완전히 변화되어 거룩하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가 선한 싸움을 다 싸웠다는 것, 달려갈 길을 마쳤다는 것, 믿음을 지켰다는 것은 다만 영의 지배를 받지 않고 죽을 몸(육체의 생명)의 지배를 받음으로써 마귀의 종 노릇 하는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바울은 자기 육신의 생명(자연적 생명)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여 삶으로써 전체적으로 볼 때 죄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마귀에 대해) 그리스도의 승리요 은혜의 승리인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범죄하는 생명 곧 육신의 생명, 사망의 생명으로 사는 자가 아니요 그런 육신을 가지고는 있으되 그것으로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으로 사는 자이다. 하나님 아들의 생명은 이기는 생명이요 무궁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완전한 생명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육신이 연약하냐 강하냐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육신의 생명이 어느 정도 성능을 지니고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이기는 생명으로 사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위로부터 온 생명을 받고 그것으로 사는 사람은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갈 수 있고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 믿음이란 육신의 생명대로 사느냐 아니면 이기는 생명으로 사느냐 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8:12,13)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는 말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믿음으로 살 때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 생각해 보자.

첫째,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부적 문제 곧 육신적 문제들로 인해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먹고 마시고 자기를 즐기는 것, 놀고 오락하고 취미생활하는 것을 즐기는 것, 친구 만나고 남의 험담하고 자기 자랑함으로써 스트레스 풀기를 즐기는 것, 성생활을 즐기는 것 등에 적절한 제재를 가하는 것이 바로 그 내용이다. 이것은 몸을 주님이 쓰시기에 적절하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몸 자체는 부패한 것이고 죽은 것(사망의 몸)이므로 거룩하게 되거나 훈련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배는 될 수 있다. 몸은 하나의 그릇이다.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도구로 쓰일 수 있는 것이다. 영(성령)이 지배하는 몸, 이것이 현재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이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4:7,8)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마26:40,41)

기도는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하기는 몸은 기도하는 것에도 약하지만. 어쨌든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즉 마귀의 거짓말을 들어 엉뚱한 쪽으로 욕망을 품는 몸을 다스리기 위해 하나님의 영에 우리 몸을 부탁하는 것이 바로 기도이다. 그러므로 기도한다는 것, 경건에 이르도록 연습한다는 것은 곧 믿음으로 사는 것을 연습하고 노력하는 것이다. 여기에 첫째 방향은 우리 내부의 문제들, 곧 우리 몸(육신의 생명) 안에 있는 죄와 사망의 성질이 우리(우리 삶)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영으로써 그것을 다스리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외부의 문제들로 인해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환란과 핍박은 외부적 문제이다. 이런 것을 당할 때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다음으로 우리가 이미 이 세상에 대해 죽었으며 그들과 다른 생명을 소유하고 있으며 다른 세계를 살고 있음을 생각하며 그것에 대항하지 않고 참으며 기뻐할 수 있다. 이것은 자기 부인(否認)과 직결되어 있다.

이런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리 육신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억울해하며 고통스러워한다. 이것을 참는 것이 바로 몸을 쳐서 복종케 하는 것이다. 주님은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시며 고통과 수모를 당하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그것에 대해 저항하거나 회피하지 않으심으로써 마귀로 말미암는 어떤 시험에도 들지 않았다. 이것이 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가 외부적 문제 중 중요하게 생각해야 또 하나의 문제는 교회 형제들과의 관계에서 답답하고 괴로운 일을 당할 때 그것을 참고 자기를 낮추며 그들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다루심과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가 참아야 하고 낮아지지 않으면 안되는 기회는 세상으로부터만 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교회 안으로부터도 많이 온다.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특히 이 점에서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지 못함으로써 교회의 분쟁과 시험을 초래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특히 교회 생활에서 참으며 낮추는 것을 배워야 한다. 교회 생활은 믿음으로 사는 삶의 연습의 중요한 현장임을 기억해야 한다. 내 생각과 뜻이 꺾여지는 상황, 내 선함과 의가 드러나지 못하고 묻혀지는 상황에서 우리 육은 견디지 못하며 강하게 저항하게 된다. 이럴 때가 바로 우리가 영으로 사느냐 즉 믿음으로 사느냐 아니면 육신의 생명으로 사느냐 하는 것을 드러내는 기회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빌3:7-16)

주님이 오셔서 우리 죽을 몸을 폐하시사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시킬 때까지는 아무도 이제 다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에게는 죽는 날까지 하나님의 다루심이 필요하며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를 죽는 날까지 환란과 곤고와 안팎의 시험에 처하게 허락하심으로써 우리를 다루실 것이다. 이때 우리는 영으로 몸을 쳐서 복종시킴으로써 우리가 육신의 생명으로 사는 자가 아니요 영으로 사는 자임을 나타내어야 한다.

믿음이 없이는 육신의 정욕대로 사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말을 뒤집으면 참으로 믿는 자는 반드시 육신의 정욕을 쳐서 복종시키고 영의 욕구를 따라 산다는 말이 된다. 끝까지 정욕대로 육신이 이끄는 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죽는 날까지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성령님이 자기 안에서 영광스런 아들의 생명을 드러내도록 주의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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