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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상봉 2009.05.29 16:23 조회 수 : 5309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2002,1,17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한복음1:1-3)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다 일정한 마음의 계획과 뜻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아무 생각 없이 되는 대로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한 뜻이다. 그 사람은 그 마음에 되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살자는 뜻을 세우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속에 세운 뜻은 자기 뜻 같아도 실제로는 자기 뜻이 아니라 어디선가 남에게서 받아들인 것이다. 부모에게서 받아들인 것이든지 학교에서 배운 것이든지 세상에서 상식으로 배운 어떤 뜻을 취하든지 책을 보고 뜻을 세우든지 다 밖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뜻과 계획은 그것이 어떤 통로를 거쳐서 들어오든 간에 근본은 다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다.

사람은 자기 인생을 어떤 뜻과 계획을 세워서 사느냐에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 어디서 시작하느냐에 따라 인생 길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민족주의자가 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한국 사람이라는 데서 그 인생을 출발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것을 나라를 사랑하고 그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는 방향으로 인생을 꾸려가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도 마찬가지이다. 이데올로기가 그를 지배함으로써 그는 피를 흘리면서도 그것을 통해 어떤 이상적인 사회를 이루려는데 인생을 다 투자한다.

어떤 사람은 학생시절에 "너는 의사가 되어라" 혹은 "너는 법관이 되어야 한다"는 자기 부모의 뜻을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인생을 출발한다. 또 어떤 사람은 가난한 가정에서 나서 많은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돈을 벌어 부자가 되어야 하겠다는 뜻을 저절로 세우게 된다. 혹은 나처럼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도와야 하겠다는 뜻을 저절로 세우게 된다. 그러면 또 그 뜻을 따라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뜻을 따라 어떻게 살 것인가? 요한복음 1:1에서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말씀을 한다. 여기서 태초는 창세기 1:1에 나오는 천지창조의 태초보다 먼저 있던 영원한 태초이다. 그 때 이미 말씀 즉 [어떤 뜻]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태초에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이 뜻은 하나님의 마음 또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며 이 뜻이 모든 뜻이 생기기 이전부터 있어온 절대적이고 영원한 뜻이다.

우리에게는 3가지 태초가 있다. 첫째 태초는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 태초이다. 그것은 [우리가 태어난 때]를 말한다. 그 때가 우리 자신에게는 태초이다. 두 번째 태초는 [천지가 창조된 태초]이다. 이 태초는 아담에게 있어서의 태초 곧 인간에게 태초이다. 세 번째 태초는 말씀 곧 하나님이 계시던 영원한 태초이다. 어떤 태초가 되었건 각 태초는 다 나보다는 먼저이다. 지금 생각과 뜻을 정하는 내가 있기 전에 부모님이 계셨고 그들의 뜻이 있어서 나를 낳은 것이다. 또 그 전에 하나님이 계셨고 그 어떤 내 뜻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구약의 욥이 갑자기 환란을 만나 고통을 당했을 때 그는 그 까닭을 몰랐다. 그는 자기의 前過를 돌이켜 보고 모든 상식을 동원하여 문제의 답을 찾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세계 즉 [자기 뜻] 안에서는 도저히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큰 회의와 혼돈에 빠졌다. 그러한 욥의 문제는 하나님으로부터 빛을 본 후에 비로소 해결되었다. 욥은 자기 이전에 자기보다 크고 영원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사실과 그 뜻은 [내신 자](주신 자)가 아닌 [나온 자]인 인간으로서는 결코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욥38장-41장)

사람이 지금 어떤 뜻을 가지고 있다면 그 뜻은 태초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철이 든 후 무슨 생각을 가질만한 때 비로소 가지게 된 뜻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내 뜻과 계획은 나보다 훨씬 먼저 있던 하나님의 말씀(뜻)을 결코 앞설 수 없는 것이다. 육신적으로 생각해도 내가 먼저가 아니고 부모님의 뜻이 있어 두 분이 결혼하여 나를 나은 것이 먼저이다. 그러므로 나는 부모님의 뜻 안에서 나온 존재에 불과하다.

사람이 자기 생각이 모든 것의 근본이요 근원인 줄로 생각한다면 이는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모른다. 사람은 자기의 갓난아기 때의 일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모든 것의 근본이요 기초라고 생각하여 그 뜻대로 살아가니 얼마나 어리석고 헛된 삶이 되겠는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러므로 나는 그 말씀에 의해 나온 존재요 말씀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지 내가 시작이 아니다. 사람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나 나보다 앞선 자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때문에 사람들은 인생에 대해서도 "인생이란 자기가 느끼는 것, 경험하는 것이 전부요 또한 그것만이 진실이다"라고 하는 착각 속에 빠져 있다.

철학이란 인간이 스스로 인생 문제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 철학의 길고도 꾸준한 노력은 인간 문제에 대해 속시원한 어떤 답을 내놓고 있는가? 역사적으로 철학은 그 어떤 인간 문제에 대해서도 항상 "탐구 중"이라고만 말해왔지 어떤 뚜렷한 결론을 내놓은 적이 없다. 결국 인간은 인생에 대해 스스로 "아무 것도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제각기 옳을 대로 행하며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나온 자가 내신 자의 뜻을 제쳐놓고 자기의 근본을 알려고 한데서 또 자기의 길을 알려고 한데서 기인한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인정하든지 않든지, 좋든지 싫든지 자기보다 앞선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 안에 들어 있는 존재이다. 그 속에서 운명이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셨을 때 그 모든 것들의 길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 사람은 사람대로, 개는 개대로 하나님의 정해주신 바 가야 할 길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내 뜻과 내 길보다 앞선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이 스스로 자기 뜻에 따라 길을 열려고 하고 하나님의 뜻과 다른 엉뚱한 역사를 창조해 나간다고 하니 그것이 어떻게 참 길이 될 수 있겠는가? 그 모든 뜻은 다 정함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길이라고 내세우는 것이 다를 뿐 아니라 한 사람의 뜻이라도 때와 상황을 따라 바뀌어, 모든 것이 장차 어찌 될 지 알 수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좋은 뜻을 세우고 나아갔지만 그 뜻을 이룬 경우보다는 이루지 못한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그것은 그들의 뜻이 처음부터 결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를 처음 만든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잘사는 좋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뜻을 가지고 출발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인간 사회가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야 하는 지도 당연히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의 뜻과 방법에 대해 과도한 확신을 가지고 그들의 생각을 진척시켰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자신들의 이상 즉 사람을 더 행복하고 잘 살게 만드는 이상을 이루는 쪽으로 잘 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날 공산주의를 약 100년 간 실천한 결과는 그들이 사람을 살리고 위하는 쪽으로 간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사람을 죽이고 억압하고 파멸로 몰아가는 殺人者의 길을 갔다는 것이다.

사람은 백지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교육학자들은 그렇게 주장하지만 역사의 경험을 통한 결과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미 창조되고 정해진 존재로 시작했지 백지 상태에서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열 수 있도록 되어있지 않다. 한국인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 미국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 가는 역사는 이렇게 저렇게 할 수 있을 지 몰라도 사람과 만물을 향한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과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역사는 절대로 변치 않으며 또한 사람이 변케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의 거듭된 반역과 거부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뜻대로 다 되었다. 모세를 거역하고 선지자를 죽였어도 하나님은 그 뒤를 따라 아들을 보내셨고 사람들이 아들마저 거절하여 죽였을 때 하나님은 그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면서 그의 몸된 교회를 통하여 아들을 도리어 확대하므로 자기의 뜻을 기어이 이루시고야 만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나님께 대해 온 세상이 다 들고 일어나 거역하고 반대하더라도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건축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 사람은 이것을 알고 따라가야 한다. 그것이 사람의 본래적이고도 당연한 유일의 길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 그 결과로 무엇이 나오게 되었다면 그것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라 대개는 그것을 향한 사람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책이 있다면 그 책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라 많은 정보를 간편하게 담아서 언제든지 볼 수 있도록 해야 하겠다는 뜻(필요)이 있어서 만들어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만물을 향한 뜻을 가지고 계시는데 그 뜻은 곧 말씀이다. 이 말씀에 의해 만물이 지음 받았으므로 만물에 대해 알려면 반드시 지으신 이의 뜻을 먼저 알아야 한다. 인간이 인생을(자기를) 알고 인생이(자기가) 가야 할 길을 알고자 하면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의 산물인데 하나님의 뜻을 제쳐놓고 '사람이란 무엇인가?' '인생은 어디로 가야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인간 역사는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를 물으면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여기 피아노가 있다고 하자. 이것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면 반드시 그것을 만든 인간의 뜻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닌 다른 동물(예를 들어 원숭이 등)은 피아노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그것을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한참 그것을 보다보면 그것이 무슨 악기인지는 모른다 하더라도 적어도 악기라는 것은 알게 된다. 정확히 피아노라는 것은 모르더라도 소리가 규칙적으로 다양하게 나니 무슨 음악하는 악기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어떻게 그렇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사람에게는 음악이나 악기를 향한 뜻(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아무리 철학적으로 연구를 해봐도 자기(인생)를 알 수 없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도 그것을 알 수도 있을 것이다. 안다면 제 나름대로 아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아는 것은 본질과는 거리가 먼 그릇된 지식일 뿐이다. 원숭이도 원숭이대로 피아노를 알 수 있다. 아마 원숭이는 피아노를 침대나 집, 장난감, 놀이터로 알지 모른다. 왜 원숭이는 피아노를 알지 못하는가? 그것은 피아노가 사람의 뜻에서 나왔지 원숭이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 저렇게 살아야 한다 사물은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다 부질 없는 일이다. 그것은 아무리 그럴듯해도 원숭이가 피아노를 아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 모두는 알차고 보람된 인생을 살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공허한 인생을 살고 마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거꾸로 생각하기를 사람이 자기 계획과 뜻이 있어서 그대로만 되어지면 잘 될 것인데 하나님이 인생에 개입하셔서 사람의 뜻을 꺽고 하나님의 뜻을 펴시기 때문에 인생이 괴롭고 뒤틀려버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극구 거부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왔는데 그들이 거절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람은 자기가 마귀에게 얼마나 깊이 속아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지음 받은 존재이므로, 더 완전하고 바른 인간다운 삶을 살려면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 그에게 더 분명하게 깨달아져야 하며 그 뜻이 자기 속에 충만해져야 한다. 그 뜻은 곧 말씀이요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분이 그리스도이시므로 결국 그리스도의 생명이 충만해진 사람만이 인생을 바로 알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이다.

피아노는 다 같은 것인가?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다. 어떤 것이 좋은 것인가? 그것은 피아노를 향한 사람의 뜻이 가장 잘 구현된 피아노이다. 음이 정확하고 맑고 풍부하고 수명이 길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피아노가 그런 피아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하나님의 뜻이 가장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사람이 가장 좋은 사람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근거도 없는 자신의 뜻이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해롭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뜻) 즉 그리스도 위에 세우지 않은 인생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아서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이 시작되는 날에 하나님께서 철장으로 옹기점 그릇을 깨듯 다 부수어 버리고 말 것이다. 지금 세계 역사와 그 문명이든 개개인의 인생들이든 세상의 모든 것들이 자기대로 시작하고 자기대로 펼쳐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세상은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완전히 혼란에 빠져 있으며 그것들은 도무지 해결될 것 같지 않다. 사람들은 참된 자기 인생과는 무관한 수많은 일들을 벌여놓고는 허망하게 삶을 마치는 것이다.

사람들이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사람들은 세상에서 자기들이 한 일들의 99%는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이 자기 뜻을 따라 인생을 사는 것은 얼마나 定함이 없는 것인가? 자기 생각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자기가 처음으로 만든 생각이란 거의 없고 단지 남들이 자기 이전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생각들(상식) 중의 하나를 자기가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을 향해 정해놓으신 뜻(참 사람의 길)대로 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기대로 사는 것도 아니고 단지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느냐' '남들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에 따라 사는 것에 불과하다.

만일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이 아무도 없고 오직 자기만 있다고 할 때 그래도 내가 계속 할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세상에 아무도 없더라도 나대로 설 수 있는 자리가 바로 내가 서야 할 자리이며 그래도 해야 할 일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사람들이 여기서 웅성거리면 여기 좀 들여다보고 저기서 웅성거리면 그것도 좀 해보고, 또 남들이 '사람이라면 이쯤은 되어야 하지 않느냐'라고 하면 그렇게 되어 보려고 발버둥치다가 인생을 다 흘려보내는 것이 어리석은 인생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을 보라!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왕으로 삼으려고 법석을 떨며 따를 때도 그들에게 몸을 의탁치 않으셨고 개의치도 않으셨다. 또 반대로 나중에 사람들이 다 자기를 버리고 떠났을 때도 흔들리지 않으셨다. 그 분은 남들을 의식하여 무슨 행동을 하신 적이 없고 오직 자기를 보내신 분이신 하나님이 뜻을 따라 자기가 마땅히 갈 길을 가셨을 따름이다. 이것이 참 [사람의 길]이다.

사람이 영원한 사람의 운명이신 주님을 따라, 태초부터 계신 그 분(뜻)을 따라 인생을 살아가면 그 인생은 확실하고 만족이 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날 동안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이 다 나에게 꼭 필요한 것처럼 보이고 우리가 의식하여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지만 우리 인생을 마치고 주님 앞에 서게 될 때에는 그 모든 것들이 다 없어짐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때 우리 앞에 서 계신 분만을 의식하게 될 것이며 그 때 내 인생을 통하여 그 분이 인정하시는 [남은 것]이 있어야 한다. 그 때 빈털터리는 인생을 헛 산 것이며 정말로 비참한 자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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