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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음 (2)

(고린도후서 5:14-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 받은 새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육신의 눈으로 사람을 보지 않으며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는다. 자신을 향해서나 다른 사람을 향해서 우리의 시각은 언제나 그렇다. 우리가 실제로 이처럼 사람을 오직 그 생명대로만 취하고 외모로나 육신으로 취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서는 다음과 같은 태도들이 경계되어야 한다.

첫째, 생명대로 살지 않고 외식(外飾)하는 것. 외식한다는 것은 곧 위선(僞善)을 하는 것이다. 위선이란 선을 추구하기는 하는데 그것을 실행할 힘이 없어서 거짓으로 선한 척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 안에는 위선이 필요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생명은 선한 생명이요 거룩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거듭난 생명 안에는 선을 행할 수 있는 의지뿐 아니라 능력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외식하고 위선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외식하는가? 왜 많은 신자들이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며 그러다 안되면 외식이라도 하는가? 그것은 그들에게 생명이 (거의) 없거나 생명이 있더라도 그것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5:25,26)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영적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소유하고 있더라도 믿음이 없어서 혹은 착각해서 즉 자신이 여전히 아담의 생명만 소유하고 있는 자인 줄로 사탄에게 속아서 그 생명을 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성령(거듭난 생명)을 소유한 사람은 성령(거듭난 생명)으로 행해야(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육신대로 살게 되며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외식을 하려고 들게 될 것이다.

둘째, 생명대로 살지(행하지) 않고 육신대로 살며 범죄하는 것. 외식이 잘못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외식을 하지 않고 진실하게 살려고 한다. 그런데 그 진실이라는 것이 육신의 성질대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억지로 착한 척하며 거짓으로 부드럽고 인자하며 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는 것보다는 차라리 솔직하게 육신의 성질대로 혈기를 부리며 화를 내며 먹고 마시고 눕기를 좋아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거짓으로 선을 행하는 것보다는 아담의 성질대로 솔직하게 죄를 짓는 쪽이 낫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외식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태도이며 사탄에게 깊이 속은 것이다.

더구나 솔직한 것이 도를 넘어서 단순히 혈기를 부리며 육신의 정욕대로 행하는 정도가 아니라 범죄를 저지르는 지경에 이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로마서 3장과 6장에서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완전히 사탄에게 속아서 망상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1,2)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롬3:7,8) 바울은 이런 사람들에게 단호히 말한다.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6:15)

진실이란 선한 생명을 가진 자는 선을 행하고 악한 생명을 가진 자는 악을 행하는 것이다. 거룩한 아들의 생명을 가진 자가 어째서 육신의 정욕대로 자신을 방치하며 자기 몸을 죄에게 종으로 드린단 말인가? 그것은 진실한 행동이 아니라 망령된 행실이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롬6:15-19)

모든 것은 믿음으로써만 가능하다. 육신의 눈으로 자신을 보면 우리 자신은 다 아담의 자손이요 실패와 실수투성이의 죄인일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 피조물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거룩한 아들로 보시는데 누가 우리를 더럽다고 우기며 정죄하겠으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의 능력이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누가 계속 사람은 안된다고 우길 수 있는가?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과 형제를 바라보아야 한다. 믿음이란 내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물을 보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죽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살고 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생명이다. 이것을 무시하고 자기 힘으로 잘 살아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나 그것이 안되니까 육신대로 정욕대로 살자 하는 사람들이나 다 믿음이 없는 자로 책망 받을 것이다.

셋째, 사람을 생명으로 판단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에 따라 좋다 나쁘다 판단하는 것. 이것은 다른 사람, 곧 형제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와 관련하여 첫 번째 원칙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경험에 의하면 많은 경우 사람의 외모와 내적 생명은 일치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어떤 때 우리는 인격이 훌륭한 사람은 얼굴에 그것이 쓰여 있는 것처럼 느낀다. 사람의 속에 있는 생명은 밖의 행위나 태도에서 드러난다. 그러므로 풍기는 자태를 통해서 사람의 인격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많은 경우에 사람의 외모와 사람의 실제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다. 같지 않을 뿐 아니라 아주 반대되는 경우도 있다. 주 예수님의 경우(나사렛 출신으로 보내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보배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값비싼 보배는 길거리의 돌처럼 공개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고 밭에 감추어져 있거나 질그릇에 감추어진 경우가 많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특히 더 그렇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취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반드시 사람을 시험해 보아야 한다. 그 생명이 금인지 누런 돌인지, 똥인지 시험해 본 후에 그를 판단하고 취해야 한다. 누렇게 보인다고 해서 다 금은 아니며 바울처럼 찌꺼기(고전4:13)처럼 보인다고 해서 참으로 찌꺼기가 아니라 보배인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중용(重用)하거나, 신뢰하여 자기를 의탁하려고 할 때(형제로서 신뢰하며 그를 주님의 생명을 공급 받는 통로로 삼으려고 할 때) 우리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판단을 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갓 입교한 사람을 중용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딤전3:6) 이것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갓 입교한 사람을 중요한 직책에 앉히고자 하는 것은 틀림없이 그의 외모가 좋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속의 생명은 겉의 외모와 다른 것이므로 오랜 시간 동안 주님을 따르며 몸의 생명을 누린 후에,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교회에서 봉사하며 그 속 생명의 어떠함을 드러내 입증 받은 후에라야 사람을 신뢰하며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며 외모로 취하여 영적 생명이 미약한 자를 크게 떠받드는 태도는 교회에만 손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에게도 막대한 손실을 가져다 준다. 영적 세계나 세상이나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가장 좋은 것은 사람으로 겸손히 오래 참는 것을 배우게 하는 것이다. 금이 오래 묵는다고 해서 똥이 되는 것은 아니다. 똥은 오래 묵어도 금이 안되지만 금은 여전히 금으로 남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으로 기다리는 것을 배우게 해야 한다. 특히 아이들을 키울 때 우리는 그들을 떠받들거나 그들이 무엇이나 된 양 착각하여 함부로 까불도록 띄워서는 안된다. 아이들의 기가 죽는다고 아이들의 육신적 모양과 마음을 한없이 높여놓고 자기가 왕이나 된 것처럼 어디서나 날뛰게 만드는 것은 아이들을 죽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 속에서 온전히 자라 자리를 잡게 되기까지는 많은 환난이 필요하다. 육신의 모양은 사람을 착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그들이 절망적인 죄인이며 하나님 앞에서 육신의 아름다움과 자랑거리는 다 쓰레기에 지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원수로 행할 뿐이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교회에 처음 들어온 '우아한'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분명히 주지시켜야 한다.

물론 반대로 외모가 좋지 않다고 그 속 생명을 보지도 않고 사람을 무시하고 거절하는 태도도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약2:1-7)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엎드리게 기다리게 하는 것과 사람을 무시하며 업신여기는 것은 다른 것이다. 많은 경우에 진정으로 가난한 자, 진정으로 곤고한 자들 안에는 상한 심령과 청결한(단순한) 마음이 있다. 이것은 천국을 소유하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좋은 조건이다. 교회는 이것을 모두가 함께 공유할 만한 좋은 자산으로 여겨야 한다. 부자의 돈과 권세보다 가난한 자의 하나님밖에 의지할 수 없는 가난하고 단순한 심령, 상한 심령이 훨씬 더 교회를 부유하게 한다. 그러므로 사람을 외모로 취해서는 안된다.

넷째, 사람을 생명으로 판단하지 않고 '외식'에 속아 좋게 판단하는 것. 사람의 외모에 속는 것도 문제지만 외식에 속는 것은 더 심각한 잘못이다. 집에 혼자 있을 때는 아무도 외식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모인 곳에는 언제나 외식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며 실제로 외식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외식하지도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외식에도 속지 말아야 한다. 주님은 성전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며 다 보이도록 구제하며 금식하는 위선자들에게 속지 않으셨으며 그들의 실체를 단번에 파악하여 사람들로 경계케 하셨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높은 종교 지도자들로서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대상이었겠지만 주님은 그들을 이스라엘에 위험한 해악으로 간주하시고 저주하시며 경계하셨던 것이다.

속은 교만하고 이기적이면서도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는 사람들에게 교회가 속아서 자리를 내어주면 교회는 그만큼 주님의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외식하는 자들은 단지 생명을 공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흐름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23:13)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분별하여 경계해야 한다.

생명으로 행하는 사람은 자기와 생명이 같지 않은 자, 생명으로 행하지 않는 외식적 행동을 쉽게 분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직 외식하는 자가 외식하는 자들에게 속는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우리는 말을 잘하거나, 잘 가르치거나, 나서서 일을 열정적으로 잘 추진하고 잘 처리하는 사람을 대할 때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생명대로 취하는 이 원리에 철저해야 한다. 한편으로 우리에게는 이런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우대하여 따르는 경향이 있으며 반대로 이런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며 설치는 사람이나 외식하는 사람으로 멀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사람이 어눌하여 그 속에 있는 생명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 사람을 외모를 따라 판단하여 내버려두면 교회는 손해를 입는 것이다. 교회의 은사와 직분은 오직 사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그 생명의 실제가 교회를 섬기며 사람들을 윤택케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떻게 하든 그것을 포착해야 하며 그 외의 것들은 다 걷어내어야 한다.

다섯째, 사람을 현재의 생명으로 판단하지 않고 과거의 생명, 과거의 행위에 매여 그릇 판단하는 것. 우리가 사람을 육신대로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의 외모를 보는 것이며, 사람을 영으로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의 미래를 보는 것이다. 어떤 사람 안에서 미래가 보이는 것은 그 사람 안에 현재 부어진 주님의 생명의 역사 때문이다. 갓 태어난 아이는 작지만 10-20년이 지나면 장성한 어른이 될 것이라고 누구나 믿는다. 무엇을 보고 그렇게 판단하는가? 그 아이가 지금 밥을 먹는다는 것과 그것으로 인해 쑥쑥 자라는 것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지난 달에는 50cm였지만 이 달에는 60cm가 되니 장차 1m 70cm가 되는 것도 내다보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볼 때 우리는 현재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는 주님의 생명의 어떠함을 보아야지 과거의 현재의 외모에 매여서는 안된다. 특히 과거에 어떠했다는 것을 너무 보아서는 안된다. 과거에 지녔던 육신적 특성은 물론 언젠가 다시 나타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계속 그리스도를 의지하도록 돕기 위해 그의 죄인 됨을 주지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육신적 허물과 무능을 계속 주지시키는 것은 아무 유익도 없다. 과거의 행위와 실패로 인한 편견과 선입견은 사람의 미래를 과거에 붙들어 매는 결과를 초래한다.

여섯째, 사람을 생명으로 판단하지 않고 현재의 실수와 허물에 매여 그릇 판단하는 것. 과거의 행위와 과거의 성질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현재의 허물에도 너무 매이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어차피 지금 우리 모두가 완전하지 않고 장차 몸의 구속을 입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서로에 대해 신뢰하며 소망을 갖고 기다리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씨 때문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우리를 새롭고 완전한 길로 이끌어가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이것만 보아야 한다. 우리의 눈이 다른 것 곧 우리 육신의 연약함을 보는 순간 우리는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놓칠 수 있다. 우리가 상대방을 볼 때는 얼굴을 보지 발바닥이나 콧구멍이나 뱃속의 똥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눈을 보고 예쁘다고 느끼거나 방긋 웃는 모습을 보고 아름답다, 기분 좋다 하고 느끼지 몸 전체를 다 들여다 보고 좋다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볼 때 우리는 반드시 그 생명만 보아야 한다.

우리는 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다. 이 말의 강조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 우리는 새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둘째,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아무도 육신대로 새 피조물인 사람은 없으며 육신대로도 아름답고 신뢰할 만하며 존귀하게 여겨질 사람은 없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즉 작으나 크나 그 사람 안에 있는 바 위로부터 받은 생명으로 인해 새 피조물이며 아름답고 신뢰할 만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볼 때 허물이나 생명으로 말미암지 않은 여러 육신적 모양을 너무 깊이 보아서는 안된다. 그런 것을 보는 것은 오직 그 사람이 생명으로 행하느냐 아니면 사탄에게 속거나 흔들려서 생명으로 행하지 않고 육신대로 행하고 있느냐를 분별할 때 해야 하며 그것의 목적은 그를 판단하는 것 자체나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를 돕고 세워서 온전케 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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