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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음 (2)

(고린도후서 5:18-6:2)

히브리서 기자는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과 관련하여 이런 말을 했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13:9)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 것에 대해 말했다. 우리가 마음을 단순하고 순전하게 하여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만 착념(着念)하고 다른 말은 듣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고린도교회의 실패는 그들이 바울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아니라 바울의 말과 함께 엉뚱한 다른 사람들 곧 교회 안에 침투한 거짓 무리들의 말을 더 들었다는 것이다. 다른 교훈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무지하고 연약한 마음을 혼란에 빠뜨려 이것도 저것도 안되게 만든다.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다는 것은 그리스도만을 추구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말이다.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는 것, 이런 저런 오락과 쾌락을 추구하는 것, 이런 저런 사상과 정신을 실험해 보는 것은 여유가 있을 때 해야 한다. 지금은 그런 한가한 때가 아니다. 사탄이 자기 마지막 때가 다 된 줄 알고 온 힘을 다하여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을 대적하여 미혹하는 때이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13:)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5:8)

지금 사탄은 물귀신작전을 구사하여 불신자는 물론이고 믿는 자들도 함께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쓰고 있다. 말세는 괜히 말세가 아니고 실제로 주님의 임하심이 가깝고 사탄의 최후가 가깝기 때문에 말세이며 디모데후서 3장에서 말하고 있는 갖가지 말세의 현상들은 우연히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자기의 최후가 가까운 줄 알고 최후 발악을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은혜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은혜를 제대로 받으려면 은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면 은혜를 제대로 받을 수 없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5:15-17)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6:14)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로서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세상에 대해 죽었다. 먹고 마시고 놀고 육신의 향략과 세상의 권세와 부귀 영광을 목표로 삼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은혜를 헛되이 받는 태도 중 하나가 은혜가 마치 육신의 안락과 평안, 육신적 삶의 안정과 안녕 또는 세상에서의 영광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해석하여 그런 것을 도모하는 것임을 보아야 한다. 식물(食物 ; 먹고 마시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우리를 유익하게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있다고 해서 구원이고 그것이 없다고 해서 멸망인 것이 아니다. 물론 은혜는 식물을 포함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은혜는 식물과 상관없는 것이며 육신의 안녕과 상관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은혜는 오직 그리스도의 길과 진리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우리 영혼이 우리 생명이 참으로 사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생명과 아버지의 뜻(말씀)을 가지고 그의 온 삶을 아버지께 순종하신 것을 우리도 받아들여서 우리의 온 생애가 하나님께 드려지며 순종케 되는 것이 바로 은혜이며 은혜를 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려진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우리 안에서 표현되고 누려져야 한다. 이것은 큰 일이다. 일생을 통해 온 힘을 여기에 쏟아도 육신을 가진 우리가 세상에서 이 일을 제대로 누릴 수 있을지 의문인데 만일 교회가 이것이 아닌 다른 것에 상당 부분의 관심과 에너지를 쏟고 있다면 참 은혜는 결코 누려지지 못한다. 우리는 순복음교회를 비롯하여 한국 교회의 다수 교회들이 추구하는 일들에 대해 우려를 금치 못한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들에게 눈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은혜를 은혜 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며 은혜의 길에서 이탈하여 곁길로 가는 것이다.

만일 교회가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일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와 거룩과 진리를 풍성하게 체험하고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높이는 것을 적당히 뒤로 미루고 육신의 안녕과 번영 즉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을 믿고 기도했더니 병이 낫고 사업이 성공하고 자식이 잘 되었다는 것을 마치 은혜의 주요 내용인양 전면에 내세워 그것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은혜를 헛되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육신의 환난 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찾는 것도 은혜의 한 부분이며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육신이 안녕을 얻게 된 것도 분명히 은혜를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작은 은혜이다. 그리고 그것은 은혜를 호도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어떤 때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유익을 위해 우리 육신과 육신의 삶을 치기도 하시기 때문이다. 진정한 은혜는 식물로 (육신의) 유익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영혼과 육신을 포함한 전 인격적) 유익을 얻는 것이다.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 은혜에서 떨어진다는 것의 중요한 내용 중 하나는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갈1:6)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5:4)

율법주의에 빠진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내 삶의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내 삶의 주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내 생명이 되어 내 인생과 내 행동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인생의 책임자가 되어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2:19-21) 바울의 이 말은 은혜를 받는 것 즉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바로 우리 자아의 죽음과 직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또 여기서 우리는 구원을 깊이 누리지 못한다는 것 또는 은혜를 헛되이 받는다는 것의 내용 중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받아들여서 순종하지 못하는 상태를 오랫동안 방치하는 것과 사탄의 시험을 대적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 우리는 그렇게 하게 되는가? 아무도 실패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첫째,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기 때문이다.
지금의 우리 상황 즉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환경)과 우리 존재(몸)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여 마땅히 취해야 할 주의와 긴장 없이 순간 순간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타락한 몸으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은 세상 안에서 살고 있으며 상당 부분 마귀의 지배와 책동 아래 놓여 있다. 여기서 긴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대로 죽겠다(멸망하겠다), 앉아서 당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태도이다.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한다는 것은 곧 육신의 정욕과 습관대로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마귀의 생각대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멍한 상태를 피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매사에 먼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하며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는 먼저 '이 일에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 생각과 판단이 힘들고 귀찮다고 아무 생각 없이 혹은 마음에 떠오르고 내키는 대로 행동해 버리면 결국 영혼과 육체를 좀먹는 사탄의 거짓말을 받아들여서 고통과 곤고에 빠지게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될 때 우리 마음은 산란하고 몸은 지쳐서 생명이 약화된다. 사탄의 사주와 육신의 정욕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되는 대로 살거나 허무하고 거역적인 삶을 살면 살수록 몸과 정신은 피폐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우리를 멍하게 만들고 아무 생각 없이 되는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서 악순환이 계속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진리로 무장해야 한다. 범사에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지혜와 계시의 정신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래서 한 순간도 육신과 마귀에게 틈 탈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인생을 가장 편하게 사는 길이며 가장 쉽게 인생을 사는 길이다.

둘째, 지쳐서 포기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포기한다는 것인가?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것, 말씀대로 사는 것,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것에 매번 실패하기 때문이다. 진리로 살고, 성령으로 살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을 마음으로 원하지 않기 때문에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번번이 실패하기 때문에 부끄럽거나 의욕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한 번 성공하고 한 번 실패하는 것을 반복한다면 아무도 믿음으로 살고 진리로 사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열 번 중에서 한 번만 성공하고 아홉 번은 실패한다면 더 나아가서 백 번 중에서 한 번만 성공하고 구십 아홉 번은 실패한다면 그것을 다시 시도하는 일이 쑥스럽고 부끄러워서 아예 포기하는 쪽으로 그래서 찜찜하기는 하지만 그냥 그냥 하루 하루를 보내게 되는 쪽으로 흐르기 쉽다.

이것이 가장 큰 함정이다. 이것은 마귀가 우리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우리의 양심을 건드림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이다. 쭉 주님을 따르며 순종하든지 아니면 집어치우든지 둘 중의 하나를 해야지 하는 생각 즉 제대로 믿지 못하고 오락가락할 판이면 아주 포기하고 되는 대로 살자 하는 생각이 바로 마귀의 시험이다. '번번이 실패하면서 또 새로 다짐하고 또 새로 시도하는 것은 우습고 쑥스럽다 그러니 관두자' 하는 것이 바로 날마다 실패하는 우리에게 날마다 날아들고 있는 마귀의 시험이다.

우리는 무엇이 길이고 무엇이 옳은지를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일관성 있게 주님을 따르며 일관성 있게 선을 행하고 일관성 있게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바란다. 그리고 물론 그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그것만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것만을 기대해서 그것이 안되면 아예 치우겠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교만한 생각이고 망상이다.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는 이미 타락한 죄인이고 하나님을 떠나서 온갖 범죄와 실패에서 헤매던 자들이고 지금도 실력이 그런 자이다. 그런 가운데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신 것이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우리의 마음이나 행위나 실력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의 사역 때문이다. 그로 인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되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되어서 구원을 받은 것이다. 즉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고 그리스도 안에서 능할 뿐 육신 자체의 체질과 능력은 여전히 그대로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우리는 '넘어지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끝없이 실패하고 넘어지고 부끄럽게 되어도 우리는 능히 그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잘했다거나 당연하다거나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뚜기처럼 우리 안에 있는 부활 생명, 거룩한 생명, 이기는 생명으로 인해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반드시 승리한다. 따라서 우리는 포기하지 말고 계속 믿음으로 사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 일관성 있게 하나님께 순종하고 진리대로 사는 것이 안되어 계속 실패를 해도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마귀가 부끄러울대로 부끄러워진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의 양심과 자존심을 건드리며 '이제 포기하라'고 말할 때 그 말을 들으면 안된다.

갓 태어난 아이는 서지도 기지도 심지어 돌아눕지도 못한다. 그러나 돌이 되어 가면 아이는 걷는 것을 시도한다. 생명이 거기까지 뻗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무렵 아이가 걷는 것은 불안하며 곧 넘어진다. 발로 완전히 몸을 지탱하며 움직이기까지에는 생명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은 자라는 것이다. 비록 서는 것조차 힘들더라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걷는 것을 시도하면 몸이 기능을 익히게 될 뿐 아니라 그 동안 생명이 자라서 그것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아이는 결국 걷게 된다. 말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며 일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미숙한 상태에서 우리는 수 없는 실패를 반복한다. 그러나 아무도 도전을 포기하거나 계속 실패하고 또 도전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자존심이 구겨지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여러분이 육신적으로 어른이라고 해서 영적으로도 어른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우리는 아직도 어린아이, 심지어는 걷는 것도 안되고 기는 것도 버거운 어린 아기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물론 근원적으로 보면 부끄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을 영적으로 그처럼 약하고 무능한 상태로 지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귀의 거짓말을 듣고 타락함으로써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왕에 타락했고 또 하나님이 그것을 다 아시고 그 자리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 마당에 우리는 우리의 무능과 연약함을 숨기거나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도리어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라는 것을 날마다 인정하고 걸음마부터 새로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것에 계속 실패하여 무수히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되더라도 위축되지 말고 계속 도전해야 한다. 그것이 진실한 태도이고 성실한 태도이다. 포기하는 것은 가장 교만하고 어리석은 태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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