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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1)

(고린도후서 7:5-16)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고후7:5,6의 이 말씀은 그 내용으로 볼 때 고후2:12,13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의 계속이다. 마게도냐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거기서도 안팎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다행히도 거기서 기다리던 디도를 만나게 되었다. 바울은 디도가 전해 준 소식을 통해 큰 위로를 얻었다. 디도는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가져왔는데 그것은 이전에 그가 전해준 소식과는 달리 반갑고 기쁜 소식이었다. 그 소식은 전부는 아니나 고린도교회 형제들의 대다수가 바울이 보낸 (책망의) 편지를 읽고 그들 안에서 일어난 범죄와 실패에 대해 심각하게 반성하고 회개했으며 그것들을 성령 안에서 합당하게 처리했다는 소식이었다.
고린도교회가 자기들에게 있는 죄와 허물에 대해 근심과 애통함을 보인 것은 곧 그들이 여전히 바울을 열렬히 사모하며 그가 전한 복음을 깊이 받아들이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요 궁극적으로는 주님을 사랑하며 그 생명 안에서 행하고 있다는 표시였으므로 바울은 그들의반응에 대해 매우 고무되었으며 기뻐했다.

디도를 통해 고린도교회의 그런 소식을 듣기 전에 바울은 자기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로 인해 그들이 너무 슬퍼하며 낙심하게 되거나 너무 위축되거나 혹은 회개와 성숙이라는 열매는 맺지 못하고 반발과 시험만 불러오게 되지 않을까 하고 염려를 했다. 자기의 책망과 권면 자체는 성령님을 따라 합당하게 이루어진 것이지만 사탄이 그들을 시험하여 일을 어렵게 만들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했다는 소식을 듣자 바울은 자기가 편지를 잘 보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여기서 길게 근심한다는 것은 낙심과 좌절에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좋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잠시만 근심했다고 했다. 잠시만 근심한다는 것은 죄로 인해 책망을 받는 자가 자기의 죄와 실패와 어리석음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근심하며 회개함으로써 주님의 길로 돌아서며 그로 인해 잠깐의 근심에 이어 곧 기쁨과 안식에 이르게 되는 것을 말한다.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바울은 지금도 여전히 고린도교회 형제들을 죄로 인해 책망하고 근심케 한 일 자체를 기뻐하거나 즐겁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 일, 곧 범죄가 발생하고 그로 인해 형제를 책망하며 경고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 더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왕 일이 발생했다면 덮어놓고 쉬쉬하며 적당히 지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죄에는 어차피 근심이든 징계든 고통이든 대가가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가 있는 곳에는 책망과 그로 인한 근심과 고통은 불가피하다. 문제는 그런 책망과 징계가 회개와 신앙의 성숙이라는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밑거름이 되느냐 아니면 단순한 근심과 고통으로 끝나버리느냐 하는 것이다. 고린도교회의 경우는 좋은 결실을 맺었다. 즉 근심이 회개로 이어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기뻐한 것이다.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슬퍼했으니, 결국 여러분은 우리 때문에 손해본 것이 없습니다 - 표준새번역)

우리가 육신적으로 어떤 근심과 고통을 겪든지 그것이 최종적으로 우리 안에서 우리 영혼을 온전케 하고 우리 생명을 풍성케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손해본 것이 없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책망과 경고의 편지를 보낸 것은 바울 개인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 거기서 벌어지는 잘못된 상황에 대해 분노하고 책망한 것은 바울 개인의 생각이나 감정이 아니라 성령님의 생각과 감정이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틀림없이 실제적인 징계가 따랐을 것이다. 즉 고린도교회의 범죄한 자들과 그것에 연대 책임이 있는 형제들 다수에게 육신에 큰 고통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1:27-32)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다는 것은 육신의 질병과 연약함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어디서 왔겠는가? 바울은 교회 안의 이 상황이 분명히 죄와 관련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이 이런 일을 어떻게 초래하겠는가? 이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일이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에 범죄가 일어났을 때 바울은 단지 편지로 책망하고 경고했지만 하나님은 바울의 경고와 권면의 편지로만 그들에게 대처하시지 않고 그들의 육신에 실제적인 타격을 가하고 계셨음이 틀림없다.

이런 일을 당하고 있을 때 바울이 그들의 죄를 책망하고 경고하는 말을 했으니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그 일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은 못 보고 다만 바울이 그들을 괴롭게 하고 그들을 징계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바울은 하나님의 사자로서 그들을 징계하고 심판하는 일을 실제로 수행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은 그러한 일을 겪으면서 회개에 이르렀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자기로부터 단지 책망의 말로 상처를 입었든 아니면 그에 동반된 (하나님의) 육신적 징계로 해를 입었든 그것이 결코 해(害)가 아니며 유익이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고린도교회가 바울의 책망을 듣고 근심을 했으나 결국 회개를 했으므로 그들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한 것이다. 그 근심은 참으로 필요하고 유익한 근심이었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고린도교회 형제들의 다수가 바울이 쓴 책망의 편지를 읽고 자기들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며 근심하며 반성하고 회개했다. 그 결과 그들은 각각 자기 죄를 반성하고 회개할 뿐 아니라 교회의 순결을 위해 교회 안에서 범죄를 저지르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징계하고 추방하기도 했다. 이것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결코 죄와 불순종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자가 아님을 천명했다. 비록 연약해서 범죄하고 실패하는 일은 있더라도 그들의 마음, 그들의 생명은 그것을 수용하지 않음을 분명하게 선언하고자 한 것이다.

바울의 편지는 결국 그들의 양심과 그들의 생명을 자극했다. 단지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계도한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정신과 그리스도의 생명을 흔들어 일깨운 것이다. 그들이 누구인가? 과연 범죄하면서도 살 수 있는 자이며 세상과 짝하며 살 수 있는 자인지를 흔들어 일깨운 것이다. 만일 이때 그들 안에 참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그 편지를 받고도 태연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하나의 편지와 한 마디의 책망을 듣고 마음의 평안을 잃어버렸고 근심과 갈등에 싸였다.

하나님의 생명 안에는 죄와 공존하거나 타협할 여지가 없으며 그 생명은 불의와 악을 품고도 평안할 수는 없는 생명이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했다. 바울은 그들이 단지 회개했다는 것만으로 기뻐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바울의 책망의 말을 듣고 근심한 후 그 결과로서 회개했다는 것으로 기뻐했다. 근심한다는 것은 마음 속에서 성령과 육신(마귀)의 싸움이 벌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양심이 없는 사람은 전혀 죄로 인해 근심하지 않는다. 또한 타락하여 다 죽은 양심만 있고 성령으로 인해 새롭게 된 양심이 없는 사람은 죄로 인해 그렇게 심각하게 근심하지 않으며 그렇게 심각하게 흔들리며 평안을 잃지는 않는다. 회개에 이르게 하는 이 근심은 오직 하나님의 택함을 입고 하나님의 생명이 그 속에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바울은 왜 편지를 썼는가? 그의 목표는 범죄로 인해 억울한 피해를 입은 자를 구제하는데 있었는가? 잘못된 일을 바로 잡는데 있었는가? 아니면 범죄자를 처벌하거나 돌이키게 하는데 있었는가? 그는 그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의 궁극적 목적은 단지 어떤 일을 바로 잡고 어떤 일을 수행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사람들로 하나님의 생명 안에 굳게 서게 하는데 있었다.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란 곧 '그리스도를 향한 고린도교회 형제들의 사랑' 또는 '진리 안에 있는 그들의 생명'을 가리킨다. 진리의 생명,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는 그것을 항상 나타내어야 한다. 그 생명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탄과 육신에게 막혀서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모든 기회를 통하여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실제로 드러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고린도교회 형제들은 바울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바울과 그가 전한 그리스도와 복음을 향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들 안에서 전혀 드러나지 못했다. 원수의 훼방과 육신에 짓눌려서 그랬던 것이다. 그들은 도리어 자기들이 마치 범죄하는 생명을 가진 자인 것처럼 행동했다. 이런 그들에 대해 바울은 정면으로 대응했다. 그것은 그들의 범죄하는 모습, 실패하여 이리 저리 방황하는 부끄러운 모습을 크게 확대하고 증폭하여 그들 앞에 다시 제시했다. "이것이 과연 너희들의 모습이냐? 이러고도 평안하며 즐겁고 행복하냐? 그렇다면 계속 그렇게 살아라. 진리를 떠나 범죄하면서도 행복할 수 있고 안식할 수 있으면 나를 반대하고 복음을 반대하고 너희들이 하고 싶은 대로 계속 해 보라"고 말한 것이다.

바울은 사람들을 가르쳐서 어떤 일을 억지로 하게 하거나 억지로 어떤 모양을 갖추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부질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 그들로 그들이 받은 생명 곧 성령 안에서 온전히 행하도록 일깨우고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그렇게 일하신다. 우리의 일 또는 하나님이 우리로 하게 하시는 일은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며 보고 또 보는 가운데서 그의 길 안에 있는 안식과 평안과 기쁨과 행복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리잡게 될 때 그 생명을 사용하며 그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오직 이 생명으로 살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자극하신다. 생명의 풍성함으로 선한 자극을 주시기도 하고 생명 밖의 세계 곧 죄와 사망과 고통의 세계로 나가는 것을 잠시 허락하셔서 고통과 근심을 겪게 하시기도 하신다. 그리하여 우리로 결국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온전히 행하도록 역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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