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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음

(고린도후서 10:1-18)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또한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을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려는 것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고후10:1-3)
"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유하심과 관대하심을 힘입어서 여러분을 권면합니다.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을 때에는 내가 여러분에게 유순하나, 떠나 있을 때에는 여러분에게 강경하다고들 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청하는 것은, 내가 떠나 있을 때에 강경하게 대해야 할 필요가 없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정을 따라 처신한다고 헐뜯는 사람들에게는 나는 대담하게 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표준새번역)

바울은 누구에게든지 자기를 겸손하고 온유한 형제로 나타내고 싶었지 책망하고 심판하는 사자(使者)로 나타내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생명 곧 바울 안에서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근본적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생명이요 겸손하고 온유한 어린양의 생명이지 정죄하고 심판하는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빛은 결국 저절로 어둠을 정죄하고 심판할 수밖에 없듯이 바울의 생명 역시 진리의 생명이므로 교회 안에 일어나는 모든 어둠과 거짓에 대해서는 부득이 강경한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형제들을 끝까지 사랑하고 포용하고 싶었지만 끝까지 영생과 진리를 거부하고 사탄의 말을 듣는 자들에 대해서는 자신을 심판주의 사자로서 강하고 무섭게 나타내 수밖에 없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10장에서 고린도교회 형제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제발 나를 무서운 심판자로 나타나게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그가 그런 호소를 한 이유는 지금 고린도교회 안에 거짓 선생들이 일어나 형제들을 미혹하고 있고 형제들 중 여럿이 그 말을 듣고 진리에서 떠나 자유를 잃고 바울을 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이 자리에서 돌아서지 않는다면 바울은 결국 생명 주는 자가 아니라 강경한 심판자로 그들을 대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바울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형제들이 사탄의 미혹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를 잃어버리고 도로 죄와 세상과 율법과 정욕의 종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진리를 알게 했고 진리는 우리에게 자유를 가져다 주었다. 이 자유는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빼앗아 갈 수도 없는 하늘의 자유요, 영원하고 참된 자유이므로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참 안식과 평강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인한 이 자유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참으로 알게 하고 그로 인해 모든 거짓과 속박, 허무한 일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하나님을 섬기되 억지로가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으로 자연스럽게 섬길 수 있게 만들고 하나님의 생명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 모든 거짓되고 헛된 일들에 대해서는 마지못해 억지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가 없고' '재미가 없고' '무의미하므로' 당연히 거부하고 하지 않는 이 자유가 바로 우리가 소유한 생명의 자유이다.

이것은 너무나 귀하고 복된 하나님의 선물이다. 반면에 이것은 사탄에게는 치명적이다. 사람으로 도무지 사탄의 말을 듣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탄은 우리가 소유한 이 생명 안에서의 자유를 우리로부터 어떻게든 빼앗아가려고 노력한다.

아니나다를까 바울은 자기가 살아 활동하는 당대에 벌써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사탄의 방해 공작에 심각하게 직면하여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았다. 고린도교회나 갈라디아교회가 바로 그 대표적인 교회들이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호소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바울이 강력하게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교회의 혼란과 실패의 실체는 바로 신자들이 '그리스도' 대신 '종교'(구약 유대교, 율법의 형식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매이는 것이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구원을 믿는 믿음 대신 인간의 자격과 행위를 붙잡는 것이고 '성령께 복종하는 삶' 대신 '율법과 육체(의 요구 및 능력)대로 행하는' 것이다.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갈5:3-10)

요동케 만드는 자가 심판을 받고 하나님께 중한 책임을 지는 것은 물론이지만 요동하는 자 곧 요동케 되는 자도 하나님 앞에서 같은 심판을 받게 됨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에 무지하고 교만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가 사탄의 미혹에 빠져 남을 요동케 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함은 물론이고 우리 자신이 거짓말에 속거나 흔들이는 자가 되어서도 안된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그리스도를 온유와 겸손의 주로서 사랑과 기쁨 가운데서 맞이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는가 아니면 불꽃같은 눈과 주석같은 발로 심판하시는 분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서 있는가? 이것은 우리가 지금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시각(視覺)과 관련된 문제이다. 만일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만 보고 외모로만 취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주님을 참 주님대로 알지 못할 것이며 우리에게 주님의 생명을 공급하는 통로가 되는 귀한 형제를 그 가치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배격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있을 것이다.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고후10:7)
"여러분은 눈 앞에 나타나 있는 일을 똑바로 보십시오. 누구든지 자기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는 확신을 하면 자기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인 것과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스스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고린도교회 형제들이 왜 자기의 사도직을 의심하며 상당 부분 그의 가르침에서 떠나 있으며 그를 거부하는가 그 이유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그런 혼란에 빠지고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된 것은 그들이 사탄에게 미혹되어 사람을 그 생명대로 보지 않고 외모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우리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은 바울의 육체적 외모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 (바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차지만, 직접 대할 때에는 그는 약하고 말주변도 별것이 아니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고후10:10)

고린도교회는 왜 바울의 권위와 그의 말(복음)에 대해 의심을 품었는가? 그것은 바울의 외모가 사람들이 보기에 그럴듯한 모양 곧 위대한 지도자다운 풍모를 갖추지 못하고 다소 초라하고 왜소해 보였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보배는 아무나 가져가지 못하도록 감추어져 있다. 생명의 진리도 소나 개나 다 취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 아들(그리스도)에게 주신 자들만 가져갈 수 있다. 그들 외에는 눈이 어두워 그것을 발견하지도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배이신 주 예수님 자신은 물론이고 그의 종인 모든 선지자들과 모든 사도들과 모든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그러한 포장에 싸여 감추어져 있었음을 알고 있다.

주 예수님은 어떠했는가?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欽慕)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53:1,2)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정녕히 나의 신원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사49:4)

주님은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을 공개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밝히시고 자기를 믿을 것을 권고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믿지 않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주님의 외모가 사람들의 기대했던 메시아 이미지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너무나 겸손하고 초라했다. 그는 문자 그대로 어린양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명, 그의 실제, 그의 삶과 행동, 그의 가르침은 성경(구약, 율법)과 완전히 일치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분명히 '성경에 기록된 자'요 율법으로 표현된 바로 그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의 생명을 보지 않고 오직 그의 외모만 보았기 때문에 그를 거부했다. 그의 생김새나 출신, 지위 같은 외모 뿐 아니라 또 다른 외모 곧 그의 행동도 사람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오직 하나님을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했을 뿐 사람들이 원하는 요구들을 만족시켜 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에게 자기들을 육신적 곤고에서 해방시켜달라고 요구했으나 주님은 그들에게 오직 생명의 회복을 촉구하고 죄와 불순종 및 사탄으로부터의 자유를 주려고 했다.

주님은 외모만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발견되어지지 못할 분이었다. 이것은 오늘 여기 주인공인 바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고린도교회의 여러 신자들 곧 바울 자신이 낳고 기른 자녀와 같은 사람들로부터도 그의 그럴듯하지 못한 '외모' 때문에 의심받고 배척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 있어서 마찬가지였고 또 앞으로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구든지 사람을 외모로 보고 외모로 취하는 자는 생명의 주를 결국 놓치게 될 것이며 그의 진리에서 떠나 마귀의 거짓말에 빠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오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든지 남에 대해서든 사람을 외모로 보고 외모로 판단하며 외모로 취하는 자이면 우리는 벌써 사탄에게 속은 것이며 미혹하는 자에게 요동케 된 것이다.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교회 형제들에게 한 가지 문제 제기를 한다. 그것은 너희들이 사람을 판단할 때 일관성 있게 하라는 것이다. 자신에게 적용하는 원칙을 남에게도 적용하고 반대로 남에게 적용하는 원칙은 자신에게도 적용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원칙인가? 예컨대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하고 있었고 또 그와 같이 그들의 자녀들에게 자기가 좋은 아버지, 어머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고 이웃에 대해서는 자신이 좋은 이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고 인정하는데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모르기는 몰라도 그것이 그들의 얼굴이 잘 생겼다든지 그들의 모습이나 행동이 항상 만인이 다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권위 있고 품위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의 근거는 그들의 외형이 아니라 그들의 생명 곧 그들의 마음과 정신에 기초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스스로에 대해 "내가 비록 외모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더라도 내 속은 남에게 멸시받지 않을 정도로 괜찮다. 그리고 때로 내 행동에 실수나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내 마음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이 나를 겪어 보면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거야"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바울은 바로 이러한 그들의 실상을 근거로 그들이 사람을 취함에 있어서 일관성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자기가 그렇다면 바울도 그러한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외모로 보지 않고 외모로 평가받기를 원치 않으면서 왜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외모로 보고 외모로 평가하는가? 그것이 바로 사탄에게 속고 있다는 증거이다.

어지간히 못난 사람, 어지간히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도 적어도 스스로는 자기의 가치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인정하고 있다. 많은 신자들이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나 다른 형제들 앞에서 충분히 인정받고 존중될만한 가치가 있는 귀한 존재이며 자기의 많은 행동이 옳고 사람들에게 좋게 평가받을만하다고 생각한다. 또 설사 자기의 어떤 행동은 때로 옳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자기의 본심이나 자기의 마음, 동기는 진실하고 선하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서 때로 마음조차 잘못 품는 경우가 있어도 자기의 근본적인 존재 자체는 선하며 사람들로부터 용납될만한 좋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그런 이해와 관용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기는 늘 옳고 심지어 행동이 잘못되었을지라도 마음만은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도 그들의 부모나 형제, 그들의 이웃에게는 그렇게 (외모가 아니라) 속을 보고 이해하며 용납하는 것이 안되는 것이다.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 왜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가를 물어보면 그의 답은 언제나 '그가 틀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때 당신이 그에게 '설사 그의 행동이 틀렸더라도 그 생각이나 마음, 동기는 그렇지 않으니 그를 이해하고 받을 수 없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자기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그가 상대의 행동이 틀렸을 뿐 아니라 그의 생각도 틀렸고 그의 마음도 옳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선 일관성이 없는 태도라는 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그렇게 일관성 없는 태도를 취하는가? 왜 자신에게 적용하는 잣대를 다른 사람에게도 들여대지 않는가? 그것은 그들이 사탄의 미혹을 받아 어리석게 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가 어떤 사람을 부정하는 것은 깊이 들어가 보면 그들의 행동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우리의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나를 인정하고 나를 사랑하며 나를 항상 존중히 여긴다면 그리고 그의 태도야 어떻든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기만 하다면 우리는 그의 행위에 불구하고 그를 이해하고 용납할 것이다. 심지어 그의 많은 행동이 명백히 잘못된 것일지라도 우리 눈에는 그것이 별로 문제로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보고 있으며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혹 그의 행동이 객관적으로 보기에는 좋은 행동이 아닐지라도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으며 혹 그의 행동이 마음에 안 들더라도 그의 마음을 이해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행동을 받아주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지 않고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이미 내 마음이 그를 싫어하며 그에 대해 상해 있기 때문에 그의 행동과 그의 생각 심지어 그의 마음과 동기, 그의 본성조차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에게 결정적으로 속은 것이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12)

우리가 어떤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나도 내 부모에게는 귀한 자식이고 나를 아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오. 혹 내 행위가 마음에 안 들었다면 내 마음과 내 의도는 그렇지 않으니 그것만이라도 알아주시오'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그렇게 이해를 구하고 용납을 구할 때도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이중 잣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께 용납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남에게 대는 그 잣대를 가지고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에게 대해서도 외모의 잣대를 적용하고 남에게도 외모의 잣대를 들여대든지 아니면 자신과 남에게 다 같이 생명(중심)을 보고 판단하는 잣대를 적용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요구하신다. 내게는 은혜와 생명의 자(尺)를, 남에게는 외모의 자를 들여대서는 안된다.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2:9-13)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만일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외모로 취하실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이 잘나서 그리고 우리의 모든 행동이 다 옳고 선해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용납 받고 있는가? 결코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고 우리의 부모와 우리를 받아주는 자들이 오직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용납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래야 한다. 만일 우리가 사람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고 (즉 그들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점에도 본질적으로 귀하다고 여겨 또는 은혜의 정신으로) 용납하지 않고 그들의 외모(행위)만 보고 판단하며 정죄하고 거부한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그렇게 우리를 대하실 것이다.

물론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긍휼로 대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긍휼로 대하시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외모와 행위로 취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그렇게 대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따라 우리를 구원하기도 하고 심판하기도 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 안에 진정으로 하나님(아들)의 생명, 하나님의 정신이 있느냐 없느냐를 보시고 그것을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거나 심판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자는 긍휼의 심판(구원)을 받을 것이고 그것이 없는 자는 멸망한다.

만일 우리가 어떤 형제의 외모가 좋지 않고 그의 행위나 모양이 좀 좋지 않더라도 그의 약함과 무지함을 이해하며 그래도 그의 마음과 본성은 나와 같이 선할 것이라고 여기면서 그를 받아준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자이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 그 안에서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따라 사람을 가치를 매기며 용납하고 사랑하며 기다릴 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자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생명이 없는 자이다.


고린도교회의 일부 신자들이 바울을 인정하지 않고 거부한 것은 이처럼 그들이 바울의 중심, 바울의 생명과 사역을 보지 않고 그의 외모를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문제를 심화시킨 것은 그들에게 비교 대상이 있었다는 것 때문이다. 바울의 가르침과 행동은 고린도교회 안에 파고든 거짓 선생들 곧 유대교의 율법주의자들에 비해 덜 경건하고 덜 그럴듯하게 보였던 것이다. 외식에 능한 종교인은 진리만을 추구하는 참 하나님의 사람보다 더 그럴듯한 외모를 가질 수 있다. 외모를 추구하는 고린도인들의 그릇된 태도는 결국 이런 사탄의 올무에 걸려 넘어지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무릇 진리와 생명은 그 어떤 거짓 꾸밈(虛飾)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도리어 그것을 배격하고 그것을 월등히 넘어선다. 생명은 그 자체로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품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외모는 생명이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형식이고 가장 권위 있고 품위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사탄에게 속은 인생들은 그런 정상적이고 참된 외모를 거부하고 근거 없는 아름다움과 근거 없는 권위, 근거 없는 품위와 교양을 제멋대로 만들어놓고 거기에 맞추어 사람을 재단하고 평가하고 있다.

우리는 화장을 많이 하고 비싼 옷으로 치장을 한 늙은 여인보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아무 치장도 하지 않은 발가벗은 아기가 더 향기롭고 더 아름답다고 느낀다. 왜 그런가? 그것은 늙은 여인에게는 없는 것이 아기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은 생명이다. 생명의 충만이 바로 사람을 가장 아름답고 가장 품위 있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생명은 그 자체로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향기롭고 가장 품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이 있는 자는 아름답고 품위 있는 것이고 생명이 결여된 자는 추하고 더러운 것이다.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이것을 몰랐으므로 크게 잘못되었다.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 (바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차지만, 직접 대할 때에는 그는 약하고 말주변도 별것이 아니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후10:10)

그들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글은 권위 있는데 생김새와 말은 초라하고 권위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권위는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그들에게 있어서 사람의 권위는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겉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께서 사람의 겉과 속은 하나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마12:33-35)

이것은 무슨 말인가? 속이 좋은 사람은 겉도 좋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속이 좋은 바울을 겉이 안 좋다고 보았으니 그들은 사람의 속을 보지 못할 뿐 아니라 겉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이 본 겉은 가짜 겉이다. 사탄으로 인해 눈이 멀어 헛것을 본 것이다.

사람의 진정한 외모, 진정한 겉은 그의 '행실'이다. 여기서 말하는 행실이란 속에 있는 생명이 밖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것을 보지 못하고 사람이 입은 옷이나 인물, 말 재간(言辯)이나 지위, 재산 등과 같은 육체의 모양을 보는 것은 속을 보는 것도 아니고 겉을 보는 것도 아니고 허깨비를 보는 것이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생명으로 취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필요는 바로 우리 자신 안에 있다. 우리가 서로를 대할 때 사람을 그 생명대로 취하여 용납하며 귀히 여겨주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가 결국 서로 용납되지 못하고 서로 미워하고 정죄하며 서로 심판하는 저주의 상태에 빠지게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할 때 당하게 되는 가장 큰 손실은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직접 일하시지(생명을 공급하시지) 않고 바로 허물많고 외모가 좋지 않은 우리의 형제들을 사용하여 일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서로 육체의 껍데기만 보고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는 보지 못함으로써) 서로를 용납하지 않고 거부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을 누리지 못하는 가난한 자가 될 것이다.


또 하나 생각해야 할 사실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는 가운데서 교만해져서 은혜의 정신을 잃어버리므로 그렇게 된다는 사실이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갈4:13-17)

이 말씀은 갈라디아교회나 고린도교회나 초기 곧 복음을 갓 받아들이고 주의 생명을 감격적으로 누리기 시작한 그 무렵에는 그들이 결코 바울을 외모로 취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 그때는 그들 자신의 외모(행위)도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인물이 형편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이 죄와 무지와 저주로 인해 고통스럽고 형편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은혜를 많이 누림에 따라) 그들의 모양이 조금씩 좋아지자 시험에 빠진 것이다. 예수를 믿어서 어느 정도 세상 죄악의 때를 벗고 모양이 그럴듯하고 품위 있게 되었을 때 사탄이 그들에게 다가와서 "너희는 예수를 믿어서 충분히 아름답고 능하게 되었으니 이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너희 모양을 나타내어라. 너희 능력과 그 모양으로 행해라." "훌륭한 너희들이 못한 사람들과 왜 사귀며 왜 그들을 받아주려고 하느냐? 그러면 너희 품격이 낮아진다"고 속삭였고 그들이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받아들여 실패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섰다 생각할 때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오직 선 줄로 생각하는 자만이 넘어진다. 실제로 그리스도 안에 굳게 서 있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서 있지 못한 사람 중에서도 자기가 아직 서 있지 못한 어린아이임을 깨닫고 항상 조심하는 사람도 넘어지지 않는다. 오직 서 있지 못하면서 '선 줄로 생각하는' 만이 넘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교만한 생각'이다. 사람을 외모로 보는 사람은 멸망의 선봉인 '교만'에 빠진 것이다.

은혜를 오래 받은 사람, 은혜를 깊이 받은 사람은 그 모양이 분명히 처음보다 아름답고 좋아진다. 그것은 정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참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의 모양이 좋아짐과 동시에 그의 심령도 좋아진다. 그의 마음은 점점 더 겸손하고 온유하게 되며 자기의 현재의 모든 영광과 아름다운 변화는 오직 그리스도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고 더욱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자기의 죄와 무능과 악한 본성에 대해 더 절감하고 인간의 한계를 깨달아서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오직 은혜만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도 그와 같은 정신으로 대하며 그 어떤 죄인에 대해서라도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들 안에 자기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역사하기를 원할 뿐 아무 것도 판단하지 않으며 배척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의 심령이 이렇게 다듬어지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직 은혜를 제대로 받은 자가 아니며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 모든 외모는 실제로 아름답고 품위 있는 외모가 아니라 우리의 눈을 속여 헛된 교만을 불러일으키는 거짓 외모 곧 외식의 열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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