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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자랑

(고린도후서 10:12-18)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그러나 우리는 분량 밖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 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량 밖의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더 할수록 우리의 한계를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지기를 바라노라 이는 남의 한계 안에 예비한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경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우리는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들 축에 스스로를 끼어 넣거나 그들과 견주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네가 만든 척도로 자기네 스스로를 재고, 자기네가 세운 표준에다가 자기네 스스로를 견주어 보고 있으니,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는 마땅한 정도 이상으로 자랑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로 가서 선교한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하여 주신 한계 안에서 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분에게로 가지 못할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까지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은, 한계를 벗어나서 행동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제넘게 다른 사람들이 수고한 일을 가지고 자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의 믿음이 자라남을 따라 우리의 활동 범위가 여러분 가운데서 더 넓게 확장되어서 더욱 풍성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지역을 넘어서 복음을 전하려는 것이요, 남들이 자기네 지역에서 이미 이루어 놓은 일을 가지고 자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랑하려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자랑하여야 합니다 참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주께서 내세워 주시는 사람입니다 : 표준새번역)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거짓 무리들이 자기를 스스로 높여서 거짓되이 자랑하고 있다고 책망하면서 동시에 자신은 그런 거짓 자랑을 할 필요가 없는 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가 얻은 이름과 권위는 그가 소유한 생명 곧 그리스도의 생명 자체가 영광스럽고 권위 있는 생명이어서 얻은 것이지 자기를 억지로 높여서 얻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사역은 조금도 억지나 무리가 없이 오직 생명의 능력과 분량을 따라 이루어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자랑이 아니라 영광이며, 영광은 선전(declaration)과 증거(speaking)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랑이 아니라 생명과 능력 곧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생명을 소유하는 것이다.
생명 자체가 권세와 능력을 지니고 있어서 사람을 저절로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하는 것과 그것이 없이 자기를 스스로 높여서 없는 영광을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 간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오늘 우리는 무엇으로 자랑하며 무엇을 자랑하고 있는가?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 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고전3:18-23)

고린도전서 3장에서 바울은 육신의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에 대해 말했다. 그것은 그들이 자기의 지식과 지혜를 서로 비교하면서 자기를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져 있는 행동인지를 다음 말씀을 통해 잘 드러내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고전1:26-31)

이것은 고린도교회를 이루고 있는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결코 육신적으로 자기를 자랑할 형편이 못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왜 교회에는 약한 사람들이 많은가? 그런 사람들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여서 교회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유력하고 부유한 사람들은 자기 영광과 자기 일이 있기 때문에 굳이 예수를 믿고 교회로 들어올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곳이 본래 육신으로는 자랑할 것이 없는 자들의 모임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자기 육체를 신뢰하고 자랑하며 서로 다툰다는 것은 얼마나 사탄에게 깊이 속은 것인가!


바울은 사실 육체적으로도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우선 그는 누구보다 지식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고 귀했기 때문에 자기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자랑하지 않았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 (고전4:1-7)

바울은 주님을 알았고 그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자기의 실체를 알았다. 그래서 그는 누구에게도 자기를 자랑하지 않았다. 바울뿐 아니라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알고 그의 영광을 알면 사람을 자랑할 수 없게 된다. 그분 앞에 서면 우리는 아무 할 말이 없는 부끄러운 죄인으로서 그 영광의 빛으로 인해 엎드러져서 죽은 자처럼 될 것이다. 설사 우리에게 어떤 자랑할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 본래 우리 것이 아니요 주님으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자랑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 자신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주님으로 인해서는 자랑할 것이 많았다. 그것이 어리석고 터무니없는 일이 아니라고 했다.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고후12:6상)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 우리가 약한 것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 (고후11:18-3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고후12:1-5)

이 말씀 안에서 우리는 바울의 자랑거리를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그가 그리스도를 위해 겪은 수고와 고난이고 둘째는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곧 그가 겪은 신비한 은혜의 체험이다. 앞의 말씀은 첫째 자랑거리에 대해 말하고 있고 뒤의 말씀은 둘째 자랑거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것은 둘 다 자랑은 자랑이나 육신의 모양이나 육신의 능력에 대한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한 자랑이요 그로 인해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자랑이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를 자랑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자랑도 너무 많이 하기를 원치 않았다. 혹시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는 보지 못하고 바울만 보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고후12:6하)

그렇다. 사람이란 어리석고 눈이 어두워서 그리스도를 말해도 그것은 보지 못하고 말하는 사람만 보기 쉽고 주의 은혜와 영광을 말해도 그것은 보지 못하고 그것을 나타내는 사람의 외모만 보기 쉽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일지라도 자기가 크게 드러날 소지가 있으면 그것을 자제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사람들의 오해를 우려해서였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실체를 깊이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주님과 교회를 핍박한 죄인이었음을 잊지 않았고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원하되 몸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자임을 항상 잊지 않았다. 또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바리새인이요 율법에 충실한 사람이었지만 그것은 다 잊어버리고 오직 하나님이 자기를 불러 그리스도의 복된 생명을 전파하는 종으로 삼으신 것만 생각했다. 이러한 두 가지 이유로 그는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일에만 온 힘을 기울였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아들이지만 우리 자신으로는 여전히 죄와 허물로 점철된 연약한 죄인에 불과하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를 볼 뿐 아니라 여전히 죄와 연약함 가운데 있는 자기 육신의 실상도 항상 직시했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오해하지 않기를 바랬다. 그는 한편으로 위대한 사도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주님의 날에 있을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죄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의 이런 실상을 다 보기를 원했고 자기의 한쪽만 보고 그를 멸시하거나 그를 지나치게 생각하게 되지 않기를 바랬다.


문제는 언제나 '지나치게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은 항상 지나치기 쉽다. 지나치기 때문에 자랑도 지나치고 위축도 지나치다. 우리 중에 전혀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자랑할 것도 있지만 부끄러운 부분도 있는 것이다. 바울은 자기의 실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헛되이 자기를 자랑하지 않았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고후1:12) 이처럼 그의 자랑은 언제나 육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자랑이었다.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내가 하는 것을 또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의 그 기회를 끊어 저희로 하여금 그 자랑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와 같이 되게 하려 함이로라" (고후11:10,12) 그는 자기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육신의 영광이나 세상 영광으로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자랑하는 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가 자기를 비난하고 거부하는 자들이 있어도 끝까지 담대하게 사람들에게 나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자 한 것은 이런 자랑이 모든 사람들 안에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역을 수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은 바울 안에서 오직 그리스도만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 그를 약함 가운데 두었다. 그에게는 사역을 감당하는데 직접적인 지장을 주는 육신의 약함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답은 이러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12:9)

바울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자랑했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기 안에서 온전히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 자기를 부인했다. 그는 고난을 많이 받았고 환란을 많이 겪었다. 그러므로 그의 자랑은 모두 자기가 받은 고난으로 인해 자기 육신의 능력은 드러나지 못했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기 안에서 능력으로 훌륭히 역사하셨다는 것이었다. 그는 오직 십자가를 자랑했다. 그의 자랑은 육신의 영광이 아니라 죽음이었다. 이것이 바울이 자기 자신(육신)에 대해 죽는 날까지 견지한 태도였다.

그가 고린도교회나 갈라디아교회 안에서 육체의 영광을 나타내며 육체로 헛된 자랑을 하는 사람들에게 말한 다음의 말씀은 이러한 그의 태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6:13,14)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갈6:3,4)
(어떤 사람들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무엇이 된 것처럼 생각하면, 그는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각 사람은 자기 행실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자기에게는 자랑거리가 있더라도, 남에게까지 자랑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 : 표준새번역)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로 인해 우리가 거룩한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참으로 영광스럽고 자랑스럽게 느낀다. 때로 우리는 이러한 자랑을 밖으로 표현하고 싶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우리의 우리 된 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붙잡고 있음으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무엇이 된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에게 붙잡혀 있음으로 인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여전히 그대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을 자랑하면 그것은 곧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서도 된 줄로 생각하는 것이며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

하나님께 자랑하는 것은 좋다. 하나님께 자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밖에 없으므로 감히 하나님께 '내가 잘났습니다' 하고 자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을 향해 자랑할 때는 하나님(성령, 하나님의 생명)과 우리 자신(육신)이 일체가 되어 밖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으므로 우리의 자랑이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인지 자신을 자랑하는 것인지 불분명하게 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 ....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약3:1-15)
( ..... 여러분의 마음 속에 지독한 시기심과 파당심이 있거든 여러분은 헛되이 자랑하지 말고, 진리를 거슬러 속이지 마십시오. 이것은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가 아니라, 세속적이고 육욕적이고 악마적인 것입니다 : 표준새번역)

우리 성경에 시기와 다툼으로 번역된 단어는 영어성경(NIV)에서 '시기심'과 '이기적 야망'(selfish ambition)으로 번역되고 있다. 다툼은 이기적 야망 곧 육체를 나타내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렇게 번역된 것 같다. 육체의 자랑은 언제나 시기와 다툼을 불러일으킬 뿐 사람을 결코 참으로 영광스럽게 만들지 못한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다투며 갈라지는 것은 언제나 육체를 자랑하고 나타내려는 마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이런 마음이 들 때 우리는 이것이 우리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사탄이 우리 안에 심은 거짓말이요 망상임을 깨닫고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야고보도 인생의 헛된 야망과 헛된 자랑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약4:13-16)

세상 상식으로 볼 때 우리가 오늘이나 내일 아무 도시에 가서 일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고 삶의 행복과 영광을 얻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생활이고 일이지 무슨 죄를 짓는 것이나 망상을 품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상식적이고 일상적인 일들을 허무하게 보시며 그런 생각과 계획들을 망상으로 보신다. 왜? 우리의 일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길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진리를 추구하는 데 있지 생존을 위해 온 마음과 힘을 다 쏟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당연한 듯이 먹고 마시고 그것을 위해 돈을 버는 데 인생을 다 투자하고 그것이 성취되면 인생이 성공한 듯이 자랑한다. 이것은 다 교만한 것이며 헛된 자랑이다.


자랑은 곧 실제를 넘어서서 말하는 것이다. 자랑스럽든지 부끄럽든지 인생은 인생일 뿐이다.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진실한 삶은 사람이 자기 위치를 알고 그대로 말하며 그대로 행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흙이면 흙으로서 내게 뿌려진 씨를 받아서 열매를 맺으면 된다. 그것이 유일한 길이고 그것이 바로 진실한 삶이다. 흙이 자기에게 뿌려지는 씨를 거부하며 "안돼. 나는 너를 받아들일 수 없어. 나는 대단한 존재이기 때문에 너보다 나은 것을 원한다"고 말한다면 흙은 자기 위치를 벗어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만이며 헛되이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의 길을 우리에게 주실 때 우리는 내가 마땅히 그를 받아들여야 하며 그의 십자가를 져야 할 자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며 영광이다. 이것을 거부하거나 넘어서고자 한다면 우리는 실제(진리)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5:37 ;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 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 표준새번역) 이 말씀 역시 오직 실제대로(진리 안에서) 행하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길과 다른 길을 계획하며 다른 길로 가는 것은 진리를 거스르는 것이며 이것은 곧 자기를 헛되이 높여 헛된 자랑을 하는 것이며 사탄의 거짓말에 빠진 것이다.

거짓 무리에 미혹된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의 실제를 넘어서서 헛되이 경건하고 헛되이 영광스럽고자 하는 유혹에 빠졌다. 아들의 생명이 있으면 경건과 영광과 자랑도 있는 것이고 없으면 그것들도 다 없는 것이다. 생명에서 경건과 영광이 나오는 것이지 경건의 모양에서 생명과 영광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들이 생명이 부족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운 자라면 그대로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옳다 옳다 아니다 아니다'라는 원칙에서 벗어나면 안된다. 옳은 것이 가장 좋지만 만일 옳지 않으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진실한 것이다.

생명이 부족해서 싸움과 분열이 일어났으면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더 깊이 추구해야지 그렇지 않고 유대교 안에 있는 거짓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자기를 포장하고 그것으로 자기를 높이며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을 기만하고 사탄을 이롭게 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말하되 ....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행5:34-36)

가말리엘이 말한 대로 실제가 없이 즉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광과 권세와 능력이 없이 스스를 높여서 자랑하는 것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 물론 어떤 때 참 생명도 세상에 금방 그 영광을 드러나지 못하고 오해와 멸시를 받는 경우도 있다. 주님 자신이 바로 그러했다. 그러나 그는 곧 하나님에 의해 만유의 주로 세움을 입었다. 그의 생명의 능력이 그를 저절로 높인 것이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마11:19)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눅7:35)

여기서 지혜는 생명을 가리킨다. 지혜는 '학생'이 아니라 '자녀'로 인해 옳다 함을 얻는다. 즉 그리스도의 생명은 우리가 자기를 스스로 높이고 지식으로 사람들을 설득하고 감동시켜서 그 생명됨(영광과 권세)을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자녀(행함) 곧 '생명으로 맺은 열매'(생명의 결실)에 의해 그 영광과 권세를 인정받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인정(認定)과 영광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거나 사람들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난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맺은 생명의 결실로 인해 세상 안에서도 영광과 권세를 얻을 것이며 나중에 하나님으로부터도 옳다 인정함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헛된 자랑과 그것의 동기가 되는 망상 곧 헛된 야망과 헛된 생각들을 다 버리고 그리스도가 품으셨던 그 생각을 품고 그가 자랑한 것만 자랑하며 그가 누렸던 그 영광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 주님은 오직 아버지만 자랑했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우리의 자랑은 오직 그리스도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생명의 분량대로 말하며, 실제대로 말해야 한다. 우리 자신은 변한 것이 없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그 아들의 생명으로 놀라우신 일을 하셨으니 우리는 그것만을 말해야 한다. 그것이 참된 자랑이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엎드리며 그 말씀에 순종하자. 헛되이 자기를 높이며 자기 생각을 높이지 말고 성령이 이끄는대로 걸어가자. 그것만이 우리를 빛나게 하고 우리 인생을 영광스럽게 만들 것이다. 사탄이 주는 거짓말과 망상과 헛된 자랑에 현혹되지 말고 잠시도 그런 것에 우리 마음을 맡기지 말자. 주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온전히 지배하도록 주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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