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그리스도의 신부의 순결

(고린도후서 11:2,3)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바울은 여기서 우리를 한 남편에게 신부로 드려지기 위해 택정된 여자 곧 '정혼한 처녀'로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비유가 아니라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실제로 말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드려지기 위해 택정(擇定)된 예비 신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다시 데리러 오실 때까지 자신을 진리와 생명의 말씀으로 깨끗케 하여 나중에 주님 앞에 섰을 때 흠이나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사람으로 설 수 있어야 한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엡5:25-27,32)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육체가 되는 것 같이 그리스도도 그의 택하신 백성들과 생명 안에서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참 아들의 자리에 이르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심을 받은 자신의 영광스러운 신분을 깨닫고 자신을 주님께 드려야 하며 그에게 합당한 자가 되기까지 정결함과 아름다움으로 단장되고 준비되어야 한다.

바울뿐 아니라 요한도 우리가 주님의 신부임을 증거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요3:29)

주님은 우리를 신부로 부르기 위해 오셨다. 나중에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부름 받은 우리는 실제로 그의 신부로 드려지게 될 것이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계21:2,9)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건축된 거룩한 성 새예루살렘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 신부요 하나님이 거하실 영원한 거처(집)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에 되어질 일이요 지금은 다만 땅에서 주님을 기다리며 그를 위해 단장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사실을 다 기억해야 한다. 장차 우리는 그리스도와 완전히 연합되어 그와 함께 천국에서 살게 될 것이지만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와 따로 거하고 있다.(고후5:6) 장차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것이지만 지금은 그와 정혼한 처녀의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위해 자신을 지켜 순결을 유지해야 하고 그의 기쁨을 위해 자신을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단장해야 한다.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 말한 후 곧 이어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라고 말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직면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문제는 사탄이 우리가 주님께 드려지도록 단장되는 것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주님과 연합하는 것을 몹시 싫어하여 온갖 방법으로 우리의 신부 수업과 신부 단장을 방해한다.


사탄은 주로 어떤 방법을 사용하는가? 어떤 방법으로 우리가 주님께 드려지지 못하도록 하는가?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우리의 타락한 육적 본성을 자극하는 것이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을 섬기기에 적합한 영광스러운 존재로 지음 받았지만 타락 후에 영이 죽음으로써 몸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로 쓰이지 못하고 생존과 육신의 영광(쾌락)을 위해 움직이는 하나의 동물처럼 되고 말았다. 이것은 사탄이 사람을 정복했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거의 완전히 (하나님께 대해) 무용지물로 만들어놓은 것이며 거의 죽도록 쓰러뜨려 놓은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이제 가만히 놓아두면 전혀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지경에 떨어졌다.

사탄은 이러한 그의 옛 승리를 바탕으로 마치 고지를 점령한 자처럼 우위(優位)를 가지고 사람을 그의 뜻대로 지배하려고 한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1:13,14) 시험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험은 사실상 사람 자신이 불러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탄은 오직 유혹을 할 수 있을 뿐 억지로 사람을 죄와 사망으로 끌고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마귀는 사람에게 어떤 제안(유혹)을 할 수 있을 따름인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사람이 욕심이 없어서 마귀의 제안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전혀 사람을 지배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마귀는 당연히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사람(육신)에게 욕심이 없거나 영이 강력하게 살아서 몸의 욕구를 완전히 지배할 수 있다면 사탄은 사람을 전혀 시험할 수 없으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이 그렇지 못하므로 마귀가 얼마든지 사람들을 속이며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신자들도 마찬가지로 시험한다. 신자도 육체를 가진 사람인고로 그의 타락한 본성(정욕)을 자극하면 먹혀들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그들은 주님께 거룩한 신부로 드려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적극적으로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육신의 정욕에 매여 자신을 주님께 합당한 자로 드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탄의 목표는 우리가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지(통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며 몸을 성령의 지배 아래 두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 정욕의 종, 죄의 종으로 남아 주님께 합당치 못한 존재가 되고 결국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는 멸망의 코스대로 가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탄의 이러한 시험과 공격에 대해서 알고 있고 그 바탕이 되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과 죄성, 정욕에 대해 이미 상당히 경계하고 있기 때문에 마귀는 쉽게 신자들을 공격하여 쓰러뜨리지 못한다. 신자들은 이미 그리스도를 알고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마귀는 틈을 얻지 못하면 그들을 그의 거짓말로 넘어뜨리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항상 신자들에게서 틈을 노린다.

언제가 틈인가? 주로 사람들이 배부르고 편안할 때 곧 육체가 만족하여 아무 생각 없이 있을 때가 바로 그 틈이다. 마귀는 별 생각 없이 마음을 풀고 있는 신자들에게 다가가서 하나의 생각을 툭 던진다. 그것은 교묘한 거짓말이지만 그럴듯한 모양으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별로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기 쉽다. 이때 사람이 그 생각을 받아들이면 그는 진리의 말씀에서 멀어지고 마귀의 뜻대로 끌려가게 된다.

사탄은 이처럼 언제나 우리에게 무언가 '거짓된 생각'을 주입하려고 한다. 그러한 생각은 사람의 마음을 복잡하고 혼잡스럽게 만든다. 생각이 허망하고 복잡하게 되면 결국 우리는 주님과 멀어지게 된다. 역사적으로 마귀의 시험은 많은 사람들에게 먹혀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사탄의 거짓말에 홀려서 주님과 멀어지고 더 이상 주님을 따르지 못하게 되었다.

주님과의 결혼(연합)이나 이혼(분리)은 눈으로 보이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현상으로만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가 실제로는 주님과 분리되고 마귀의 뜻대로 끌려가면서도 스스로는 주님과 연합되어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늘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항상 주님과 우리의 실질적 관계를 확인하고 점검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주님과의 이혼, 주님과 그 진리에서 멀어지고 방황하게 되는 것은 사람의 마음 속에 마귀가 그 거짓말과 망상을 주입하면서부터이다. 마음과 진리는 서로 상관관계에 있어서 마음(생각)이 단순하면 진리 안에 견고히 거할 수 있고 또한 진리(말씀) 안에 견고히 거하면 마음(생각)이 단순하고 평안하게 된다. 따라서 어떤 이유로든지 마음에 헛된 생각이 들어와서 마음과 생각이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게(허망하게) 되면 진리에서 떠나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지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주님과 우리의 관계, 형제와 우리의 관계가 연합이 유지되고 더 강화되느냐 아니면 다툼과 분리라 치닫느냐 하는 것 역시 마음 문제 또는 생각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부부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이혼은 어디서 나오는가? 많은 경우에 이혼은 아내(남편)가 그의 남편(아내)을 다른 남자(여자)와 비교하는데서 출발한다. 남자라고는 자기 남편만 보여야 하는데 다른 남자가 눈에 들어오게 되면 그 둘을 비교하게 되고 비교하면 남편의 약점과 문제점, 없는 것이 발견되면서 불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 남자가 한 사람만 있다면 물론 당연히 음행이나 이혼이 생기지 않겠지만 많은 남자가 있다 하더라도 내 눈(마음)에 오직 남편만 남자로 보인다면(존재한다면) 음행이나 이혼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게 되고 그들을 바라보게 됨으로써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이 문제의 핵심은 아내(남편)의 '생각 속에' 어떤 변화(눈이 열림)가 생겼다는 것이다.

물론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서 남편(아내)과 비교하게 되는 일 없이도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즉 남편(아내)이 갑자기 혹은 점차 좋지 않은 사람으로 변하여 아내(남편)를 못살게 군다면 당연히 그를 싫어하게 되고 다른 데로 눈을 돌릴 수 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이야기에서 파트너는 주님이므로 (그는 과오나 잘못이 없는 분이므로) 그 점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주님에게서 마음이 떠나게 되는 것은 그분이 변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내가 변해서 그런 것이다. 내 속에 한 생각이 들어오고 그것이 내 눈을 엉뚱한 데로 돌리게 만듦으로써 주님에게서 매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이란 무서운 것이다. 사탄이 우리 마음에 갑자기 어떤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쏘고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전에 좋게 생각하던 사람도 갑자기 싫어지고 미워짐을 느낀다. 싫어지면 싫은 것이다.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 사람이 아무리 많은 장점과 매력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우리에게 매력으로 작용하지 못하며 그저 미울 따름이다.

누가 우리에게 "왜 A를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A에게 이러저러한 좋은 점과 이러저러한 매력적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왜 B를 싫어하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B에게는 이러저러한 좋지 않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A는 좋아하고 B는 싫어하는 참된 이유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신다. 우리가 댄 이유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나는 A를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은 같은 이유로 A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또 반대로 나는 B를 싫어하지만 다른 사람은 같은 이유로(같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B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그 사람의 절대적 연고로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주관적 생각(마음)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전적으로 장점만 가지고 있거나 전적으로 단점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좋은 면도 있고 좋지 않은 면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사람은 (심지어 같은 이유로) 열렬하게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열렬하게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그가 절대적으로 좋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단지 그에게서 좋은 면을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그에게 사랑할만한 좋은 면이 전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없는 것'과 '좋지 않은 면'을 주로 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좋은 사람'은 내가 그를 좋게 보기 때문에 좋은 것이고 '싫은 사람'은 내가 그를 좋지 않게 보기 때문에 싫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눈과 생각이 이렇게 주관적이고 선험적(先驗的)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결코 그렇게 객관적이거나 경험적이거나 과학적이지 않은 것이다. 우리 생각에는 우리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평가하는 것 같지만 실은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우리 안에 어떤 생각(마음)이 작용하고 있고 그것에 따라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틀어지면 아무리 장점을 많이 가진 사람이라도 우리는 그의 그 장점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없는 것만 보게 된다. 그래서 결국 우리 눈에는 그가 못나고 좋지 않은 사람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다시 말하지만 '그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그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의 장점과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볼 수 없고 따라서 그는 좋지 않은 사람이 되고 만다. 마음에 미움이 들어오면 심지어 그의 존재 자체가 싫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와 어떤 존재간에 관계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생각'(눈)이다. 어디에도 완벽한 자는 없는데 우리는 왜 어떤 사람을 그토록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그토록 싫어하는가? 왜 우리는 같은 사람을 어떤 때에는 그렇게 미치도록 좋아하고 어떤 때는 그토록 싫어하게 되는가? 그것은 우리 마음에 사물을 그렇게 보고 느끼도록 만드는 '어떤 생각'이 요동쳤기 때문이다.

많은 생각은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다. 하나님도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어떤 생각(진리를 깨닫게 하심)을 불어넣으신다. 그리고 마귀도 악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어떤 생각(거짓말과 망상)을 불어넣는다. 우리의 생각은 이런 외부적 바람으로 말미암아 격동하고 요동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뿐 아니라 마귀도 그의 거짓말로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고 우리를 그의 길로 끌고 갈 수 있음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주님을 대할 때나 형제를 대할 때 우리는 그가 참 아름답고 영광스러우며 사랑스럽다는 느낌을 가진다. 이것은 성령으로부터 온 참된 생각이다. 형제를 볼 때 사랑스럽고 귀하다고 느끼는 이 생각이야말로 생명의 정상적인 반응인 것이다. 성령의 감동을 입은 우리의 영은 주님과 형제들의 아름다운 생명과 인격을 대할 때 그런 감정을 우리 안에 자연스럽게 형성시킨다. 그러나 마귀는 그때 우리 마음 속에 그러한 생명의 정상적인 반응(생각)에 대적하여 '다른 생각' 곧 주님을 두려워하거나 거북하게 여기는 마음과 형제를 선악으로 판단하려는 마음을 우리 안에 주입하려고 한다.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면 우리 안에는 갑자기 주님이 멀리 느껴지고 형제들이 싫어지게 되는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형제들에 대해 우려하던 것이 바로 이런 '밖에서 주입된 생각'이었다. 마귀는 거짓 선생들을 통해서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하나의 생각을 불어넣었고 그 결과 그들 눈에 갑자기 바울이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비친 것이다. 전에 그토록 존경스럽고 권위 있게 보이던 사람이 갑자기 권위가 의심스러운 초라한 사람으로 느껴지게 된 것이다. 사탄이 심은 하나의 생각으로 인해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사람을 생명과 인격으로 보는 이전의 눈을 잃어버리고 사람을 외모를 따라 판단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고 만 것이다.

거짓된 생각이 들어오면 우리는 다 이렇게 된다. 여러분들은 종종 이런 생각들의 공격을 받지 않는가? 사실 우리도 이미 이런 공격을 많이 받았고 그 결과 우리의 생각 역시 부분적으로 진리에서 많이 멀어져 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여러분의 눈이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 여러분에게 닥치는 모든 일들을 다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가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면 된다. 여러분 속에 어떤 형제가 싫기 때문에 그 사람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다면 이미 여러분은 사탄의 공격을 받아서 마음이 허무하고 복잡하게 된 것이다.


붉은 장미를 볼 때 우리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것은 그 색이 강렬하게 붉기 때문이다. 즉 붉은 장미는 붉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다. 우리는 붉은 색은 붉은 색대로 아름답고 흰색은 흰색대로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런데 누가 와서 우리 안에 '붉은 것이 싫다' 라는 생각을 주입해 버리면 우리는 그 순간부터 붉은 장미가 싫어지게 된다. 이유는 오직 그것이 붉기 때문이다. 그때 누가 와서 "이 장미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당신은 어제까지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아무리 말해도 우리는 그것이 여전히 보기 싫게 될 것이다.

만물의 가치는 누가 밖에서 부여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그 존재 자체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붉은 것은 붉을 따름이지 좋고 나쁨이 없다. 누가 와서 그것을 좋다 하면 좋은 것이고 안 좋다 하면 안 좋은 것이다. 눈이 밝고 정상적인 사람 곧 하나님이 만물을 보는 시각대로 보는 사람은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지으신 후 보시고 심히 좋다고 하신 것처럼) "참 좋다" 할 것이고 그렇지 않고 사탄이 심은 생각대로 사물을 정함없이 판단하는 사람은 "안 좋다"고 하든지 아니면 어느 때는 좋다 하다가 어느 때는 안 좋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만물은 그대로 있는 것이다. 붉은 장미는 붉은 장미대로 아름답게 있는 것이고 흰 장미는 흰 장미대로 아름답게 거기 있는 것이다.

우리는 생명(사람)을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생명(성령)의 느낌대로 느끼고 판단해야지 밖에 들어오는 '다른 생각'을 받아들여서 정함없이 이리저리 느껴서는 안된다. 사람을 볼 때 선악의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여 좋다 안 좋다 하는 것은 본래 사람의 생각 곧 정상적인 생명의 느낌이 아니다. 하나님의 시각은 이 사람은 이래서 좋고 저 사람은 저래서 좋은 것이다. 붉은 장미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흰 장미와 분홍색 장미도 아름다운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치와 바울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 안에 있는 생명과 진리가 변치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 형제들이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끝까지 사랑하고 순종하며 연합하기 원했다면 그들은 변함 없이 생명을 누렸을 것이고 그로 인해 그리스도의 신부로 아름답게 단장되며 풍성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밖에서 들어온 생각이 그들을 복잡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그들은 부패하고 가난하게 되고 말았다.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 곧 단순한 마음, 단순한 믿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허무한 생각, 근거없는 욕심과 망상이 얼마나 많은 신자들을 넘어뜨리고 방황하게 만드는지 모른다.


조그마한 가게를 하던 부부가 성실하게 노력한 나머지 성공하여 큰 유통업체를 운영하게 되었다. 그들은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둘 다 중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으므로 회사를 운영하는데 지식의 부족을 느꼈다. 그래서 남편은 검정고시를 거쳐서 대학을 들어가고 나중에 대학원도 졸업했다. 그런데 그동안 아내는 그대로 있었으므로 수준 차이가 나게 되었다. 그래서 남편은 차츰 무식한 아내에게 거리감을 느끼고 멸시하게 되었고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게 되었다. 아내 역시 그러한 남편에게 분노를 느끼고 서로 다투게 되다가 결국은 이혼하고 말았다.

아내는 중학생인 아들을 데리고 나와서 옛날처럼 조그마한 가게를 하면서 어렵게 생활하였다. 그런데 아들이 공부보다는 장사에 더 취미를 가지고 대학갈 생각도 않고 장사에 종사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며 그 일에 재미를 붙이자 어머니는 '네 아버지도 나를 배신하더니 너마저 나를 배신하느냐' 하고 계속 닦달을 한 결과 결국 그 아들은 '나중에 돈 벌어서 어머니 모시러 오겠습니다' 하고는 집을 나가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사람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어옴으로써 그 생각이 허무하게 되자 연합은 깨어지고 삶은 곤고하고 가난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사탄은 공부를 많이 하여 유식하게 된 남편의 마음에 역사했다. 그는 계속 그에게 속삭이기를 "너는 이제 어제의 네가 아니다. 너는 똑똑하고 격조 높은 사람인데 네 아내는 여전히 시골뜨기에 불과하다. 그녀는 네 수준에 맞지 않다. 말이 안 통하지 않느냐?" 하면서 그의 마음과 생각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어오기 전까지, 즉 그의 마음이 단순할 때는 아내는 참 좋은 여자였다.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헌신적이며 밥도 잘 짓고 아이도 잘 키우는,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훌륭한 부인이었다. 그는 중학교만 나온 아내와도 얼마든지 행복하고 재미있게 살았다. 남편이 그 아내를 사랑한 것은 그녀가 만능이어서가 아니라 그녀의 좋은 면을 보고 그것을 누렸기 때문이다. 그에게도 약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장점들은 지금도 어디 가지 않았고 그대로 있다. 그녀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그러므로 여전히 좋은 아내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편의 마음에 한 '다른 생각'이 들어왔다. 그러자 그의 눈에 아내의 약점과 없는 것들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제 그의 마음에는 아내가 너무나 많은 부족함과 약점들을 가진 좋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다는 생각이 가득하게 되었다.

문제는 무엇인가? 문제는 그녀에게 무엇이 있고 없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마음이 헛되이 높아지고 복잡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에 그가 충분히 누렸고 그것으로 행복을 느꼈던 그녀의 좋은 점, 아니 그녀의 존재 자체의 가치가 이제 더 이상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그녀에게 없는 것, 그녀의 부족한 것만 눈에 들어오게 되는 그 시각(視覺)의 변화가 바로 문제인 것이다. 사람은 이렇게 망해 가는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인해 행복과 안식을 잃고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사탄은 또한 그 부인의 마음 속에도 역사했다. 그는 남편이 전에는 자기를 사랑하다가 유식하고 높아지게 됨으로 인해 마음이 교만해져서 자기를 거부하는 것을 겪고서도 그 마음 속에 지식(학벌)과 물질, 세상 지위와 명예를 추구하는 마음을 똑 같이 추구하고 그것을 그 아들에게 쏟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서 망상에 빠진 것이다. 왜 자기에게 생명이 안되는 것을 아들에게 적용하려고 하는가? 아들이 게으름뱅이가 되거나 악한 자가 된다면 그것은 수용하지 말아야 하지만 대학은 안 가더라도 열심히 일해서 훌륭한 상인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수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생각이 허망하게 됨으로 인해 아들이 집에서 나갈 수밖에 없을 지경까지 공부하라고 몰아치고 닦달하게 된 것이다.

주님에게서 멀어지고 세상과 우상과 이단에 빠지는 우리의 영적 이혼, 영적 파탄도 다 이런 식으로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무한 생각으로부터 우리 마음을 지킴으로써 우리 마음이 진리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실 인류는 처음부터 이 일에 실패했다. 아담과 하와는 사탄이 주입한 거짓된 생각에 속아서 하나님을 거스르고 타락했다. 그들의 실패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하와의 실패가 하나님의 말씀과 뱀의 말을 비교하는 데서 왔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단순하고 명료하게 말씀하셨다. 동산의 모든 나무 실과를 다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다. 이것은 어려운 말이 아니고 모호한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오직 하나님 자신을 의지하고 그를 생명으로 삼아 살라는 것이다. 주 예수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자신을 매우 단순하고 분명하게 제시하셨다. 그는 자신을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소개하셨고 또한 (아버지께로 가는) 문이며 (가지들이 마땅히 붙어 있어야 할) 나무이며 우리가 먹고 마심으로써 생명을 얻을 양식으로 자신을 소개하셨다. 그러므로 자기를 믿으며 자기에게 단단히 붙어 있으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유일한 삶(영생)의 길이라는 것이다.

바울 역시 그리스도를 그렇게 증거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남편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붙어 있으며 그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생명을 얻고 만족하게 된다고 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의 주가 되며 우리의 구원과 생명이 되는지 그 과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참이고 실제라는 사실은 안다. 그러면 된 것이다. 그러면 그를 믿을 수 있으며 그를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의 길인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간단하고 분명한가!

그러나 고린도교회에 들어온 거짓 선생들은 예수를 이처럼 간단하고 단순하게 증거하지 않고 복잡하고 혼잡스럽게 증거했다. 그것은 결국 바울이 증거한 그 예수, 그 복음이 아니라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이었다. 그 결과 고린도교회 신자들은 그 마음과 생각이 복잡해져서 그리스도를 향하는 단순함에서 떠나 미혹되고 부패하게 되었다.

마귀는 언제나 복잡한 말을 하며 그것으로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복잡하게 만든다. 앞에서 말했듯이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단순하게 생명과는 먹고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탄은 복잡한 말로 하와의 생각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는 뭐라고 말했는가?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뱀을 통해 마귀가 하와에게 한 이 질문은 그 자체가 벌써 복잡한 것이다. 선악과를 먹으라고 유혹하려면 "하나님이 너희더러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고 묻든지 아니면 "선악과를 먹어라"고 말하면 될 것인데 그것이 아니고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고 말한 것은 마귀의 시험이 얼마나 사람의 정신을 빼놓기에 좋은 복잡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본래 진리는 단순하고 거짓말은 복잡하다. 생명나무 안에는 그리스도의 생명 한 가지밖에 없다. 그러나 사망을 포함하고 있는 선악과 속에는 선악의 온갖 지식이 들어 있어서 사람을 복잡하게 만든다. 이것을 먹으면 사람은 단순함에서 떠나 복잡한 사람이 된다.

생각이 많고 계획이 많으면 우리는 한 가지 일을 충실하게 할 수 없고 그 결과 우리는 만족하고 행복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하게 지으셨다. 한 남편이신 그리스도께 우리의 마음을 두고 그와 사랑을 나눌 때 우리 인생은 행복하고 만족하게 되도록 지음 받은 것이다. 그러나 마귀는 이것을 깨려고 우리를 속인다. 마귀는 언제나 우리에게 다가와서 "너는 어찌 그리 눈이 좁으냐? 어찌 그리 답답하고 어둡냐? 허구한날 허물 많은 네 남편만 보고 있느냐 다른 사람들도 좀 쳐다봐라. 네 남편은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지 않느냐? 네 남편은 이것도 안 해주고 저것도 안 해주지 않느냐?" 하고 속삭이며 우리의 눈을 넓히고 우리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려고 애를 쓴다.

우리는 여기에 미혹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눈이 남편이신 그리스도의 한계를 벗어나 밝아지고 넓어지는 날에 우리는 바로 불행해질 것이다. 잠언 기자와 시편 기자는 우리가 허망한 생각을 버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한계와 구역을 사랑하며 누리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임을 일깨워준다.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같고 아름다운 암노루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戀慕)하라 내 아들아 어찌하여 음녀를 연모하겠으며 어찌하여 이방 계집의 가슴을 안겠느냐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 앞에 있나니 그가 그 모든 길을 평탄케 하시느니라" (잠5:15-21)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시16:5,6)

우리의 참된 삶의 터전, 우리의 우물, 우리의 샘, 우리의 구역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셨다. 그리고 그로 우리 인생이 만족을 얻도록 정하셨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의 분깃이며 우리의 유업이며 우리의 구역이다. 그러므로 다른 것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그를 바라보며 그를 누려야 한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동산이 더없이 완전하고 좋았지만 마귀가 자기들에게 와서 주입한 거짓되고 허무한 생각을 받아들임으로써 실패했다. 그들은 마귀의 말을 듣고 생각이 복잡해져서 고민하다가 결국 선악과를 먹었고 그로 인해 그들의 눈이 밝아지고 열려졌다. 그러나 그 밝아진 눈, 그 열려진 눈은 인류로 하여금 생명의 길을 버리고 멸망의 길로 방황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밥과 돌을 둘 다 양식으로 보는 '너무 넓은 눈'을 가지게 됨으로 인해 밥만 먹지 않고 돌도 함께 씹은 꼴이 되었다. 그들의 밝아진 눈은 그들에게 결코 복이 되지 않았고 도리어 그들로 죽는 날까지 허탄한 망상을 좇아 이리저리 방황하게 만들고 말았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마6:22,23)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한 분만 보는 눈이 아니라면 차라리 소경이 되는 편이 낫다. 그러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나 할 것이고 적어도 죽도록 방황하지는 않을 것이니까. 우리의 에덴 동산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우리의 주님이요 남편이요 생명이요 만유(모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이 단순하여 오직 그리스도와 그가 이루신 십자가의 역사와 그 산물인 교회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해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의 분깃이요 우리의 유일한 터전(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그 마음을 허망하고 허탄한 생각으로부터 지키려면 마음을 그리스도와 진리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허무하고 허탄한 말들을 듣지 말아야 한다. 듣지 않을 뿐 아니라 옮기지도 말아야 한다.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딤전1:3-7)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나타내기 위해서 또는 아는 것이 있어서 입이 가려우므로 자기 말이 생명이 되는 말인지 아닌지를 생각지 않고 그 아는 것을 마구 말하며 가르치며 옮긴다. 그들은 그러한 말과 생각이 마귀에게서 온 죽음의 병균인 것을 알지 못한다. 무릇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아니한 모든 생각과 사상은 그것을 전하는 자와 듣는 자가 다 해를 입게 되는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듣고자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4:3,4)
가려운 귀, 이것이 바로 어느 시대에나 문제의 가장 큰 원인이다. 육신의 즐거움을 위해 육신이 좋아할만한 말을 구하는 이 가려운 귀가 바로 모든 허탄한 말과 마귀의 거짓말을 교회로 끌어들이는 요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무하고 경솔한 입도 조심해야 하지만 특히 가려운 귀를 조심해야 한다. 가려운 귀는 틀림없이 '다른 말'(생각)을 해주는 입(거짓 선생)을 불러온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과 귀 그리고 입은 오직 참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향한 단순함으로 철저히 닫혀 있어야 한다.

우리의 눈과 귀가 단순하고 순결하면 우리의 마음과 생각도 단순하며 순결해질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얻은 이 생명의 구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이 영광스러운 연합(결혼)을 놓치지 않게 될 것이다. 주님이 우리의 눈과 귀, 우리의 마음에 은혜를 베푸시기를 바란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9 사탄에게 속음 (고후11:14,15) / 2002.1.6 이상봉 2010.05.02 3610
38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사탄 (고후11:13-15) / 2001.12.23 이상봉 2010.05.02 6569
37 그리스도께로 중매함 (고후11:2) / 2001.12.16 이상봉 2010.05.02 4107
» 그리스도의 신부의 순결 (고후11:2,3) / 2001.12.9 이상봉 2010.05.02 3963
35 우리의 자랑 (고후10:12-18) / 2001.12. 2 이상봉 2010.05.02 4227
34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마음 (고후10:4-6) / 2001.11.25 이상봉 2010.05.02 4898
33 우리의 싸움 우리의 무기 (고후10:3-6) / 2001.11.18 이상봉 2010.05.02 4459
32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음 (고후10:1-18) / 2001.11.11 이상봉 2010.05.02 3786
31 사람의 참된 일 (고후8:16-24, 9:1-15) / 2001.11.4 이상봉 2010.05.02 3559
30 형제를 섬기는 원칙 (고후8:9-15, 9:3-8) / 2001.10.28 이상봉 2010.05.02 3574
29 헌신 (고후8:1-15) / 2001.10.21 이상봉 2010.05.02 3903
28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3) (고후7:5-16) / 2001.10.14 이상봉 2010.05.02 4072
27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2) (고후7:10) / 2001.10.7 이상봉 2010.05.02 3422
26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1) (고후7:5-16) / 2001.9.30 이상봉 2010.05.02 3618
25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태도 (고후6:14-7:1) / 2001.9.23 이상봉 2010.05.02 3954
24 세상과 멍에를 같이 하지 않음 (고후6:3-7:4) / 2001.9.16 이상봉 2010.05.02 3373
23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음 (2) (고후6:1,2) / 2001.9.9 이상봉 2010.05.02 3385
22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음 (1) (고후5:18-6:2) / 2001.9.2 이상봉 2010.05.02 3845
21 그리스도 안에 새 피조물 (고후5:17) / 2001.8.26 이상봉 2010.05.02 3557
20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음 (2) (고후5:14-17) / 2001.8.19 이상봉 2010.05.02 3892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