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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도움 (고린도후서 1:15-24)

2010.05.02 18:02

이상봉 조회 수:3944

참된 도움

(고린도후서 1:15-24 )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보내줌으로 유대로 가기를 경영하였으니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나는 여러분에게 들러서 마케도니아로 갔다가 마케도니아에서 다시 여러분에게로 가서 여러분의 도움을 받아서 유대로 갈 작정이었습니다. 내가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이 변덕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또는 내가 육신의 생각으로 계획을 세우면서 아니오, 아니오 하려는 속셈이면서도 예, 예 했던 것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예 하면서 동시에 아니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성령님의 인도를 좇아 하는 사람이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2-24)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바울은 설사 하나님이 자기를 죽음의 자리로 부르신다 할지라도 그대로 좇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겠다고 했다가 가지 않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한 것은 결코 사사로운 자기 생각이나 감정에 따라 한 것이 아니요 성령님의 인도를 좇아 그렇게 한 것이다.

만일 바울이 성령께서 고린도로 가라고 명하셨을 때 '예'(그렇게 하겠다) 라고 해 놓고 나중에 자기 사정으로 '아니오'(그렇게 하지 않겠다) 라고 했다면 그는 육체를 좇아 경솔하게 행동한 것이다. 만일 그가 고린도교회를 방문하려는 계획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으면서(그런 인도를 받지 않았으면서) 인간적인 책략으로(고린도교회 형제들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척 하기 위해서) 그들을 방문할 것이라고 말했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요 사기꾼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계획을 변경한 것은 그가 경솔하게 행동해서도 아니요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요 오직 성령님의 인도 자체가 그렇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고린도교회에 대한 성령님의 인도가 보다 구체적이고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처음 고린도 방문을 계획할 무렵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했고 따라서 그 방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때까지 그가 가지고 있던 지식(판단)을 따라 고린도 방문을 결정했던 것이다. 그렇게 한 것 역시 당시로서는 최선을 다해 성령의 인도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디도 편에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전해듣고 그들의 상황을 알게 된 후, 그리고 계속 그들을 지켜보는 가운데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이 서둘러 고린도교회를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직접적인 손길에 그들을 좀더 맡겨놓고 지켜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부득이 계획을 변경한 것이다.

이전에 바울이 소아시아 지방을 떠나 고린도가 속해 있는 유럽지역으로 온 것도 역시 성령의 인도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행16:6-10)

처음에 바울은 소아시아 지역에서 계속 복음을 전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 역시 그때까지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판단을 종합하여 성령님께 묻고 확인하여 결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계획을 실행하면서 소아시아의 한 지역을 지나갈 때 그는 성령님께서 그의 길을 막는 것을 느꼈다. 성령님은 그 날 밤에 환상을 통해 확실하게 그의 계획을 변경하도록 인도하셨다. 그래서 그는 즉각 자기 계획을 바꾸어 소아시아 지역을 떠나 유럽의 마게도니아 지역으로 갔던 것이다.

바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주 예수님 역시 그렇게 행동하셨다. "이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요7:1-10)

주님은 유대인의 명절이 가까웠을 때 그의 동생들이 '자기를 사람들에게 나타내려는 사람이 왜 이런 촌구석에서 숨어지내시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당신을 나타내시오' 라고 말했을 때 그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그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으셨다. 그러나 동생들이 올라간 후 주님은 곧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주님의 이런 행동은 사람이 보기에 일관성 없고 변덕스러운 것처럼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아무 것도 임의로 행동하지 않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나님의 때와 방법)를 따라 행동하는 분이었므로 자존심이나 체면, 사람의 눈을 개의치 않고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움직이셨다.

유감스러운 것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전혀 다르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주님이나 바울처럼 성령님의 인도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가? 사람들이 성령님의 인도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주로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육신의 저항 곧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몸을 바치는 일에 육신이 게으름과 두려움, 고생을 피하려는 마음으로 인해 저항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자존심과 체면, 사람의 영광(평가)을 추구하는 마음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떤 것을 하라고 명하실 때 사람들은 일단 모른 채 하고 그것을 외면함으로써 불순종한다. 일단 피하고 보거나 미루고 보자는 식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강권에 못 이겨 억지로 순종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어떤 사정으로 그 계획을 변경하여 갑자기 그것을 하지 말라고 하시든지 혹은 다른 어떤 일을 하라고 요구하시면 그때는 그 하던 일을 멈추려 하지 않는 것으로 불순종을 하게 된다. 즉 자기가 하던 일을 계속하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존심과 체면 때문이다. 이미 일을 벌여놓았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다 알려져 있는데 그것을 취소하면 체면이 구겨지고 이상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이 두 종류의 불순종적 마음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첫째로 육신의 안일 곧 육신대로 편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과 두려워하는 마음을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둘째로 자존심과 사람을 의식하는 마음, 사람의 칭찬과 영광과 인정을 구하는 마음을 극복해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형제들을 참으로 섬기는 길이 무엇인지 성령 안에서 확실하게 깨달은 이상 오해를 받더라도 계획을 변경하여 고린도교회를 즉시 방문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봉사의 일을 수행할 때 이런 자세로 일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획은 왜 바뀌는가? 성령님은 왜 그의 계획을 변경하심으로 그의 종들로 하여금 오해를 받게 만드시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변덕을 부리시는 분이거나 무계획적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상대방 곧 사람의 형편과 사정이 일정하지 않고 계속 바뀌기 때문이다. 일에는 상대가 있는 법이다. 하나님 혼자 일하신다면 사람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아무 상관없을 것이지만 구원은 혼자 일이 아니고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을 안하려면 모르지만 일을 하려면 부득이 사람의 형편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으며 사람의 형편에 따라 일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인 것처럼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인 것처럼, 그리고 율법 있는 자에게는 율법 있는 자처럼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했다. 왜 그렇게 했는가? 사람을 구원하려니까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의 사정이 성령님으로 그리고 바울로 하여금 그렇게 계획을 변경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뀌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대로 있다. 그러나 그것을 성취해 나가는 방법에 있어서 하나님은 사람의 형편에 따라 적절하게 그 방법을 바꾸어가며 일하신다. 하나님의 종인 우리도 그러한 하나님의 보조에 맞추어야 한다. 내 자존심과 품위, 체면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뻣뻣하게 하다가 그르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성령님께서 즉시 고린도교회를 방문하려고 한 바울의 계획을 변경시키고 그것을 일단 유보시키신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내 마음은 하나님이 아십니다. 하나님을 증인으로 모시고 나는 지금 이 말을 합니다. 내가 아직 고린도에 가지 않은 것은 여러분을 아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믿음을 지배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이 기쁨을 누리게 하려고 일하는 여러분의 동역자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믿음 위에 튼튼히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즉각적으로 방문하지 않으려고 한 것은 지금은 그들과 만날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만나는 것보다 만나지 않는 것이 더 유익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만나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바울인 자신이 그때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여 형제들과 만만다면 그들과 생명 안에서의 교제를 통해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고 생명을 풍성케 하기보다는 그들의 처리되지 못한 죄와 바울에 대한 의심, 그리고 그것을 사주하는 거짓 선생들과의 마찰 등으로 인해 서로 마음이 상하게 되고 슬픔만 가중될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지금은 가서 만날 때가 아니며 만나서 직접 가르치거나 징계를 하기보다는 멀리서 편지로 혹은 기도로 그들과의 교통을 유지하며 그 나머지 직접적인 문제 해결은 성령님의 직접적인 역사에 맡기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많은 경우에 곁에서 직접 형제를 돕는 것도 시험을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만 어떤 때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 다만 기도로 돕거나 혹은 단지 말씀 진리를 증거하는 것을 통해 시험 당한 자를 돕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부딪히고 씨름하게 만들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영적 싸움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문제 해결 역시 스스로 해야 한다. 형식적인 일의 주체는 우리 자신이다.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 영(생명)을 장악하고 실제적으로 일의 주체가 되신다. 그 밖의 모든 사람은 다 돕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 사도든 목자든 선생이든 어디까지나 돕는 자일 뿐 믿음의 주체는 아니다. 바울은 자신이 형제들의 믿음을 돕는 자가 되기를 원했지 그들의 믿음을 주장하고 주관하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리스도인의 많은 문제는 영적 지식의 결여에서 온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고 마귀를 모르고 자기를 모르고 인생을 모르는데서 시험과 실패가 온 것이다. 영적 지식은 성경 지식만으로는 갖추어지지 않고 오직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서만 갖추어진다. 영적 지식의 결여는 대개 실제적인 체험의 부족에서 온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섬기려면 오랜 시간동안 실제로 주님을 따라가면서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한다. 전쟁에 능한 장수가 되려면 산전수전을 다 겪어보아야 하듯이 마귀의 각종 교묘한 시험에 걸리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일에 규모를 갖추어 성숙하게 되려면 말씀을 듣고 그것을 깊이 체험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누가 대행해 줄 수 없는 것이다. 곁에 누가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서 모든 것을 일일이 가르치고 지도한다고 영적 실력이 붙는 것은 아니다. 옆의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만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결국에는 본인이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체험해 보아야 믿음 위에 굳게 설 수 있다. 모든 영적 진리는 수없는 삶의 체험을 통해서만 참으로 자기 것이 될 수 있다.

물론 이런 체험은 영적 생명이 있는 사람이라야 가능하다. 생명이 거의 없다시피 한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믿음의 연단이 아니라 싸움에 져서 죽고 말게 될 것이다. 면역은 어느 정도 체력이 있는 사람에게만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 형제들의 형편은 어떠했는가? 바울은 고린도교회 형제들이 그 정도의 체력(생명, 믿음)은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

그러므로 그는 고린도를 직접 방문하지 않고 성령님께 그들을 맡기기로 했다. 그들은 적어도 믿음의 연단을 위한 체험을 가질 수준은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 안에 생긴 각종 문제를 바울의 직접적인 책망과 지도를 통해 시정하고 극복할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살아 계시며 항상 역사하시는 주의 영을 의지함으로써 스스로 극복해야 했다. 성령의 도우심과 주님의 승리를 의지하여 친히 마귀를 대적함으로써 모든 시험을 이겨야만 했다. 믿음의 싸움은 누가 대신할 수 없고 언제나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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