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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안에 있는 사람

(고린도후서 1:21)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튼튼히 서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를 자기의 것이라는 표로 인을 치시고, 그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삼위일체로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 자연스럽게 설명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부르시고, 우리에게 성령으로 기름을 부으시고 인(印)치시고 그로 인해 우리의 끝을 보증(保證)하심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는 분이시다.

둘째,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설 자리요 앉을 자리이며 걸어가야 할 길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안식하며 그 안에서 싸우며 그 안에서 행한다.

셋째, 성령님은 우리의 [돕는 분]이다. 그는 우리의 인도자요 선생이시다. 그리하여 우리인생이 승리로 끝나도록 보증하신다. 그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우리로 항상 그리스도를 찾게 하시며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며 믿음으로 그를 누리게 하신다. 그는 우리로 장차 그리스도와 완전한 연합을 누릴 소망을 가지고 현재의 환난 속에서도 담대하고 기뻐하며 살게 만드신다.
바울은 오늘 여기서 성령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지난 주에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먼저 우리의 생명이요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다 이루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다음으로 우리는 우리를 그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는 분이신 성령님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는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고 인침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서 있는 것이다. 성령으로 인해 우리 안에는 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죽었던 우리 영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리고 그 영이 우리 생각과 몸을 지배하는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바울은 자기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에 속한 사람이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고린도교회 형제들도 그렇게 되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고린도서를 기록한 목적이다. 영이 육신을 지배하는 사람, 이것이 바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이러한 [영에 속한 사람] 또는 [영에 속한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오늘 이러한 영에 속한 삶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는 신약 그리스도인들이 체험하는 영적 체험의 예표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심을 받아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까지 겪었던 여러 체험들 곧 유월절(고전5:7)을 지낸 것, 애굽에서의 탈출한 것(고전10:1,2), 홍해를 건넌 것, 광야에서의 방랑한 것(히3:7-19),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인 만나를 먹고 바위에서 나오는 물을 마신 것(고전10:3,4) 등의 모든 체험들이 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이 성령 안에서 누리고 있는 체험의 예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체험 뿐 아니라 가나안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린 삶 역시 신약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오늘날 체험하고 있는 영적 체험의 예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애굽 생활도 아니고 광야 생활도 아닌 가나안에서의 생활 곧 풍요롭고 복된 땅에서의 일하고 누리고 살아가는 삶 역시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적 체험을 예표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또는 그리스도의 안식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쓰는 자가 아니요 이미 그 안에 들어와 있으며 그를 누리고 있는 자이다. 이런 자리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 더 깊이 누리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획득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고 일하고 싸우는 것을 더욱 확고하게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이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붙잡는 일에 대해서도 처음 주님께 나올 때와 같이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항상 주의하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그 자리가 우리의 주된 자리는 아니며 그래서도 안된다. 우리 삶의 중심 내용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와 후서를 기록할 때 이스라엘의 역사를 염두에 두고 기록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말할 때 고전 5:7에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월절이라고 말했고 고전 10장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 곧 하늘에 속한 만나를 먹고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를 마시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고린도교회 형제들의 삶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인도되어 나와 광야에서 방랑 생활을 하고 있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이것이 당시 고린도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이며 또한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실제 상황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상적이고 온전한 삶이 아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정상적인 하나님의 백성의 삶은 가나안에서의 삶이다.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은 아직 가나안에 들어와 있지 못하며 그것은 장차 죽은 후에나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혹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현재 가나안에 들어와 있는 양 말한다. 즉 땅의 세계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하늘에 속한 세계에 대해 말하며,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하늘에 속한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 자신이 반드시 하늘에 속해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은 여전히 애굽이나 광야에 속해 있으면서도 말은 가나안에 대해 말하고 있다. 땅에 속한 사람도 하늘에 속한 것에 대해 말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는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에 들어와 있지 못한 것이다.

여기서 애굽이나 광야 또는 땅의 세계라고 말한 것은 다 육신적 세계, 혼적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즉 육신적 정욕과 혼적 감각(감정)에 좌우되는 삶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나안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와 반대되는 세계 곧 영적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육신에 좌우되지 않고 영에 좌우되는 상태이다.

고린도전서와 후서의 차이는 무엇인가? 고린도전서는 육신적 신자들 또는 혼적 신자들에 대해 주로 말한 것이고 고린도후서는 영적 신자에 대해 주로 말한 것이다. 육신적 신자란 고린도교회 신자들이고 영적 신자란 바울을 가리킨다. 바울은 고전 3장에서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영적이지 못하고 육신적이라고 했다. 영적인 사람은 육을 따라서 행하거나 혼적인 감정을 따라 움직이지 않고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고 있는 자기의 영을 따라 움직인다. 바울은 고린도 형제들이 영적인 세계에 들어와 있으며 그들 역시 그런 것들에 대해 많이 말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육신적으로 그런 것들을 다루며 혼적으로 그런 것들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영적이지 않고 육신적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면서 거의 전적으로 영적인 사람의 실상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으며 또 혹 어느 정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성령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보다 더 드문 것은 자기 속에서 자기의 참 생명이 되고 있는 영적 생명에 대해 알고 그 영의 지배를 받아 사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령을 좇아 사는 삶'의 실상이다.

하나님의 창조 안으로 회복된 참 사람은 육신적인 사람도, 혼적인 사람도 아니고 영적인 사람이다. 즉 몸이 충동적이고 근거 없는 동물적 감정이나 사탄의 말을 듣지 않고 영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다.

구약 시대에 있었던 성전에는 바깥 뜰과 성소가 있었고 그 안에 지성소가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지성소에만 임재하고 계셨다. 바깥 뜰과 성소도 필요한 곳이었지만 하나님이 계신 바로 그 장소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려면 지성소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러나 백성들이 죄로 인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었기 때문에 대제사장만 일 년에 단 한 번 잠깐 들어갔다가 제물의 피를 뿌리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주 예수님이 그 백성의 죄를 담당하고 죽으신 후에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 곧 백성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담(휘장)이 무너지게 되었을 때 비로소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앞으로 바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바깥 뜰과 성소는 사람의 몸과 혼에 해당하는 것이고 지성소는 영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영에 거하신다. 그것을 성전으로 즉 성령의 전으로 삼으시고 거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육신적 생명에 주의하지 말고 오직 우리의 영의 생명에 주의해야 한다.

애굽에 있을 때도 이스라엘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이고 광야에 있을 때도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참으로 있어야 장소는 애굽이나 광야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지성소 안에서 사는 삶을 살아야 하며 가나안에서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에 못 미치는 삶은 불완전한 삶이다. 하나님은 육신적인 사람들에게 정상적인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누리게 하실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들을 하나님의 의도대로 복되고 완전한 하늘의 삶으로 이끌 수 있는 방도가 없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 곧 영을 좇지 않고 육신대로, 혼적인 생명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런 사람들의 육신을 치시고 혼을 괴롭게 만드심으로써 그들로 그 자리에서 벗어나 영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는 애굽에 있을 수밖에 없었고 광야에 머물 수밖에 없었고 또한 바깥 뜰과 성소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십자가 안에서 죽고 다시 살게 하심으로써 가나안으로 들어오게 하셨고 또한 지성소 안으로 들어오게 하셨으므로 거기 머물러야 한다. 즉 영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는 전적으로 영에 속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바울은 지성소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요 가나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있을 때 몸이 편치 않다든지 마음이 편치 않다는 말을 하지 않고 영이 편치 않다는 말을 했다. 고후2:13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여기서 '내 심령이 편치 못했다'는 말은 원문에 '내 영에 안식이 없었다'는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는 범사에 육신의 반응을 보지 않고 오직 영의 반응을 살피는 사람이었다. 성령님이 거하시는 처소는 영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고후1:9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모든 삶에서 자기를 의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삶을 육체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살려고 했고(고후1:12) 또한 범사에 영의 인도를 따라 행하려고 했던 것이다. 성령과 우리 영은 우리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 영의 느낌은 성령의 인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의 감각에 따라 사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바울은 환경이나 그것에 반응하여 떠오르는 육신적 생각이나 느낌에 주의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자기 속에 있는 영만을 주의했다. 만일 우리가 기쁘다면 영 안에서 기뻐야 한다. 영은 슬퍼하는데 몸이 편하고 쾌락이 만족됨으로써 기쁘다면 그 기쁨은 거짓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슬프다면 영 안에서 슬퍼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슬픔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슬퍼하고 그것에 따라 자기 영이 슬퍼하기 때문이 아니라 육신이 괴롭고 감정이 슬프기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영에 따라 반응하고 영에 따라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겉 사람(육신, 혼)은 괴로워서 울더라도 속 사람(영)은 담대하고 담담하거나 심지어 기뻐하는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겉 사람의 느낌에 따라 반응하지 않고 속 사람의 느낌에 따라 반응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익숙하도록 배워야 한다. 겉 사람의 반응에 따라 모든 일에 반응하여 화 내거나 슬퍼할 일 일도 아닌데 화 내거나 슬퍼한다든지, 좋아할 일도 아닌데 좋아하는 것은 다 사탄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자로 지음 받은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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