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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에게 속지 않음

(고린도후서 2:1-11)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면 나의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
(내가 너희의 죄 때문에 너희를 책망하고 근심하게 하였으니 너희가 회개함으로 나를 기쁘게 해야지 누가 하겠느냐?)

문맥상 자연스럽게 되려면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하면 너희를 근심하게 한 나밖에 너희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겠느냐?"고 해야 할 터이나 바울은 부자연스럽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고 내가 너희를 근심케 했지만 너희가 나를 기쁘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뉘우칠 사람은 근심케 한 사람이 아니라 근심할 일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실제보다 형식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누가 우리를 좋다하고 칭찬하면 기뻐하고, 좋지 않다 하며 비난하거나 책망하면 슬퍼하며 괴로워한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는 다른 사람의 말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실상이 다른 사람의 판단과 일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실상이 사람들의 말과 일치하면 우리는 그 말로 인해 기뻐하거나 슬퍼할 수 있다. 그러나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우리의 실상이 마치 사람의 말이나 평가에 달려 있는 것처럼 행동하곤 한다. 그래서 누가 우리를 칭찬하면 자기의 실상이 실제로는 칭찬 받을만한 것이 되지 못해도 스스로 만족하고, 반대로 누가 우리를 비난하거나 책망하면 괴로워하고 근심한다. 더 나아가서 그가 우리를 그렇게 근심케 한 것으로 인해 그가 우리에게 무슨 피해나 손해라도 끼친 것처럼 그 사람을 원망하며 싫어한다.

사실은 그 사람이 우리를 근심케 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그 잘못된 실상, 곧 우리의 잘못된 행동과 잘못된 위치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위기로 몰아넣은 것이며 우리 마음이 평안을 잃고 근심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원망할 것은 우리를 근심케 한 상대방이 아니라 근심할 거리를 지니고 있는 우리 자신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언제나 실제를 중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실제이지 형식이 아니다. 실제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이며 어떤 상태냐 하는 것이고 형식이란 누가 그것을 드러내느냐 혹은 어떤 모양으로 드러내느냐 하는 것이다. 누가 우리에게 "당신에게 이런 문제가 있다"고 말해주면 우리는 "당신이 왜 내게 기분 나쁘게 그런 말을 하느냐" 한다든지 혹은 "왜 좀더 친절하고 부드럽게 말하지 않고 딱딱하고 강하게 말하느냐" 라고 하지 말고 먼저 우리 생명 안에서 이미 그 문제에 대해 어떤 느낌이 있지는 않았는지 즉 우리 영 안에서 성령께서 이미 그 문제에 대해 지적하고 책망하시지는 않았는지를 살펴야 한다. 이것이 영에 속한 사람의 정상적인 반응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실제만 보면 된다. 형식은 좋은 형식이면 더 좋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영과 우리의 실제에 무슨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형식으로든지 우리의 실제가 드러나고 그것이 올바르게 될 수 있는 계기를 얻는다면 우리는 기뻐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고린도교회 형제들의 죄를 폭로하고 책망하여 그들로 근심케 하고 괴롭게 했지만 그래서 미안하다든지 혹은 자기가 그들에게 너무 지나쳤다든지 하는 말을 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가 나의 가르침을 받은 자로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로서 마땅히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또한 나를 기쁘게 해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하고 마음 아프게 만들었으니 빨리 회개하고 진리의 길로 돌아와서 너희를 염려하는 하나님과 나를 기쁘게 해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형제를 사랑한다면 만일 어떤 형제가 진리에서 떠나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본다면 이러한 바울과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한다. 그리고 형제가 진리 안에서 행하며 승리하는 것을 볼 때는 세상의 어떤 다른 좋은 일을 보는 것보다 더 기뻐해야 한다. 요한은 이 점에 있어서 바울처럼 분명했다.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3,4) "내가 두어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요삼9,10)

그는 형제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면 칭찬하고 기뻐하며 그렇지 않으면 사정없이 그들의 실상을 폭로하고 책망하며 징계했다. 이것이 사람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이며 또한 교회를 사랑하고 온전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유일한 태도이다.


다음 문제는 범죄한 형제가 회개하고 돌이켰을 때 그를 용서하는 것에 대한 문제이다.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여러분이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용서합니다. 내가 용서한 경우가 있으면, 내가 용서한 것은 그리스도 앞에서 여러분을 위하여 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탄에게 이용당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책략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주의하는 두 가지 원칙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 앞에서]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탄의 간계를 의식하여 그에게 속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바울은 먼저 고린도교회의 범죄자가 하나님 앞에서만 아니라 바울 자신과 고린도교회 형제 모두에게 피해를 끼쳤으며 범죄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무리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그래서 그는 만일 그 범죄자가 징계를 받고 회개하는 상태에 있다면 바울 자신도 그를 용서하지만 고린도교회 형제들도 그를 용서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 지금 용서를 해야 하느냐 하면 때를 놓쳐서 혹 그 범죄자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겨버리면(삼키우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범죄자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겨버리면 안되는가? 교회에 말썽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을 괴롭게 만든 범죄자 한 사람이 근심에 잠겨서 낙심하면 무슨 큰 일이라도 나는가? 바울의 답은 바로 "그렇다"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왜 범죄자 한 사람이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적절히 대응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그 이유를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사실에 기초하여 말하고 있다. 첫째는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서 행하는 자 곧 그리스도의 대리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동은 곧 하나님의 아들의 행동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택하시고 구원하시며 다루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마음과 태도를 우리 안에서 항상 견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 우리의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자가 아니다.

바울이 자신에게 범죄한 자를 용서한 것은 고린도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고린도교회에 생명의 유익을 주는 일이 되기 때문에 자기 개인에게는 어떠하든지 그를 용서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감정이나 입장과 상관없이 형제의 유익을 위해 행동한 것이다. 이것은 곧 그가 자기대로 행동하지 않고 그리스도 앞에서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다.

바울은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를 오해하여 대적하고 계속 자기를 괴롭게 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만일 중심에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진리를 위해서 그런 일을 하고 있다면 그는 기꺼이 그를 용서하고 형제로 영접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무지하고 우매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바울처럼 그리스도 앞에서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일에 나를 생각하고 나를 중심에 놓지 말고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 분을 중심에 놓아야 한다. 범사에 그리스도 앞에서 행해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의 마땅한 자세요 또한 그리스도의 기쁨이 곧 우리의 기쁨이라는 우리의 실제를 놓고 볼 때 그런 태도야말로 궁극적으로 우리를 참된 만족과 평안으로 이끌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형제가 지금 현재는 나와 거리가 있더라도 그가 그리스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만 된다면 결국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와도 잘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바울은 여기서 또한 사탄을 의식하여 형제를 용서하라는 말을 하고 있다. 사탄에게 속지 않도록 하라는 것은 죄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정신을 넘어서는 지나친 행동이 있으면 그것이 사탄에게 조롱거리와 올무가 된다는 것이다.

마귀는 믿지 않는 자는 믿지 못하게 하고, 믿게 된 자는 생명의 속박이 아닌 율법의 속박을 지움으로써 지나치게 무거운 짐으로 낙심하여 주님을 따라가지 못하게 만든다. 마귀는 범죄자에 대해서는 일단 죄의식을 가지지 못하도록 방해함으로써 그가 회개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일단 죄의식을 가지게 된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지나치게 그것(죄의식, 죄책)에 눌려 낙심하도록 만들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 용서를 받고 새 생명을 얻어 죄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을 끝까지 용서하지 않고 냉담하게 대하거나 기어이 책벌하려는 태도를 취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사탄의 궤계에 빠진 것이다. 죄를 묵인하거나 방임하고 또한 죄인을 옳다하거나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라 합당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며 사탄의 궤계에 빠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회개하는 죄인을 끝까지 용서하지 않는 것도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라 합당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사탄의 궤계에 빠진 것이다.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범죄자는 고린도전서 5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 중죄인이다. 그는 너무나도 절망적인 범죄를 태연히 저질렀기 때문에 보통의 책망과 징계로는 돌이킬 가망이 없어서, 바울은 그의 육신은 사탄에게 내어주고 영혼만이라도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대상이다. 즉 여기 범죄자는 그의 육신적 삶은 하나님의 징계로 돌이킬 수 없는 환난 가운데 처하게 되고 그것을 계기로 하여 그의 영혼이라도 각성하게 되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역사가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한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그에게 임한 중징계는 그 사람 자신을 위해서 뿐 아니라 그가 속해 있던 고린도교회 신자들 곧 그런 중한 범죄를 보고도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가만히 놔둔 고린도교회 신자들을 각성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시행된 것이기도 했다.

더구나 그는 바울이 이 문제로 인해 고린도교회 형제들에게 (고린도전서를 통해) 그 사람을 책망하고 징계하라고 명한 것에 불만을 품고 바울을 대신하여 그들에게로 갔던 디모데를 멸시하고 그의 권위에 대항하여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한 자로 간주되고 있다. 또 그는 디모데와 바울 외에 바울의 권고와 책망에 따라 자기를 징계한 고린도교회 형제들에게도 반감을 가지고 형제들에게 대항한 자로 간주되고 있다.

그런데도 이런 중한 죄인을 다룸에 있어서도 바울은 결코 자기 감정대로나 혹은 정해진 법대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신과 그리스도의 생명대로 대하고 있으며 고린도교회 형제들에게도 그렇게 하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한 개인을 생각하거나 한 교회만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며 마귀의 도성이 어떻게 서고 무너지는가를 생각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우리 감정대로 행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서지 못하고 마귀의 나라가 견고하게 서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죄를 그리스도 밖에서 용서하거나 그리스도 밖에서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허물어지고 마귀의 도성이 서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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