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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건을 벗고 거울처럼 주님을 반사함

( 고린도후서 3:18-4:6 )

우리는 지난 주에 오늘 신약 그리스도인들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달리 수건을 벗은 얼굴로 즉 어떤 장애물이나 불완전한 틀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을 직접 대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그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안에서도 생생하게 비칠 수 있게 되었음을 생각하였다. 수건을 쓰면 얼굴과 얼굴이 물리적으로 가까이 마주 대하고 있어도 실제로는 같이 있는 느낌을 가지지 못한다. 수건이 두 존재의 접촉을 막기 때문이다.

수건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과 사람의 접촉을 가리는 모든 장애물, 모든 거리낌, 모든 불완전한 틀을 의미하는 이 수건은 바로 육체와 종교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대해 죄로 인해 죽었으므로(창2:17, 6:3) 하나님은 사람에게 무엇을 말하거나 보이려고 하실 때 언제나 육신에 속한 것으로 비유하고 적용하여 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람이 (영이 아니고) 육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떠난 인류는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과 말이 안 통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모든 것을 오직 동물처럼 육신적인 것으로밖에 느끼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무엇을 말하고 보이려고 하든지 오직 육신적으로만 표현해야 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천국의 복에 대해서 즉 하나님의 생명(세계) 안에서 누리는 생명의 복에 대해 말하려고 하실 때에도 하나님은 그것을 오직 땅의 복 즉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장수하는 것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이 없음으로 인한 인간의 저주와 멸망 즉 영혼의 공허와 고통의 상태에 대해 말하려고 할 때도 오직 육체가 전쟁이나 질병, 가난 등을 통해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또 하나의 수건이 따라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바로 종교다. 종교란 하나님의 세계를 육신에 속한 인간의 감각으로 체험케 하는 방식이다. 영에 대해 먹통인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원 계획을 보이고 그것을 붙잡고 누리게 만드는 방법은 오직 그것을 육신적 방법으로 제시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건물과 의식과 장치들과 제도와 조직과 법을 만들어 사람들로 그것을 붙잡고 지키게 하신 것이다.

종교 안에서는 해석도 긴 말도 필요 없다. 오직 정해진 계율을 지키면 된다. 그의 마음이 어떠하든지 문제가 아니고 중요한 것은 외형 즉 나타나는 행동이다.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안식일을 지키고 때마다 기도를 드리고 성경을 읽고 정해진 선행을 하고 금지된 일을 하지 않고.... 이것이 바로 종교이다.

아쉬운 시절에 이런 것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이런 틀이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완전한 길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이런 종교적인 틀이 있어서 우리로 주님을 온전하게 누리지 못하도록 막고 있지는 않은지 항상 살펴야 한다.

여기 있는 우리 대부분은 기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전에 교회에 다닐 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종교적 관습과 전통, 종교적 관념에 깊이 젖게 되었다. 그것이 때로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 주님께 온전히 나아가는데 방해를 가져온다. 바울은 자신이 전에는 자기가 바리새인이었다는 사실 곧 율법과 유대 종교에 익숙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지만 그리스도를 한참 따라가다 보니 그것이 육신적 자랑거리는 될지언정 실제로 주님을 따르는데는 도리어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고백했다.(빌3:4-8)

겉으로 보면 종교는 분명히 사람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제도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가 오기 전까지 소용되는 것이다. 완전한 것이 오면 불완전한 것은 사라져야 한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만 자유함과 완전함이 있다. 전문가가 오기 전까지 할 수 없이 임시로 어떤 일을 보고 있는 사람은 전문가가 오면 즉시 물러나야 한다. 그가 끝까지 자리를 고수하면 일을 망치고 만다. 종교는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성령께서 임하기 전까지 임시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지 그것 자체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참 길이 아니다.

생명이 왔음에도 종교를 계속 고수하는 자들은 언제나 성령을 훼방하고 생명의 역사를 가로막는 역할을 해 왔다. 주님을 사형에 처한 자들은 로마 정부가 아니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었고 루터와 종교 개혁자들을 핍박한 자들은 세상 정부가 아니라 로마 천주교회였다. 심지어 어떤 때는 우리 자신이 우리를 핍박하고 훼방하기도 한다. 즉 종교에 젖은 우리가 영 안에 있는 우리를 억압하여 우리로 주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라는 수건을 벗어야 한다.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3:14)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3:18)

바울은 여기서 우리에게 '신약 그리스도인에게 적합한 이미지는 수건이 아니라 거울이다' 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수건을 벗고 주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종교적 관념이나 전통, 육체적 연약함의 의한 우매함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완전하게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다.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그는 이 일을 위해 부르심 받았고 이것을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건을 벗고 영 안에서 주님을 따라야 한다.

거울을 보는 것처럼 주님을 보는 것은 수건으로 가린 채로 주님을 보는 것보다는 훨씬 선명하고 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지금 우리가 주님을 보는 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나중에 거울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처럼 주님을 보게 될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13:9-12)
여기 12절을 표준새번역에서는 "지금은 우리가 거울 속에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라고 번역하고 있다. 고대의 거울은 구리판을 갈아서 평평하게 해 놓은 것이므로 아무리 광이 나게 잘 만들었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거울과 같이 사물을 잘 비추지 못한다. 지금 우리가 영 안에서 주님을 접하는 것은 완전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육체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한 가운데서 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완전한 주님과의 만남을 소망하고 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장차 나타날 영광은 정말로 크고 완전한 것이다.

우리가 이 육신을 벗고 주님이 입으신 변화되고 완전한 육신을 입게 될 때 우리는 영의 인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완전히 영이 되어 주님을 그 영광스러운 실제대로 접하고 교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영이 된다는 것은 귀신처럼 육체가 없는 존재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성질상 육신적 사람이 아니라 완전히 영에 속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육체와 영이 따로 노는 불완전한 상태의 현재의 인간 존재를 육신 또는 육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반대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처럼 영과 혼과 몸의 전 인간 존재가 완전히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한 상태의 인간 존재를 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로마서 1:4에서 바울은 주님에 대해 말할 때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주님이 영으로 부활하셨다고 한 것이 바로 지금 말한 것과 같은 뜻으로 말한 것이다.
우리가 이처럼 영에 속한 사람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영이라고 불릴 수 있는 영광의 몸을 입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아무 제한 없이 완전히 대면하고 자유롭게 교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날을 참으로 소망하며 기다린다. 거룩한 영적 인물인 사도 요한조차도 육신을 입은 동안은 그리스도를 있는 그대로 대면할 수 없었다.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을 때 환상 중에 주님을 만났는데 주님이 자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에게 나타내시자 그는 쓰러져 죽은 자와 같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지금 주님을 영 안에서 만나고 교통하지만 나중에는 주님과 생명 안에서 완전히 하나로 연합하여 아무 거리낌이나 간격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완전한 연합과 교제의 특권은 어느 날 갑자기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미리 부르시고 영화롭게 하신 자들 곧 지금 주의 영 안에서 그의 영광을 보고 그를 따르며 그의 형상으로 변해 가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이 약속과 소망을 가진 자들이다.

만일 지금 우리가 육신에 속한 자여서 오직 눈에 보이는 세상 영광만 바라보고 그것만 좇아가는 자라면 우리는 시간이 지나도 주님을 알지 못하며 닮지 못할 것이며 결국 주님과 영원히 거리가 있는 존재로 남고 말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매순간 주의 영을 좇음으로써 영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함께 누리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해 가는 사람이라면 결국 주님과 완전히 하나가 될 것이다. 오직 영에 속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데 있어서 자유와 진보를 누릴 것이다. 육신대로 사는 사람은 아무리 하나님을 알려고 해도 수건이 그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제대로 볼 수도 알 수도 없다. 우리의 눈은 아무리 부릅떠도 하늘의 세계를 볼 수 없다. 오직 믿음의 눈, 영 안에서만 그것을 볼 수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랜 시간 신앙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유가 없고 형식과 규율에 매여서 오직 어린아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조차 부모의 지시에 따라서만 하는 것처럼 하고 있으며, 어린아이처럼 하나님과 그 뜻을 아는 것이 적고, 성령께서 아무리 말씀하시고 가르치고 함께 하시며 위로하셔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왜냐하면 영의 역사에 대해 무디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자체를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니 결국 모든 것을 일일이 사람을 통해 가르쳐야 되고 무엇을 하라고 할 때도 스스로 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고 강요와 위협을 통해 압박을 가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행하신 가장 완전한 일은 성령을 그들에게 보내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항상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다. 이런 일을 이미 하신 하나님이 사람에게 다시 율법으로 가르치고 옭아매며 위협과 공포로 어떤 일을 억지로 하게끔 만들어야 하겠는가? 그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제한도 없이 다 말하고 다 들을 수 있는 상태에 놓여 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100% 그대로 대면할 수 있을 정도로 완전한 자유와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받아들여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기를 힘쓰기 바란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도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힘써 알라고 권면 받았다. 그들은 단지 모세의 율법밖에 소유하고 있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알고 그 뜻대로 행할 것을 요구하셨다. 하나님은 적어도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하물며 성령 곧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마음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을 모른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는 채로 세월을 보내고 있으며, 하나님의 마음과 동떨어진 채로, 하나님과 상관없는 엉뚱한 일을 하면서 '나는 하나님을 안다', '나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것은 사탄에게 깊이 속은 것이다.

지금 우리를 향한 사탄의 목표, 사탄의 공격 방향은 성령에 대해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며 새 언약의 축복에 대해 알지 못하게 하며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주의 영을 좇아 살며 주의 영 안에서 생명의 풍성함과 생명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도로 의식과 형식과 율법과 교훈과 규칙으로 우리를 옭아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되 마음으로는 세상과 육신을 그대로 좇아 살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을 좇아 사는 것이 아닌 모든 행위 곧 모든 의식과 선한 행위는 다 하나님을 참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을 섬기는 시늉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생각이 억지로 하나님을 섬기는 시늉을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가 그렇다는 것이다. 육으로 행하는 모든 일은 그 사람이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그 일을 하든지 간에 다 하나님의 일이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할 것이며 결국 사탄의 의도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지게 할 것이다. 육신을 좇아 계속 선을 행할 자도 없지만 설사 어떤 사람이 그렇게 자기 의지와 육신의 능력을 따라 상당히 선을 행하더라도 그는 결코 하나님과 가까워지지는 못할 것이며 그리스도를 닮지는 못할 것이다. 주의 영이 없는 곳에는 자유가 없고 인격의 변화가 없고 완전한 것이 없으며 죽은 행실과 헛된 일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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