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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그릇에 보배를 담음 (2)

(고린도후서 4:7-16)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기록한 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한 것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후4:7-16)

여기서 바울은 자신을 질그릇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금그릇이나 은그릇도 아니요 나무그릇이나 심지어 놋그릇도 아니고 단지 질그릇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냥 질그릇이 아니요 보배를 담고 있는 질그릇이라고 한다. 여기서 질그릇과 보배는 바울 안에서 나타나는 인격을 상징하는 말이다. 질그릇과 보배, 이 둘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바울 안에서 이 둘은 하나로 연합되어 있다. 도무지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둘이 바울이라는 한 사람 안에서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후서를 읽어보면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두 인격이 서로 교차되며 투영되고 있다. 즉 아담의 자손, 육신을 지닌 연약한 인간으로서의 바울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바울, 영광스럽고 강인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울이 함께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후서의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 속에서 일관되고 흐르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은 바로 '그리스도인은 보배를 질그릇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복음서나 바울의 다른 서신들은 주로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고 있으나 고린도후서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통로가 되는 사람이 어떤지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만일 고린도후서가 없었다면 우리는 바울이 성취한 사역에 대해서는 알았을지라도 그런 사역을 성취한 사람은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종종 그리스도인에 대해 오해하거나 지나치게 경직되게 생각하고 있다. 여러분은 완전한 그리스도인,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전에 완전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일에도 슬퍼하거나 눈물을 보이지 않고 담대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미소를 지으며 웃기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일 어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조금이라도 근심하거나 슬퍼한다면 그는 승리하는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보았다. 완전한 그리스도인에 대해 여러분 안에도 아마 이런 관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후서를 읽어보면 우리는 바울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신이 종종 슬퍼했고 또한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처럼 믿음이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곤경에 처했을 때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졌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고후1:8,9) 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는 고린도전서에서도 그러한 심경을 나타낸 바 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2:3) 바울 같은 사람이 그토록 실망할 수 있으며 두려워할 수 있으며 답답해할 수 있는가? 그러나 사실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바울이라고 별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심지어 복음서를 통해 주 예수님까지 육신을 입고 세상에 계실 때 때로 눈물을 흘리셨으며 약한 가운데서 아버지를 의지하며 기도하는 분으로 계셨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은 예외로 하더라도 바울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보통의 연약한 인간이었으며 그런 가운데서 모든 하나님의 일을 성취했다는 사실을 놓고 생각할 때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이다. 바울은 하나의 인간일 뿐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그렇고 그런 사람 중 하나였던 것이다.

우리는 위인전이나 영웅전을 읽을 때 훌륭한 일이나 큰 일을 성취한 사람들은 타고날 때부터 무언가 달랐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신화에서처럼 어떤 위대한 인물이 알에서 태어났다든지 하늘에서 내려왔다든지 하는 황당한 이야기는 빼더라도 대부분의 위인전들은 위대한 일을 성취한 사람들에 대해 그들은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의지가 반석처럼 굳고 투철하며 전혀 감정에 요동되지 않고 뜻한 바를 담대히 다 이루는 사람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것을 읽을 때 우리는 '아 이 사람은 본래부터 나와는 다른 사람이구나' 하고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그런 위인전에 나오는 대부분의 위인들의 인격과 생애가 전기 작가들이나 그런 사람들을 이용하여 무언가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과장되고 포장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시대 군인인 이순신은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모든 국민들에게 충효사상과 멸사봉공의 정신을 가르치는 모범 국민의 역할을 하기 위해 聖雄(거룩한 영웅)으로 높여졌다. 그러므로 그는 강하고 지혜롭고 거기다가 효자고 충신이고 의인이고 겸손한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게 묘사된 그는 말에서 활을 쏘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져도 끄덕 않고 버들가지로 다리를 싸매고 다시 나가 시합을 하는 등 강인한 정신과 육체의 소유자였고, 일본이 쳐들어오기 전에 미리 국방의 필요성을 느껴 거북선을 제작하고 군량미를 비축하며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혜안과 준비성을 갖춘 사람이었고, 실제로 전쟁이 터졌을 때는 기묘하고 대담한 전략을 세워 전쟁을 잘 치름으로써 국가 방위의 임무를 온전히 수행했고, 그 전쟁 중에도 일기를 쓰고 시를 쓰는 등 정신적 품위 또한 높은 인물이었고, 모함을 당해 억울한 고통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개의치 않고 다시 국가를 위해 백의종군하였고, 마침내 적의 총에 맞아 죽게 되었을 때에도 자기를 생각하지 않고 맡은 봉사의 직무에 충실하기 위해 자기 죽음을 알리지 말도록 했던 사람이다. 참으로 위대하고 거룩하다.

그러나 나는 이순신이 실제로 위인전에 묘사된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상당 부분은 그랬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본성이 이렇게 기계적일 정도로 정밀하게 합리적이고 강인하고 거기다가 앞의 성질에 모순된다고 생각되는 성질들 곧 여유와 인정과 약자들의 마음에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허술함을 함께 갖춤으로써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선한 가치들을 동시에 완벽하게 갖춘 인간상을 형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순신이나 세종대왕이나 국가적으로 떠받들려지고 있는 많은 인물들도 단지 우리와 같은 사람일뿐이다. 그들에게 남다른 훌륭한 인품과 일의 성취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약함과 약점과 실수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근대에 있어서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로 보통 김구 선생을 꼽는 것 같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존경을 받는 것은 그가 일생동안 고난 속에서 국가를 위한 봉사만 하고 미처 권력과 영광을 쥐기 전에 암살되어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좋지 않은 점이나 인간적인 모습은 드러날 필요도 기회도 없었다. 그러나 같은 시대에 같은 종류의 헌신과 봉사를 했던 독립운동가 이승만은 오늘날 상당 부분 수치스러운 인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것은 그가 대통령의 자리에 올라 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는 그가 가지고 있었던 많은 좋은 품성과 일(봉사)에도 불구하고 단지 독재자로서 간신들의 아첨만 받았던 인물로 기억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 두 사람 간에 어느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나는 사실 이 두 사람이 거의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어떤 면이 부각되고 강조되느냐에 따라 위인이 되기도 하고 죄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다 한쪽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고 다른 한쪽에는 죄인이요 연약한 질그릇으로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는 차별이 없다.

결국 위인이나 영웅은 존재하지 않는다. 훌륭하고 위대한 일은 존재할지 모르나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위대한 인물이란 사람들이 상상하고 있는 흠없고 완전한 인격과 능력의 소유자이다. 그런 인물은 단지 사람들이 관념 속에서 있을 따름이고 위인전을 통해 만들어낼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것을 지향하며 추구한다. 그것은 사람 속에 현재의 영광과 현재의 인격, 현재의 능력으로는 성이 차지 않을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 사람 속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지음 받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지위 곧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영광이다. 이것은 사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어졌고 그를 본 따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인류가 비록 타락하여 그의 생명에서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속에는 여전히 그의 성품과 인격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백보를 양보하여 설사 세상에는 완벽한 인격을 소유한 위인이나 강철같은 영웅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의 나라를 위해 봉사한 영적 인물 가운데는 확실히 그런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비롯하여 모세, 기드온, 사무엘, 다윗, 솔로몬, 베드로, 요한, 바울과 같은 성경의 위인들 그리고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과 웨슬리를 비롯한 근대의 훌륭한 전도자들, 잔느 귀용이나 워치만니와 같은 근대의 믿음의 용사들 등 그 어떤 사람도 도무지 연약함과 허물은 찾아볼 수 없고 온전히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만 무장한 그런 사람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본성과 체질로 볼 때는 분명히 금그릇이나 은그릇 같은 자질의 소유자가 아니라 질그릇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다 우리처럼 大小事에 시험을 만났으며 강철의 용사처럼 일격에 그것을 물리친 것이 아니라 약함과 두려움 가운데서 떨었으며 주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그것을 물리치고 승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분명히 큰 일을 했지만 그러나 하나같이 자신들이 그 일을 계획하거나 추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주님이 그들 안에서 일을 벌이시고 추진하실 때 주님의 도우심과 격려로 그 일들을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고 수행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 주님의 인격과 능력의 통로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질그릇에 보배를 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바울은 자신이 승리했고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누구에게든지 굴하지 않고 도리어 모든 사람을 압도하는 사람이며 모든 사람을 감동시키고 모든 사람들을 살리고 부유하게 하는 자였다. 그는 어디서 어떤 일을 당하여도 항상 기뻐하였고 모든 사람 안에서 권위와 능력을 인정받는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어떤 어려움도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또한 그에게 타고난 천재적 인격과 능력이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는 남보다 많은 고난과 시험과 곤란을 당했고 게다가 그에게는 그런 것을 가볍게 물리칠 수 있는 그 어떤 초인적(超人的) 능력도 없었다. 그는 말한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4:8-10)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6:8-10)

그는 어려움을 겪을 때 "그까짓 것 아무 것도 아니군" 하면서 초인적인 능력과 담대함으로 단번에 물리쳐 버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 우리처럼 답답하해 하며 근심하는 사람이었다. 다만 주님의 도우심으로 인해 궁극적으로 낙심하거나 쓰러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근심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요 다만 근심 중에도 결국 기뻐하는 사람이었다. 참으로 여기에 두려움에 떨지만 결국 강하고, 원수에게, 그리고 사람을 압박하는 환경에 싸여 있으나 결국 속박당하지 않고, 패배하는 자 같은데 결국 이기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만일 그때 바울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다면 우리는 '그가 매우 약하기 때문에 결국 실패할 것 같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는 자기가 예수가 핍박받고 멸시받고 죽음을 당한 그 고난을 몸에 지고 다닌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는 망하고 죽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생명과 능력이 또한 자기 몸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간증한다.

참으로 기이한 몸이고 기이한 삶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서 나쁜 소문을 듣기도 하지만 또한 좋은 소문을 듣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가 곤경에 빠졌다는 '좋지 않는 소식'을 듣지만 또한 그가 모든 상황을 헤치고 승리했다는 '영광스러운 소식'을 듣기도 한다. 그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다. 그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이다. 그는 '죽어가는 자' 같으나 여전히 살아 있으며 도리어 다른 사람을 살게 만든다. 그는 '슬퍼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하게 만들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이다.

이것은 얼마나 역설인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역설과 모순을 품은 사람이 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조성하신 역설(逆說, paradox)이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를 온통 보배로만 여기고 조금도 질그릇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은 질그릇을 만나면 그것이 전적으로 잘못된 상황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보배를 질그릇에 담으신다. 그러므로 질그릇이라고 해서 소망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모든 사람은 어차피 타락 후 다 질그릇에 불과하다. 사실상 금그릇이나 은그릇, 심지어 나무그릇이나 놋그릇도 없다. 다 타락하여 썩어지고 죽어가는 것뿐이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그러나 하나님은 타락하여 썩어지고 죽어가는 인간을 불러서 바로 폐기 처분하시지 않고 영광스럽게도 그 모습 그대로 그 상태 그대로 하나님의 생명을 담는 그릇으로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목적은 질그릇을 무효화하거나 폐기하시고 새로운 그릇을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다 그대로 보배를 넣으심으로써 질그릇과 보배가 함께 영광을 받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배가 발견되는 것은 언제나 질그릇 안이다. 이것은 무엇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질그릇이라고 해서 하나님을 담을 수 없다면 세상에는 하나님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진흙으로 된 투박한 도구라고 해서 보배를 담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사실 보배의 아름다움은 질그릇으로 말미암아 더 빛을 낸다. 전쟁이 나서 사람들이 피난 길에 오르면 밥상을 차리고 좋은 밥그릇에 밥을 담아 먹을 수 없다. 그래서 육이오 때 많은 사람들이 다른 그릇이나 솥이 없으므로 깡통에다 밥을 짓고 그대로 깡통으로 밥을 먹었다. 물론 그것도 쌀이 있는 형편 좋은 사람들만 그랬다. 그때 그릇(깡통)은 분명히 보잘것없는 것이었지만 식사 자체는 집에서 좋은 밥그릇에 밥을 담아 먹는 것보다 훨씬 더 영광스럽고 빛이 났을 것이다. 왜냐하면 밥의 가치가 그처럼 부각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깡통이나 질그릇에는 밥이 멋지게 담기지 않으므로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밥을 담지 못하거나 밥의 영광을 가리지는 않는다. 도리어 그렇기 때문에 밥이 더 빛나고 밥의 가치가 더 드러나게 된다.

나는 종종 만일 아담이 타락하지 않음으로써 우리의 현재 이 몸, 이 목숨, 이 삶이 이렇게 약하고 썩어지는 것이 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우리의 타락한 몸, 타락한 인격은 하나님의 영광을 담기에 너무나 버겁다. 우리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가리는지!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몸을 지금 즉시 재창조하셔서 약하지도 병들지도 무능하고 우둔하지도 정욕에 이끌리지도 않는 상태로 만들어 주시면 얼마나 좋겠는가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될 필요가 없다. 물론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그런 영광스럽고 하나님을 담기에 적당한 몸으로 부활하여 명실공히 하나님의 성전이 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이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담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깡통에 밥을 담는 것보다 좋은 그릇에 밥을 담아 먹으면 더 좋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식사란 밥을 먹는 것이지 깡통을 먹는 것은 아니므로 어느 그릇에 담아 먹느냐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깡통에 밥을 담아 먹는 것이 밥의 가치를 더 빛나게 하는 점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의 몸이 이렇듯 연약하여 하나님을 담기 어려운 점이 도리어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인격과 능력을 더 빛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지만 바울은 한 보통 사람이었다. 그는 주님을 드러내는 자동 기계가 아니고 남과 똑같은 육신의 필요를 지닌 하나의 동물이요 감정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주님의 생명은 그의 생애를 통해 유감없이 비춰졌다. 바울처럼 때로 슬퍼하지만 기뻐하며 겉에는 눈물이 흐르는데 속에는 여전히 평안이 흐르는 것이 바로 질그릇에 보배를 담은 사람의 모습이다.

우리는 종종 형제들 안에서 질그릇의 흔적마저 보지 말았으면 하는 희망을 가진다. 그것은 탁월한 영적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더 심하게 나타나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조금이라도 인간적 연약함이나 육신적 동물적 흔적을 보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그런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 있다 보면 가장 진실하고 정평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 안에서도 우리는 곧 피치 못할 인간성을 대하게 되고 만다. 그때 우리는 혼란을 느끼게 된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 한 몸에 동시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가장 위대한 인물도 그 사람 자체로는 어떤 존재인지를 보게 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주님 안에 있을 때는 또 어떤 인물인지를 보게 되는 것이다.

정말 우려할 문제는 우리나 어떤 형제가 질그릇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 질그릇에 보배를 담지 않고 질그릇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굉장히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또한 그것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을 하지만 실제로는 공허하고 초라하고 빈약한 모습을 보인다. 그것은 그가 말도 하고 기도도 하고 설치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리스도를 깊이 받아들여서 자기 질그릇 안에 보배를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질그릇이라고 말하며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지만 실제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며 자기를 보존하고 아낀다. 자기 육신 속에 작은 영광과 능력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크게 높이며 드러내며 옹호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질그릇은 과연 질그릇으로서의 초라함밖에 나타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약함과 허무함을 진심으로 깨닫고 보배이신 주님을 참으로 받아들인 사람 안에서는 결국 영광이 나타난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주님을 굳게 붙잡고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에도 의심과 염려에 시달리기도 한다. 계속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는데도 의심이 떠오르고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스쳐지나 가는 것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 없다. 참된 믿음은 의심 때문에 말살되지 않는다. 참된 믿음의 보배는 도리어 의심의 질그릇에서 빛을 발한다. 우리의 연약함에는 근본적인 문제 곧 주님을 믿는 믿음이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의심에 시달리며 오락가락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그러므로 그것도 염려할 필요 없다. 질그릇이 결코 보배를 제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었다. 그 결과 주의 사자가 와서 베드로를 풀어주었다. 그때 베드로는 천사가 자기를 풀어주는 것을 환상인 줄 알았다. 한참이나 따라가는 중에도 그는 환상을 보는가 생각했다. 그가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는데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리니까 로데라 하는 계집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들어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고 하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네가 미쳤다'고 했다. 계집 아이는 참말이라 강조하니 그들은 '그러면 그의 천사라'고 말했다. 나는 이 일을 보면서 참으로 질그릇에 보배를 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느끼게 된다. 분명히 그들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응답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이 추구한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에 대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순을 나타내 보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제한 받지는 않았다. 이것이 바로 질그릇에 보배를 담은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의 연약성이 하나님의 일을 제한하지 못한다. 도리어 하나님의 역사를 더 영광스럽게 드러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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