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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돌아보는 것 (2)

(고린도후서 4:16-5:10)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나날이 새로워 갑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룩해 줍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은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 표준새번역)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추구하는 존재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는가? 어디에다 소망을 두고 있는가? 만일 우리가 겉 사람 즉 육신에 소망을 두고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는 자라면 우리는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반드시 낙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루 하루 살아가는 동안 환난이 끊이지 않으며 그로 인해 몸과 (거기에 소망을 두고 있는) 마음이 날로 약화되며 편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겉 사람(몸)이 아니라 속 사람(영)에 소망을 두고 있고 세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하루 하루는 그 어떤 조건 속에서도 즐겁고 기대에 찬 날들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악 조건, 아무리 좋지 않은 환경이라도 결국 다 합력하여 우리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우리가 육신의 욕구를 좇아서 죄와 불순종을 저지름으로 인해 고생을 한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진리를 따르는 가운데서 손해를 보고 고생을 하는 것은 매우 귀한 일이다. 그보다 더 나은 투자, 그보다 더 수지맞는 장사는 없다. 인생은 한 번 사는 것인데 이래도 흘러가고 저래도 흘러가는 것이다. 어차피 지나가게 될 인생, 어차피 무엇인가는 해야 하고 땀은 흘려야 하는 인생을 어딘가 사용하여 그보다 더 나은 무엇을 건질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사람은 항상 자기 인생을 썩어질 육신 자체를 위해 쓸 것인가 아니면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쓸 것인가 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 썩어질 육신을 투자하여 썩지 않을 영생을 거두는 장사가 최고의 장사이다. 돈 천만원을 투자하여 이천만원을 거두어도 수지맞는 장사인데 한 70년 쓰다가 무덤으로 들어가게 될 육신을 투자하여 영광스러운 몸을 입고 그리스도와 영원히 사는 삶을 거두는 것은 얼마나 수지맞는 장사인지 생각해 보라. 사실 장사에 있어서 밑천으로 쓰는 천만원은 그대로 두어도 적어도 천만원은 그대로 있는 것이지 썩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조금씩 떨어지기는 하지만. 그러나 우리 겉 사람 즉 우리 육신은 쓰지 않고 보내나, 어디엔가 허무한 일에 쓰면서 보내나,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에 쓰면서 보내나, 어차피 흘러가는 것이며 쇠해지고 썩어지고 죽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을 쓰는 최상의 방법은 그것을 통해 더 나은 무엇을 얻는데 쓰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써 그와 함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를 이루며 거기서 그와 함께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우리 일생은 이 일을 위해 드려지고 쓰여지는 것이 가장 좋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증거하고, 몸을 통해 그의 영광을 나타내고, 악하고 일그러진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진리로 인해 거부당하고 고통을 겪는 삶이란 타락하여 죽게 될 운명을 지닌 인생으로서는 분에 넘치고 당치 않는 축복이다. 그것은 오직 천국을 상속받기로 예비된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만이 누릴 수 있는 몫이다.

우리에게 이 은혜가 베풀어졌고 이 복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보는 눈이 복 있는 눈이다. 우리 안에 이 지식, 이 믿음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 어떤 환경도 다 나를 망하게 하는 것이 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를 나타내게 하고 속 사람을 강건케 할 따름이다. 우리는 인간의 허무한 삶과 고난에 대해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거나 숙명론적인 체념을 하는 자가 아니다. 우리는 저주는 저주고 복은 복이지 저주가 곧 복이거나 이것이나 저것이 다 같다는 식의 생각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우리 육신의 삶이 고달프고 고통스러운 것과 모순적이고 일그러진 세상 삶은 사탄과 타락, 죄, 그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로 인해 생겨난 것이며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거기에 어떠한 그럴듯한 의미와 이름을 갖다 붙이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타락이며 죄며 썩어짐이며 고통이며 저주와 죽음일 뿐이다.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이란 고통을 부인하거나 저주를 부인하는 자가 아니라 그것을 직시하고 인정하며 받아들이는 자이다. 다만 그것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삶을 바라보며 고통 속에서도, 저주 속에서도 더 나은 삶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자이다.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간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이 없는 자들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광야의 고통스런 삶을 고통스럽다고 말했다거나 그것으로 괴로워했기 때문이 아니고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했든 간에) 하나님이 약속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약속하셨고 그때 계속 이끌고 계셨던 그 새로운 삶, 새로운 세계에 관심이 없었고 그것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는 누구나 즐거워하지만 광야의 황무지에서는 누구나 재미없고 괴롭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하는 중에 기뻐하며 감사하지 않고 오직 불평과 원망만 한 삶에 대해 책망하고 심판하셨지만 그것은 그들이 광야 생활 자체를 즐기지 않고 괴로워했다고 그런 것이 아니라 비록 광야 생활 자체는 괴롭더라도 그들에게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 있는데 왜 거기에 소망을 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자세를 취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으로 책망하고 심판하신 것이다.

여호수아와 갈렙도 광야에서 같이 고생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삶이 그다지 괴롭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만 편한 생활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소망이 현재의 육신적 삶(의 안락)에 있지 않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의 삶에 있었기 때문이다.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이렇다. 믿음의 사람이라고 해서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도 무조건 기쁘고 즐거운가? 그렇지 않다. 없는데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있기 때문에 즉 주어진 것이 있기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단지 지금 육신 안에, 지금 이 세상 안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영 안에,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것이므로 눈에 보이지 않을 따름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11:1-3)

육신에 눈과 귀와 손이 있어서 사물을 느낄 수 있듯이 거듭난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에게는 믿음이 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들을 느끼며 누릴 수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말은 믿음이 우리가 소망하며 기다리는 것들을 실제로 느끼며 누릴 수 있게 만든다는 뜻이다. 믿음으로 우리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그 세계를 볼 수 있으며 증거할 수 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무엇으로 자기가 속해 있던 세상에서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승리할 수 있었던가? 그들이 남다른 좋은 환경에서 남다른 편한 삶을 살았기 때문인가? 전혀 그렇지 않았고 오직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은 승리한 것이다.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신 것을 믿는다.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의 환경을 허락하신 것도 믿는다.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육신의 세계가 전부가 아니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창조하신 영원한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육신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것이 전부가 아니요 그것을 월등히 넘어서는 복된 새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또한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 육신의 특성을 고려하사 우리 겉 사람이 약화되고 감소되도록 허락하고 계시는 것도 안다.

이 땅에서 몸을 입고 사는 동안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한 것이든 아니면 우리의 죄와 그것으로 인해 이미 내려진 땅의 저주로 인해 겪는 것이든 고통과 고난이 있을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이고 가벼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를 믿든 안 믿든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계에서의 육신적 삶에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우리는 주님의 나라에서 크고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마귀는 우리에게 믿음의 눈이 있어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보며 그리로 힘껏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하게 막으려고 애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우리는 보통 자연인과는 다른 신령한 사람이다. 우리에게는 육신의 눈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이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거기 속한 영원한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표준새번역 : 우리는 믿음을 바탕으로 삼아서 살아가는 것이지, 보는 것을 바탕으로 삼아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 공동번역 : 사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 중에 감정대로 혈기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도 될 자는 아무도 없으며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도 없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개역)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질 때에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집, 곧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압니다. 우리는 이 장막 집에서 신음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으로 덧입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장막 집을 벗을지라도 벌거벗은 몸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장막에서 살면서, 무거운 짐에 눌려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장막을 벗어버리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덧입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킴을 받게 하려 함입니다. (표준새번역)

우리가 들어 있는 지상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우리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에 들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워 주시는 집입니다. 지금 육신의 장막을 쓰고 사는 우리는 옷을 입듯이 하늘에 있는 우리의 집을 덧입기를 갈망하면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입으면 벌거숭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장막에 머물러 있는 동안 우리는 무거운 짐에 짓눌려 신음하고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장막을 벗어버리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늘의 집을 덧입음으로써 죽음이 생명에게 삼켜져 없어지게 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그러나 이 죽음은 일시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 후에 부활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죽는다는 것의 실체는 사실상 몸의 변화이다. 썩어질 죄의 몸이 변하여 썩지 아니하고 쇠하지 않는 완전한 몸 곧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하는 것이다. 영혼은 그대로 있고 육체만 변한다는 뜻이 아니고 사람이 완전히 바뀐다는 뜻이다.

사실 우리의 소망 중에 큰 소망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의 소망은 크게 두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를 완전히 알고 완전히 누리는 것이다. 그가 우리 생명의 근본이요 모든 선한 것과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참으로 그와 완전히 연합하여 그를 완전히 알고 완전히 누리며 찬양하기를 원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약속된 것이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또 하나는 몸의 변화이다. 바울은 이것을 몸의 구속이라고 표현했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8:23) 몸이 변한다는 것은 우리가 첫 창조에 속한 자에서 새 창조에 속한 자가 된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마지막 증거가 될 것이다. 지금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이 부어져서 우리 안에 새 사람이 창조된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속 사람과 겉 사람 간에는 여전히 갈등이 있다. 그것은 영은 살아났지만 몸은 여전히 죄로 인해 죽은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롬8:10) 그러나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우리에게는 확실히 이 소망이 있다. 하나님이 확실히 이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이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이 먼저 분명하게 성취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이 사실을 알게 하시며 확증하시기 때문이다.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표준새번역 : 이런 일을 우리에게 마련해 주시고 그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가 소망 중에 기다리는 새로운 몸은 사람의 손으로 빚은 지금 이 몸과는 다르다. 우리 부모가 낳고 밥 먹여 기른 이 몸도 사실은 하나님의 손으로 빚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그러나 이 몸은 어디까지나 옛 창조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옛 창조의 세계가 타락하여 부패하고 심판을 받을 때 이 몸도 함께 부패하고 멸망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새 창조의 세계에 속한 새 몸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하여 오직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그의 영광으로 충만한 영광스러운 몸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이 장막 집과 같은 몸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죽음을 거쳐서 새로운 몸을 빨리 받아들이기를 원한다. 죽음이 기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싫거나, 이 몸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되어서가 아니라 새로운 몸으로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좋고 기쁘기 때문에 그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나는 현재까지는 지금 이 몸도 그런 대로 쓸만하며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것을 가지고 아직까지는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새로운 몸을 입어보게 되기까지는 (상대 비교가 안되니까) 어느 정도 몸이 쇠약해지더라도 이 세상 생활을 하는데는 이 몸이 그다지 괴롭거나 불편하게 느끼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불편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언제 불편을 느끼느냐 하면 주님을 위해 몸을 드리려고 할 때이다. 그때 우리의 현재 이 몸은 그야말로 죽은 몸이며 성능이 형편없는 몸이라는 것을 느낀다. 우리 몸은 몸의 안락을 거스려 기도하는 것도 금식하는 것도 남을 위해 수고하며 희생 봉사하는 것도 다 싫어하며 거부한다. 사실 몸이 그렇게 하는 것은 힘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를 죽이면서, 없는 것을 짜내면서 무엇을 할 수는 없는 것이 생명체의 본성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소망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모든 소원들 곧 우리 안에 원하는 모든 일들을 제한없이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몸의 구속, 몸의 해방은 이런 면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지 이 몸을 벗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대해 무능하고 약한 이 몸보다 더 강하고 능한 몸을 입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육신의 삶이나 육신 자체의 성능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제대로 안되기 때문에 탄식하며 괴로워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이 약한 것과 죽을 것과 무능한 것이 강력한 생명에 삼켜져서 완전히 해소되고 마음껏 주님을 찬양하고 섬길 수 있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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