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음 (1)

(고린도후서 5:11-21)

교회의 큰 원수,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데 있어서 큰 장애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태도이다. 영으로 자랑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것, 사람을 그 속의 생명으로 판단하지 않고 외모로 판단하는 것, 성령 안에서 행하지 않고 육신의 생각을 따라 행하는 것, 바로 이런 행동들이 교회를 교회 되지 못하게 만들고, 교회가 성령 안에서 하나된 것을 유지하지 못하게 만들며, 교회가 성령 안에서 하나된 것을 실제로 밖으로 나타내지 못하게 방해한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1장부터 여기 5장까지 계속 말한 것은 자기를 참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입증하기 위한 설명과 해명이었다. 그가 자신이 어떤 은혜를 체험했으며 어떤 생명을 가진 사람이며 어떤 마음으로 무슨 일을 해 왔는가를 계속 힘써 말한 것은 결국 자기가 참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고린도교회 형제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그들을 섬기는 자로 서 있음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왜 자기의 섬김을 받고 자기로 인해 생명을 얻은 형제들이 이런 말을 자기로부터 들어야 하는지 너무도 답답했다. 5:11에서 그는 그러한 그의 심정을 표현했다.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려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려졌기를 바라노라" (우리는 주님이 두려운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사람들을 설득시키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밝히 드러났습니다. 여러분의 양심에도 우리가 밝히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알려진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인 형제들의 양심에는 알려지지 못했다는 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난 까닭은 교회 안에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외모로 취하는 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고후10:7) 하나님 앞에서 밝히 드러난 사실이 왜 형제들 안에서는 밝히 알려지지 못했는가? 성령이 사도로 증거하는 사람이 교회 형제들의 양심 안에서는 왜 밝히 보여지지 못했는가? 그것은 형제들이 사탄에게 속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속았다는 것인가? 사람을 생명으로 취하지 않고 외모로 취하는 것이 바로 속은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사람의 속을 볼 수 있는 눈(영적 눈)이 없다. 그들에게는 오직 세상뿐이고 또 세상을 볼 수 있는 눈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우리에게는 땅의 세계말고 하늘에 있는 참 세계 곧 영의 세계, 그리스도의 나라가 있고 또한 그것을 보는 영의 눈, 믿음의 눈이 있다. 영의 눈, 마음의 눈, 믿음의 눈 바로 이것으로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축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오직 믿음 위에서만 건축된다. 사람을 육신대로 보는 한 우리는 누구와도 연합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소망을 둘 수 없다. 교회의 모든 일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역사 위에 서 있다. 우리는 그것을 보아야 한다. 사람의 어떠함이 교회를 구성하고 교회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과 인격과 사역이 교회를 만들어간다. 이것을 보는 눈이 없으면 교회는 아무 것도 안된다.

사탄은 이것을 잘 알고 있다. 교회 구성원들이 서로를 영의 눈으로 보고 영 안에서 서로 받으면 교회가 서고 그렇지 못하고 육신의 눈으로 보고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교회는 서지 못한다는 것을 사탄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사탄은 성도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이것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서로를 육신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며 서로를 외모로 취하게 함으로써 서로 미워하고 다투고 나누어지게 만들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나라가 서지 못하고 사람들이 계속 육체의 세계, 땅의 세계에 매여있도록 하려고 한다. 사탄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 피조물이며 따라서 이전의 사람으로 서로를 대하거나 육신대로 서로를 대하면 안되고 오직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따라 서로를 귀히 여기며 소망 중에 인내하고 사랑 안에서 용납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이런 사탄의 훼방 속에 놓여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대적해야 한다. 그 방법은 곧 서로 일깨워 모두가 항상 진리 안에 굳게 서도록 돕는 것이다. 우리는 형제들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단지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어야 한다. 우리 안에는 육신의 눈으로가 아니라 다른 눈으로 사람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일깨워주어야 한다. 우리는 형제들이 다른 형제를 감정대로 겉모양으로만 대할 때 그것이 사탄에게 속은 잘못된 태도임을 말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말고 영의 인도를 따라 그리고 속에 있는 생명을 따라 사람을 대하도록 도와야 한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태도는 우리 안에 하나님이 새로 일으키신 역사를 보지 않는 것이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자의 양심은 마비된 것이다. 양심은 하나님의 뜻을 우리 안에 전하는 통로이다. 이것이 마비되면 뻔한 사실도 보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거짓 무리를 진실한 형제로 잘못 받아들이기도 하고 진실한 형제를 이단이나 원수로 대적하고 배척하기도 한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사실은 모든 증거를 통해서 매우 분명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의 일부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거짓 선생들의 거짓 가르침에 미혹되어 양심이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왜 참 사도인가를 일일이 변명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여러분에게 또다시 우리 스스로를 치켜올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우리는 여러분이 우리를 자랑할 수 있는 근거를 여러분에게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에는 자랑할 것이 없으면서도 겉으로만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대답할 말을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고후5:12)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 외모로 자랑하는 것은 성령을 따르지 않고 육체대로 행하는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대표적 현상 중 하나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외모로 취한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지 않고 여전히 자기 육신의 생명대로 산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곧 그가 믿음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사는 것의 반대말은 '보는 것'으로 사는 것이다.(고후5:7)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육신의 눈에 보이는 대로 행하는 것은 불신앙이요 죄다.

바울도 처음에는 사람을 외모로 보았다. 그는 예수를 외모로 판단했다. 그래서 그의 눈에 예수는 단지 나사렛 출신의 이단 괴수에 지나지 않았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마땅히 제거되어야 할 자들일 뿐이었다. 바울이 그런 태도를 취한 것은 그가 바리새인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주님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은 오직 사람을 외모로만 취하는 자들이었다. 주님의 말씀과 능력과 사역이 다 그가 참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했지만 그들은 주님을 그렇게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보배를 감지할 수 있는 눈이 없었다. 초기의 바울이나 바리새인들처럼 고린도교회 안에도 사람을 생명대로 보지 않고 외모로만 취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더 문제는 바로 오늘 우리 안에도 그런 태도가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외모가 아니라 속에 있는 생명이다. 즉 그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인종, 성별, 나이, 사회적 신분, 부, 직함 등은 물론이고 그 사람의 과거와 심지어 현재 겉으로 드러나고 있는 행위(선행이나 종교적 경건 등)조차 일단 보지 말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서 새 일을 시작하셨는가,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기 시작했는가만 보아야 한다.

겉으로 보면 아무 변화도 없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으며 큰 변화가 일어났다. 옛 세상은 지나가고 새 세상이 열렸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지금 벌써 하나님의 세 세계, 그리스도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통일하시고 그분과 그의 생명을 지닌 자들이 함께 만국을 다스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5:16,17)

주 예수님을 보라. 그는 한 번도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셨다.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창기나 세리도 그를 가까이할 수 있었다. 또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교만과 죄로 하나님의 나라를 가로막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 무리들을 배척하실 수 있었다. 심지어 가족까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12:48-50)

그가 그렇게 하신 이유는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은 물론이요 이스라엘사람이냐 이방인이냐 하는 것도, 심지어 죄인이냐 의인이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바뀌는 새 세상이 시작된 것이다.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지 않는 주님의 태도는 원수들에게까지 인정되었다. "이에 바리새인들이....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마22:16)

뿐만 아니라 그는 사람들에게 자기처럼 하도록 요구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요7:24)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요8:15)

구약 시대 이사야 선지자는 주님이 이처럼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오직 생명과 실제대로만 취하실 것임에 대해 예언한 바 있다. "그가....그 눈에 보이는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로 궁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사11:3,4)

바울도 주님에 대해 그렇게 증거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골3:25)
주님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사람을 보는 주님의 시각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즉 주님은 사람의 육신을 사람의 실체로 보지 않고 오직 그 영과 생명을 사람의 실체로 보신다는 것이다. 그렇다. 사람의 실체는 육이 아니라 영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이 바로 사람의 실체이다. 이것이 있을 때 사람은 살았다고 하고 이것이 없으면 사람은 죽은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 실제로 그렇게 되었는가? 그렇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먹는 즉시 사망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즉시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것인가? 아담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죽기는 죽었는데 아담의 육이 죽은 것이 아니라 영이 죽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반응하는 기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몸에 생명을 공급하고 몸을 통제하는 사람의 참 실체인 영이 죽은 것이다. 아담의 외모가 아담이 아니라 아담의 영이 참 아담인 것이다. 이것이 죽었다면 사람은 죽은 것이다. 이것이 오염되고 부패했다면 사람은 오염되고 부패한 것이다. 육신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아담의 육신은 범죄 후에도 계속 존재했다. 다만 육신과 땅에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여 육신의 삶이 피곤하고 약화되었을 따름이다. 요컨대 사람의 실체는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있고 영에 있다.
우리도 이런 시각을 가져야 한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약2:1) 그리스도의 정신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가 사람을 보는 시각대로 사람을 본다. 교회가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무시하고 거절하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는 태도는 다른 사람을 대할 때만 적용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판단할 때도 적용되어야 한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베드로전서 1:17)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행위를 보신다. 행위는 마음과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며 영의 상태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행위는 우리의 인격 또는 생명을 말한다. 하나님은 외식하는 자들에게 속지 않으신다. 오직 아들의 생명이 있고 그것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자만 받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행동, 나의 삶이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진실한 행동, 진실한 삶인가'를 항상 살피며 자문(自問)해야 한다. 스스로 속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럴듯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생명과 인격이 진실하고 견고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자기를 단장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3:3,4) 육신의 모양을 내려고 하지 말고 영혼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가꾸라는 것이다. 온유하고 안정된 영적 상태, 이것이 바로 최고의 아름다움이다. 육신의 모양을 내려고 하는 것과 고요하고 부드러운 영혼을 가꾸는 것은 서로 충돌한다. 겉 사람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자는 영혼이 거칠고 불안정하며 정신이 복잡하게 된다. 속 사람을 아름답게 가꾸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자로 단장하는 것이 자기를 가장 잘 돌보는 것이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음 (1) (고후5:11-21) / 2001.8.12 이상봉 2010.05.02 4315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 (3) (고후5:1-10) / 2001.7.29 이상봉 2010.05.02 3792
17 우리의 돌아보는 것 (2) (고후4:16-5:10) / 2001.7.22 이상봉 2010.05.02 4021
16 우리의 돌아보는 것 (1) (고후4:10-18) / 2001.7.15 이상봉 2010.05.02 4728
15 질그릇에 보배를 담음 (2) (고린도후서 4:7-16) 이상봉 2010.05.02 4119
14 질그릇에 보배를 담음 (1) (고린도후서 4:1-16) 이상봉 2010.05.02 3548
13 수건을 벗고 거울처럼 주님을 반사함 (고린도후서 3:18-4:6) 이상봉 2010.05.02 3979
12 수건이 벗어진 자 (고린도후서 3:12-18) 이상봉 2010.05.02 5045
11 살리는 영의 직분 (고린도후서 3:4-11) 이상봉 2010.05.02 5133
10 그리스도의 편지 (고린도후서 2:15-3:3) 이상봉 2010.05.02 3805
9 그리스도의 향기 (고린도후서 2:14-3:3) 이상봉 2010.05.02 3809
8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사람 (고린도후서 2:12-17) 이상봉 2010.05.02 4028
7 사탄에게 속지 않음 (고린도후서 2:1-11) 이상봉 2010.05.02 4188
6 영 안에 있는 사람 (고린도후서 1:21) 이상봉 2010.05.02 3909
5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예가 되는 하나님의 약속 (고후1:17-22) 이상봉 2010.05.02 6856
4 참된 도움 (고린도후서 1:15-24) 이상봉 2010.05.02 3944
3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하게 행함 (고린도후서 1:12-16) 이상봉 2010.05.02 4024
2 십자가의 체험 (고린도후서 1:1-11) 이상봉 2010.05.02 3976
1 고린도후서 서론 이상봉 2010.05.02 3884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