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살리는 영의 직분

(고린도후서 3:4-11)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확신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게서 나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격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돌판에다가 문자로 새긴 율법을 선포할 때에도, 빛이 났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은 비록 곧 사라질 광채이기는 하지만,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그 광채 때문에,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볼 수 없었습니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직분에도 이러한 영광이 따랐는데, 하물며 성령의 직분에는, 더욱더 영광이 넘치지 않겠습니까? 정죄를 선고하는 직분에도 영광이 있었으니, 의의 직분은 더욱더 영광이 넘칠 것입니다. 참으로 이 경우에 이제까지 영광으로 빛나던 것이, 이제 훨씬 더 빛나는 영광이 나타났으므로, 그 빛을 잃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져 버릴 것도 영광을 입었으면, 길이 남을 것은 더욱 영광 속에 있을 것입니다." (3:4-11) 표준새번역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굳건히 믿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 자신에게서 났다고 내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자격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새로운 계약을 이행하게 하셨을 따름입니다. 이 계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율법은 석판에 새겨진 문자로서 결국 죽음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에 비록 잠시 동안이기는 하였지만 그 얼굴에는 너무나 찬란한 광채가 빛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감히 그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하였습니다. 이 문자의 심부름꾼도 그렇게 영광스러웠다면 성령의 심부름꾼은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습니까? 사람을 단죄하는 일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사람을 무죄 석방하는 일에는 얼마나 더 큰 영광이 있겠습니까? 과연 지금의 이 영광은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이 영광에 비긴다면 과거의 그 영광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깐 있다 없어질 것도 빛났다면 영원히 계속될 것은 얼마나 더 찬란하게 빛나겠습니까? (공동번역)

<바울의 확신>

고린도교회의 어떤 사람들로부터 참 사도라는 증거, 예를 들자면 추천서 같은 것을 내놓아 보라고 요구받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준 답은 "너희가 바로 우리의 편지(추천서)이다" 라는 것이다. 그들은 바울의 복음 증거와 섬김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고 생명을 얻었으므로 바울의 열매 곧 바울의 편지요 또한 그리스도의 편지였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신기한 분이다. 그는 자기를 아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엮으신다. 육신적으로 볼 때 그때 바울과 고린도교회 신자들 간에 갈등이 있었고 그다지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은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은 하나였다. 즉 영적으로는 바울과 고린도교회 형제들이 이미 하나였던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울이 그들에게 (자기 자신이나 자기 사상을 전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전했는데 그 그리스도가 그들 속에서 신기한 작업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고린도교회 형제들은 단지 바울의 말만 들을 수 없었고 그리스도의 영을 함께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영은 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벌써 그들을 장악하여 그들로 바울과 같은 사람으로,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으로 변화시켜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결국 내 사람이고 내 아들이고 내 편지요 내 증인이다"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으니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3:4,5)
바울은 무슨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가? 자기가 참 사도요 자기가 전한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의 길이라는 확신이다. 그는 언제나 자기 스스로 일하지 않았고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했고 그런 그의 사역은 고린도교회 형제들이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그 안에서 굳게 서 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입증되고 있었다.

그는 전에 고린도교회에 대해서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전1:10)고 말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소망과 신뢰를 표현한 적이 있다. 그때 바울이 문제가 많은 고린도교회에 대해 그런 소망과 신뢰를 나타낼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주님께서 그들 안에서 선한 일(구원 역사)을 시작하셨다는 증거가 그들 안에서 보여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록 당장은 약하고 문제가 많았지만 그래도 그들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이 그들을 그리스도의 편지로 기록해 가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에 대해 소망과 신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권위와 사역은 자기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누구든지 그를 대할 때 그의 육신적 연약함이나 기타의 걸림돌에 걸리지 말고 그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잘 받아들여서 생명을 얻으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새 언약의 일군>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바울은 자신이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했다. 새 언약(新約)이란 그리스도의 죽음을 조건으로 하나님께 성령님을 사람들에게 보내주셔서 그가 사람들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친히 성취하신다는 약속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구약 시대가 아니고 신약 시대인데 신약 시대란 이제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가 오시고 또한 그로 말미암아 성령님이 사람들 안으로 부어짐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하나님을 참으로 알고 섬기는 것이 가능해진 시대이다. 하나님의 모든 뜻이 우리의 무능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자신(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온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은 복된 언약이고 신약 시대는 복된 시대요 은혜의 시대이다.

바울은 자신이 바로 이 신약의 사도요 신약의 일꾼이라는 것이다. 새 언약의 일꾼은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일을 하는가? 새 언약의 일꾼(사도)이 하는 일은 간단하다. 즉 범사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새 언약의 일꾼이 일하는 방법도 역시 간단하다. 오직 그리스도로(그리스도를 의지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을 따라) 일하는 것이다. 즉 사실을 말하자면 무슨 특별한 일을 힘들여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 따라가는 것이다. 일은 그리스도가 다 하시고 사람은 그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런 일꾼이었다.

그가 고린도교회를 향해 한 일을 살펴보라. 그가 무엇이라고 했는가?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心碑)에 한 것이라" 이런 일을 어떻게 사람이 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일꾼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고 모든 일은 실제로 오직 일꾼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그리스도의 영) 자신이 다 하신 것이다. 바울이 한 일은 단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한 것이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영(성령님)을 불어넣으시며 그 영은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누리게 하시며 그들의 마음과 생명에 하나님의 뜻을 새기신다.

이처럼 모든 일은 하나님 곧 아버지와 그리스도와 성령님이 합작하여 다 하신다. 사람이 하는 일은 오직 성령을 사람 안에 부으시는 하나님의 통로, 전달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새 언약의 일꾼은 영의 직분을 맡은 자 곧 영의 전달자, 영의 사역자라고 불린다. 새 언약의 일꾼의 특징은 모든 일은 하나님 자신(성령)이 다 하시는 것이므로 그에게 맡기고 자신은 오직 그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그 영을 전하는 일만 하는 것이다.

바울이 자신을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말한 후 자신을 [의문(儀文)의 직분자] 즉 [율법을 가지고 사람을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영의 직분자] 곧 [그리스도의 영을 전하는 자]로 소개한 것은 그 때문이다. "저가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일군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일군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여기서 새 언약과 옛 언약의 차이를 잠시 살펴보자. 옛 언약(구약)이란 무엇인가? 구약이란 율법에 제시된 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면 산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면 영생을 얻는다(하나님의 생명을 누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순종이 생명 얻는 조건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면 사실 구약도 행위 언약은 아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표면적으로는 거룩한 삶이지만 실제로는 그들을 '이미' 약속과 은혜로 구원하신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요구였다. 그러므로 믿음을 조건으로 하는 신약과 실제로는 같은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은 이 믿음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는 그 언약에 대한 신뢰의 표시로서 율법(유월절, 안식일, 제사, 이웃 사랑, 우상 숭배를 하지 않음 등)을 지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이든 신약이든 하나님이 그 백성과 맺은 언약은 다 은혜 언약이다. 그러나 구약은 표면적으로 볼 때 마치 사람이 단지 하나님을 믿는 것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즉 율법에 제시하고 있는 선한 삶을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여러 명령에 순종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강조된 것이 사실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하실 일이 따로 있고 사람이 할 일이 따로 있는 식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며 돌보시는 일을 하고,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시며 거기서 외적을 물리쳐주시며 좋은 생활 환경을 조성하여 그 백성들로 하여금 복된 삶을 살도록 돌보시고, 사람은 그런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 표시로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그 마음과 생활 속에서 의(義)와 인(仁)과 신(信)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율법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즉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하고 하나님의 진실하심같이 진실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는 것인데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분명히 모세와 선지자들로부터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을 들었으나 그것이 그들에게 생명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로 있었던 것이다.

결국 율법은 그것을 받은 사람들이 죄인으로 정죄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본래 언약의 징표로 주신 것이 이제는 죄인의 죄인됨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본래 율법의 목적은 하나님의 자녀로 지음 받고 부름 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그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줌으로써 그들이 살아야 할 마땅한 삶을 알게 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생명(영생)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었지만 (구원 받은 백성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실제로는 사람들이 여전히 죽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결국 사람을 정죄하는 역할과 그것으로 말미암아 오실 하나님의 의(은혜로 말미암는 구원)를 사모하고 그것을 구하는 자리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새 언약이나 옛 언약(율법)이나 따져보면 궁극적으로는 다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은 일단은 사람을 정죄하고 쓰러뜨리고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모세를 비롯한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일꾼들을 가리켜 [사람을 죽게 하는 정죄의 직분자]라고 한 것이다.

구약 일꾼들 역시 신약의 일꾼들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알게 하고 그것을 통해 사람이 곁길로 가지 않고 생명의 길과 진리의 길로 가도록 도와주고 독려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돌판에 새긴 율법 곧 '사람의 생명 바깥에 있는 지식'만을 소유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즉 사람을 살릴 마음은 있었으나 그것을 성취할 수단과 무기가 빈약했던 것이다. 비록 그들의 말은 옳고 마땅한 것이고 당연한 것이었지만 문제는 사람의 생명이 그것에 부응할 수 없는 타락한 생명이었고 거기에 그들의 좋은 말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것이다.

생명이 아니라 머리로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율법)으로는 사람이 살아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의문(儀文 ; 문자, 법, 지식적 가르침)의 직분은 사람을 살리지 못하고 죽이는 결과만 초래할 따름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 일도 필요하며 의미있는 일이었다.
이에 비해 바울을 비롯한 신약의 사도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신약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의문 율법으로 사람을 가르쳐서 사람들의 머리 속에 하나님과 진리를 아는 지식을 소유케 하는 일을 하는 자가 아니고 오직 자기 속에서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자기의 거듭난 생명을 표현하고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을 전달하는 일을 한다. 자기 속에 역사하는 그리스도(성령)를 사람에게 전달함으로써 그 영이 사람들 안에서 모든 일을 친히 완전하게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겉으로 보기에는 구약 선지자들과 똑같이 사람을 가르치고 권면하고 돌보는 일을 하더라도 그 내용은 사실상 전혀 다른 것이다. 가르치든 사랑하며 격려하든 그 내용은 다 우리 안에서 우리 생명을 대체할 하나님의 새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공급하고 전달하는 것이다.

신약 시대의 하나님의 종들 곧 성령 안에서 행하는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의 직무는 영의 직무(사역)이다. 이 일은 전혀 사람을 정죄하거나 죽이지 않고 전적으로 사람을 살리며 생명을 주는 일이다. 이 일은 전적으로 살리는 영 곧 성령의 역사를 사람 안에 펼치는 일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좌절케만 하고 끝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직접적으로 전달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전혀 그런 분위기와 맞지 않는 듯이 보이는 행동 곧 사람을 진리로 책망하고 진리에서 떠난 자들을 징계하는 경우일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일하는 것이며 그 과정을 통하여 그로 성령 곧 살리는 영의 다루심을 받게 만듦으로써 살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신약의 핵심 내용인 십자가의 복음 역시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부인하게 만들기 때문에 얼른 보면 마치 구약 율법이 사람을 정죄하고 좌절하게 만든 것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구약 율법이 단지 사람을 정죄하고 좌절하여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는 역할을 한 것과는 달리 십자가 복음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방법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게 만듦으로써 성령의 살리는 능력을 체험케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 전했지만 그것이 의문 율법을 제시한 구약 선지자들과는 달리 정죄의 사역자가 아니라 살리는 사역자로 불릴 수 있었던 것이다.

영의 직분, 영의 사역자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첫째, 지식의 세계 곧 가르치고 배움으로써 지식을 얻고 그것을 의지하여 자기 스스로 힘써 선한 삶을 사는 세계로 사람을 인도하지 않고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영을 받으며 그를 깊이 인식하며 범사에 그를 의지하며 사는 세계로 사람을 인도한다.

둘째, 지식으로 말하지 않고 생명(인격)으로 말한다. 머리로 안다고 다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안에 실제가 된 것만 말한다. 아는 것이라고 다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에 이끌리고 생명 안에 깊이 새겨져 있고 속에서 솟아 나와서 도저히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그것만 말한다. 영의 사역자 곧 생명의 사역자는 지식이든 감정이든 의지든 육신의 능력을 사용하여 억지로 일하지 않고 생명 안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으로 일한다. 영의 사역자는 오직 자기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 그리스도의 사역을 표현할 따름이다.

셋째, 사람을 섬기고 돌볼 때 외적 변화(외모)보다 내적 변화 곧 생명의 변화를 우선적으로 추구한다. 속에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이 별로 없는데 단지 겉으로 선하고 교양 있고 열심을 내는 모양이 있다고 해서 안심하거나 좋다고 말하지 않는다. 반대로 속에서 생명의 변화가 있으면 겉의 모양이 여전히 좋지 않고 생활의 변화가 금방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그를 좋지 않게 보지 않으며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며 기다린다.

넷째, 사람을 정죄하지 않는다. 죄가 있는 사람을 없다고 하거나 혹은 죄를 가벼이 여기거나 간과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죄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그가 큰 죄를 짓든 작은 죄를 짓든 다 죄인이므로 특별히 드러나는 죄를 지을 때만 죄인이라고 정죄할 것도 아닌 것이다.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죄인이며 이미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을 받았다. 지금 온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새삼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인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얼마간의 사람들을 건져내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백성으로 삼는 것이며 그 일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이다. 어떻게 동참하는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루셨는지, 그가 세상에 와서 어떤 사역을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사람을 정죄하지 않고 사랑하며 용서하셨다. 그는 사람들의 죄를 묻지 않고 오직 자신의 그들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희생하심으로써 사람들을 죽음에서 살리셨다. 영의 직분을 수행한다 함은 이러한 주님의 살리는 역사에 동참하는 것이다.

영의 직분을 맡은 신약 성도로서 우리의 할 일은 사람을 비판하거나 정죄하거나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다 하셨고 또한 당신께서 마지막 날에 완전하게 수행하실 것이다) 주님처럼 죽은 자를 그 죽은 가운데서 살리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을 살리는 길은 (우리는 주님처럼 십자가에서 대신 죽을 수도 없고 또 그것은 주님께서 이미 다 이루셨으므로 할 필요도 없으니)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써 사람 속에 생명의 능력이신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전달자, 십자가의 전달자, 성령의 전달자, 거듭난 생명(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의 분여자(分與者)가 되는 것이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9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예가 되는 하나님의 약속 (고후1:17-22) 이상봉 2010.05.02 6855
58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사탄 (고후11:13-15) / 2001.12.23 이상봉 2010.05.02 6569
57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 (고후12:5-10) / 2002.2.10 이상봉 2010.05.02 5404
» 살리는 영의 직분 (고린도후서 3:4-11) 이상봉 2010.05.02 5133
55 약한 것을 자랑함 (고후12:1-10) / 2002.2.3 이상봉 2010.05.02 5124
54 믿음을 확증함 (고후13:1-5) / 2002.2.24 이상봉 2010.05.02 5099
53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사 (고후13:13) / 2002.3.24 이상봉 2010.05.02 5058
52 수건이 벗어진 자 (고린도후서 3:12-18) 이상봉 2010.05.02 5045
51 사탄에게 속음 (녹취) - 황정자 자매 이상봉 2010.05.02 4928
50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마음 (고후10:4-6) / 2001.11.25 이상봉 2010.05.02 4898
49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음 (고린도후서 13:8) (녹취) - 황정자 자매 이상봉 2010.05.02 4854
48 사탄의 속임수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810
47 우리의 돌아보는 것 (1) (고후4:10-18) / 2001.7.15 이상봉 2010.05.02 4728
46 기뻐하며 온전케 됨 (고후13:11) / 2002.3.17 이상봉 2010.05.02 4658
45 사탄의 속임수 (고후11:14,15) / 2002.1.13 이상봉 2010.05.02 4630
44 자기를 통해 그리스도를 표현함 (고후11:16-30) / 2002.1.27 녹취 이상봉 2010.05.02 4619
43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음 (고후13:8) / 2002.3.10 이상봉 2010.05.02 4600
42 하나님께 쓰이도록 연단된 인격 (고후12:11-13:2) / 2002.2.17 이상봉 2010.05.02 4574
41 수동성의 위험 (고후11:13-15) / 2002.1.20 이상봉 2010.05.02 4567
40 진리 안에 있도록 형제를 권면함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538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