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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돌아보는 것 (1)

(고린도후서 4:10-18)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기록한 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한 것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후4:10-18)

바울은 4:10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바울이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을 지금 항상 받고 있다는 것이다. 12절에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더 나아가서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이는 곧 그의 삶이 환난과 고통의 연속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 16절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라는 말이나 17절의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 (4:17)이라는 말도 다 그가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지니고 다닌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육신적으로는) 고난과 핍박을 당하고 그로 인해 몸이 쇠약해지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될 운명 가운데 놓여있음을 분명히 하고자 하여 이 말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고후 4장에서 두 가지 개념을 대조하고 있다. 육신과 예수 생명, 즉 육신의 고난과 예수의 생명을 풍성히 누리는 것이 대비되고 있고, 겉 사람과 속 사람, 즉 겉 사람이 환난을 당하고 쇠해지는 것과 속 사람이 강건해지고 영광을 누리는 것이 대비되고 있다. 그밖에도 여러가지로 대립되는 두 개념이 표현되고 있다.
· 질그릇과 보배 : 질그릇은 보잘것없고 초라한 우리 인격과 우리 몸이고 보배는 빛나고 영광스러운 주님의 인격과 생명이다.
· 겉 사람과 속 사람 : 겉 사람은 후패해지지만 속 사람은 날로 새롭게 된다.
· 육신의 생명과 그리스도의 생명 : 우리 육체는 예수를 위하여 날마다 죽음에 넘겨진다. 즉 항상 고난을 받는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 예수의 생명이 실제로 우리의 죽을 육체에 나타나서 우리 속 사람이 영광스럽고 강건하게 된다.
· 환난과 영광 : 땅에 사는 동안 우리 육신이 잠시 환난을 당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속 사람이 강건하게 되어 주님께 받으실만한 자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영광) 누리게 된다.
·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 땅에 있는 장막 집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바울이 이러한 대립되는 개념들을 소개하며 의도하는 바는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어차피 대립과 갈등 관계에 놓여 있는 두 실체에 대해 분명하게 이해함으로써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오해가 없기를 실패가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몸이 세상에서 곤고하고 고달프고 쇠해지는 것은 인류의 조상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써 우리 몸과 땅(환경)이 저주를 받아 죽음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육신을 더욱 아끼게 되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쇠해가고 꺼져가는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온통 자기 몸을 위하며 거기에 온 신경을 쏟는다. 말하자면 오직 몸의 생명을 위해 몸을 사용하는 것이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한다"(고전6:13)는 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의 삶의 원리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몸을 자기(육신적 생명의 보존)를 위해 쓰지 않고 오직 주님과 주님의 일을 위해 사용한다.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고전6:13) 이렇게 함으로써 몸은 어떻게 되는가? 아무래도 육신을 위하고 거기에 사랑을 쏟는사람보다 몸이 더 피곤하고 어렵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하는가? 우리 몸과 삶이 (주님의 목적을 위해 드려짐으로써) 수고와 쇠약해짐이 더하더라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몸을 기꺼이 드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게 함으로써 참 생명과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것이며,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거두는 것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거두는 것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거두는 것이며, 저주와 심판으로 인해 죽을 운명을 지닌 육의 몸을 팔아서 영원히 사는 신령한 몸을 사는 것이다.(고전15:42-44) 이것은 결코 손해보는 것이 아니고 수지 맞는 장사이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15:42-44)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우리 안에는 사망의 현상이 나타나고 너희 안에는 생명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단지 한쪽에서는 쇠퇴와 감소가 일어나는데 그것과 무관하게 다른 한쪽에서는 강건과 풍성함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같은 존재 안에서 두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문학적 표현으로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사실상 바울과 고린도교회는 한 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겉 사람(옛 사람)과 속 사람(새 사람)을 '우리와 너희' 즉 바울 일행과 고린도교회 형제들이라는 두 존재에다 비유하고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에게서 사망이 역사하고 고린도형제들에게서는 생명이 역사한다는 말은 고후 4장에서 계속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겉 사람은 쇠하고 죽어가지만 속 사람은 강건해진다는 말이다.

바울이 계속 강조하는 사실은 바로 이것이니, 질그릇, 옛 사람, 겉 사람, 육신, 몸, 우리 자아는 약해지고 쇠해지고 망해지지만 그것을 통해 질그릇에 담겨 있는 보배는 더욱 빛나게 되고, 새 사람, 속 사람, 우리 영, 그리고 우리 영 안에 계시는 하나님은 더 강해지고 영광스럽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 하노니"

왜 낙심하지 않는가?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앞 구절에서 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4:14) 우리 몸이 쇠해지고 망해가는데도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곧 우리 안에 있는 새 생명으로 인해 우리가 영원한 몸으로 다시 산다는 새로운 삶(영생)의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우리의 참 존재는 영(그리스도 안에서 지음 받은 새 사람)이지 육신(옛 사람의 영광)이 아니다. 그것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여러분의 몸에는 피부 즉 살 꺼풀이 있다. 그것은 잠시 붙어 있지만 속에서 생명이 역사하는 동안 계속 밖으로 떨어져 나간다. 즉 속에서 새 살이 차 올라오기 때문에 때가 되어서 벗겨져 나가게 되는 것이다. 오직 죽은 동물만이 가죽이 그대로 있을 따름이다. 산 동물은 가죽이 계속 바뀌고 새롭게 되는 것이다. 사실 그 새롭게 된다는 것은 알고 보면 없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속에 새 생명이 역사하여 사람이 새롭게 되는 것은 필연적으로 겉 사람의 소모와 감소, 쇠퇴와 멸망을 동반한다. 바울은 '몸이 강하고 쇠해지지 않는 사람'을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영이 그 속에 있어서 역사하는 사람'을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영은 물론 사람의 몸을 지배하시며 그 속에 역사하신다. 그러나 몸을 영광스럽고 강건하게 만드시지는 않는다. 성령이 우리 육신을 강하게 만드시지 않는 이유는 우리 존재와 삶이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기 때문이다. 성령은 오직 우리 몸을 하나님과 그 목적에 사용되도록 역사하신다. 그것을 위해 때로 성령은 우리 몸에 힘을 주시며 우리 육신의 삶을 돌아보시며 강건케도 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의 생명을 살찌우고 우리 속 사람을 잘 되게 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오해를 하고 있다. 사람들은 두 가지 극단적 생각에 빠져 있다. 첫째,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를 잘 믿으면 즉 그리스도가 우리를 참으로 구원하시면 그가 우리 몸 또는 우리 육신의 삶을 잘 돌보셔서 반드시 우리 몸이 강건해지고 우리 삶의 형편이 나아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바울은 이에 대해 분명히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롬8:10) 우리의 현재 몸은 아무리 예수를 믿고 생명을 얻는다 해도 결코 완전해지지 않으며 더 강건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은 '죄로 인해 죽은 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죄를 용납하실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한 번 정죄하고 심판하여 죽음에 이르게 된 몸을 다시 살리실 수 없다. 만일 그렇게 하신다면 하나님은 말을 이리 저리 바꾸는 분이 된다. 그렇다면 구원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하신 일은 죄로 인해 죽은 몸을 다시 살린 것이 아니라 새 사람 곧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새로운 인격을 창조하신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우리 영을 살리셨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전혀 돌아보시지 않고 오직 우리 영만 새롭게 하고 우리의 정신만 강화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돌보실 것을 구하지도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것 또한 잘못된 생각이다. 비록 우리 몸이 죄로 인해 죽은 것이기는 하나 지금 우리는 이 몸을 입고 살고 있다. 신령한 사람이란 몸은 없고 영만으로 사는 자가 아니고 단지 몸이 영의 통제를 받아 하나님의 목적에 쓰이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므로 몸은 영의 목적에 맞게끔(필요한 만큼) 힘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이 필요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힘(생명)을 공급하신다. "몸은 ... 오직 주를 위하고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고전6:13)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벧전4:11)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 몸 곧 겉 사람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필요한 만큼 통제를 받고 생명을 공급받는다.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을 위해서나 우리 영의 유익을 위해서 필요한 만큼 우리 몸에서 힘을 빼시기도 하고 필요한 만큼 우리 몸에 힘을 불어넣어서 강건케도 하신다.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당연히 육신의 능력이 강건케 되며 삶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하나님이 우리 몸을 전혀 돌아보시지 않아서 몸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해도 힘이 없어서 일을 할 수 없을 지경에 빠지는 일도 없다.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육신에 우선적인 관심을 가지면 안된다. 그것은 우리가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라 영에 속한 자이기 때문이며 육신은 결국 쇠하고 썩어지고 망하게 될 것이고 오직 우리 안에 새로 부어진 하나님의 생명만이 영원히 남으며 또한 장차 거기에 걸맞은 새로운 몸을 입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살찌고 확대되고 영광스럽게 되느냐 아니냐를 보고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를 말해야지 육신이 잘되고 강건해지는 것을 보고 그리스도의 사람이냐 아니냐를 말해서는 안된다.

"겉 사람은 후패하나"

후패(朽敗)란 말의 의미는 [썩어서 못쓰게 된다는 것]이다. 영어로는 [disable - 무능(무력)하게 됨, 쓰지 못하게 됨], [decay - 부패하다. 힘이 쇠퇴하다] 등으로 번역되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왕 노릇하고 그의 생명이 우리를 전적으로 주장하도록 하려면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이 깨어지고 감소되지 않으면 안된다. 보배가 제대로 드러나려면 질그릇은 그 자체로서 찬란하게 빛나고 영광을 발해서는 안되고 도리어 질그릇으로서의 초라함과 부끄러움을 계속 유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한 여인이 주님께 옥합에 담긴 값비싼 향유를 가지고 와서 부음으로써 주님을 영화롭게 한 것을 안다. 그때 그 여인이 주님께 향유를 붓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옥합을 깨뜨려야만 했다. 왜냐하면 옛날의 옥합은 입구가 석고로 봉해져 있었으므로 그것이 깨어지지 않으면 내용물이 밖으로 흘러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의 영광과 생명의 능력을 밖으로 온전히 나타내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바울은 보배가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 자신이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이 짊어졌다고 했다. 16절에서 그는 겉 사람이 후패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의 썩어지고 망해감을 말했다.

겉 사람의 후패, 이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거부할 수도 없고 거부해서도 안된다.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하여 약하게 되고 부끄럽게 될 때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하여 자신을 방어하고 보존하려고 발버둥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되며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 일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일이며 또한 하나님은 우리 속 사람을 강건케 하기 위해서 우리로 기어이 그 과정을 거치게 하고야 말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온전히 드러나서 사람들 앞에서 진정으로 영광스럽고 권세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의 겉 사람은 반드시 깨어져야 한다. 그래야 주님의 생명, 주님의 영광, 주님의 능력이 여러분 안에서 흘러나올 수 있다. 어느 정도까지 깨어져야 하는가? 하나님은 우리 육신(겉 사람)에 속한 모든 것을 다 깨기 원하신다. 우리의 죄와 정욕에 따른 그릇된 삶의 요구가 깨어지고 분쇄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우리의 정당한 요구, 정당한 생활의 필요조차 거부되고 타격을 입게 될 수 있다. 심지어 우리의 타고난 좋은 마음과 우리의 의지와 우리의 타고난 부드러움, 침착함, 타고난 각종 좋은 성품까지 다 깨어지도록 만드신다. 그리하여 육신에 속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의지할 수 없는 자리로 우리를 이끄신다. 그렇게 되어야만 그리스도가 우리 밖으로 흘러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집을 짓는 자나 여행을 하는 자가 예산과 계획을 세워야 하는 것처럼 주님을 따를 때도 우리는 예산과 계획을 세워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안전하고 완전한 길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가 그렇다는 것이고 그것이 성취되는 과정은 결코 안전하고 편안하지 않다. 우리의 마음은 평안할 것이지만 육신은 그렇지 않다. 때로 육신의 어려움으로 인해 마음조차 편치 않게 될 것이다. 그는 우리를 좁고 협착한 길로 인도하신다. 가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 찾는 자가 매우 적은 그런 길로 주님은 우리를 이끄신다. 이것을 미리 알고 각오하는 것이 바로 우리 여행의 예산이고 계획이다. 여러분은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깨어지며 심지어 죽음에 넘겨지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인해서 또는 일상 생활 속에서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취직이나 결혼, 자녀 양육, 가족과 친지들과의 관계, 건강, 이 모든 문제에서 우리는 가지가지 어려움을 겪게 됨으로써 누군가가 우리를 가로막으며 짓밟는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일이 어째서 일어나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어떤 방법으로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주님만이 아신다. 주님은 우리를 감소시키고 단련시키고 온전케 하는 갖가지 방법을 알고 계신다. 그리고 그것을 쓰신다.

우리 안에 있는 문제는 많다. 어떤 사람은 취직을 원하고 어떤 사람은 결혼하기를 원하며 어떤 사람은 결혼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결혼을 원하는 사람은 결혼이 현재의 괴로움과 문제들을 타개해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것을 원한다. 그러나 나는 형제들에게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는 그 어떤 환경적 변화가 우리 겉 사람의 괴로움과 감소와 약화를 완화시켜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다. 설사 다른 사람들은 결혼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어떤 환경의 변화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이유는 주님이 모든 환경으로 인해 우리가 감소되는 것을 허락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어떤 환경적 변화가 생긴다 하더라도 그 바뀐 환경 속에서 주님은 또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감소시키며 분쇄하실 것이다.

결혼을 원하는 사람들이 결혼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처럼 결혼을 한 많은 사람들은 그 결혼이 바로 자기의 족쇄요 자기를 축내는 문제 있는 환경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서 벗어나려고 한다. 결혼이 족쇄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아내에게서 남편이, 남편에게서 아내가, 자식에게서 부모가, 부모에게서 자식이 달아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가 결혼 생활에서 풀려나거나 가족에게서 놓여진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를 다른 방법과 다른 환경으로 여전히 그를 축내고 그를 후패하게 만드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달아나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사로잡히게 되고 우리가 우겨쌈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답답한 일을 당하게 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 삶이 우리 손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다윗은 이것을 알고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시31:15)라고 말했다. 참으로 주님의 손은 주권적인 손이요 전능한 손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손은 결국 우리를 참으로 잘되게 하고 살게 하는 은혜의 손이요 자비의 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주님의 손에 우리 운명을 맡기고 그에게 순복하면 우리의 길은 평안하고 평탄할 것이다. 문제는 마음이다. 우리 마음이 육신의 노예가 되지 않고 주님의 인도를 순순히 받아들여서 기쁨으로 여기게만 된다면 우리 길은 탄탄대로일 뿐 아니라 쉽고 편한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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