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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생각

(고린도후서 10:4-6)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고후10:4-6)

바울은 여러 곳에서 자기의 싸움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싸움 곧 자기 영광과 자기 이익을 위한 싸움이 아닐 뿐더러 사람과 상대해서 싸우는 싸움도 아님을 밝혔다. 그의 싸움은 오직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싸우는 싸움이요, 세상에서 마귀를 몰아내고 생명과 진리를 세우려는 싸움이요, 따라서 사람을 상대로 하는 싸움이 아니라 사탄과 그의 졸개 악령들과 그의 거짓말을 상대로 싸우는 싸움이었다.

그리고 그의 무기 또한 사람의 지략이나 재물이나 권력의 힘 같은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강력(능력) 곧 진리의 힘과 하나님의 지켜 보호하심과 내주(內住)하시는 성령의 역사였다.

그런 그의 무기 곧 바울 안에서 역사한 하나님의 강력한 생명은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과 그들의 거짓말을 대적하고 분쇄하는데 사용되었다. 바울의 사역은 참으로 '진리로 거짓을 무너뜨리는' 사역이었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이고 거짓은 무엇인가? 우리는 먼저 이것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진리란 사람이나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자리이다. 우리가 그 자리에 서 있으면 진실한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거짓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지음 받은 자리를 이미 벗어나 있거나 혹은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이 진리 위에 서 있지 못하고 마귀의 거짓말에 속고 있는 실상이다.

다시 말하지만 진리란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면 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항상 하나님 앞에서 행하며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진리 안에 있는 것이고 진실한 것이다. 물고기에게 있어서 물이 곧 생명의 울타리인 것처럼 만물에게 있어서 진리는 곧 생명의 울타리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벗어나면 망한다.

사탄은 피조물 가운데서 맨 처음으로 진리에서 떠나 거짓과 망상에 빠진 자이다. 그는 진리에서 떠남으로써 멸망에 처했다. 그러나 그는 혼자만 망하지 않고 하나님도 함께 망하게 하겠다는 망상에 빠져 온갖 방법으로 하나님께 타격을 가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하나님께 타격을 가하는 방법은 곧 그의 자녀들을 속여서 그의 예약된 멸망으로 함께 끌고 가는 것이다. 지옥으로 혼자 가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함께 끌고 가기 위해 그의 거짓말로 우리를 유혹하며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대비하고 대적해야 한다. 거짓말로 인생을 속여서 멸망의 길로 몰아넣으려는 사탄의 모든 시험과 공격을 이기고 끝까지 생명을 유지하려면 우리는 바울이 사용한 무기 곧 하나님의 강력(强力)을 사용해야 한다. 지난 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그것은 곧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얻은 '진리'이다. 진리 안에 행하는 것이 바로 힘이고 능력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의 근본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참된 위치를 아는 것'이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 겸손히 엎드리며 그를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즉 사람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행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서든지 하나님 앞에서 지음 받은 자신의 참 위치를 알고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에게 순종할 자이다. 나는 하나님이 지으신 운명대로 그의 생명대로 살 자이며 그 밖으로는 나갈 수 없고 나가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의지하며 그에게만 소망을 두고 있다"고 말하며 그대로 간다면 그것이 바로 진실한 인생이며 그로 인해 우리는 마귀의 모든 시험을 물리치고 이기는 자가 된다. 하나님을 알고 누리며 찬양하는 것이 모든 인생의 지음 받은 자리이며 지음 받은 목적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마귀를 이기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 자리에 견고하게 서 있을 때 우리 인생은 결코 방황하지 않을 것이며 허무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누구든지 아들의 자리에 서 있으면 생명을 얻고, 그 자리를 벗어나 허망한 것을 추구하면 멸망과 죽음에 이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우리가 창조주가 아니고 그의 뜻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다. 겸손이 따로 있고 경건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람이 자기의 지음 받은 위치에 바로 서 있을 때, 곧 "나는 하나님의 작은 아이입니다" 라고 말하며 그 앞에서 실제로 작게 행할 때, 그것이 바로 겸손이고 그것이 바로 경건이다.


겸손의 반대는 교만이다. 교만이란 바로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헛된 마음이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131:1) 시인은 여기서 '눈이 높은 것' 곧 사람이 자기의 지음 받은 위치와 한계를 모르고 분수를 넘어서 헛된 일을 꿈꾸는 것이 바로 교만이라고 말한다.

모든 죄악은 교만에서 나온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지음 받은 위치를 모르기 때문에 헛된 일을 꿈꾸며 추구하고 거기서 모든 허망한 일과 진리를 거스르는 죄악이 나오는 것이다. 사탄은 사람에게 먼저 악을 행하라고 부추기지 않는다. 악은 사람이 자기 위치를 잃어버리고 헛된 자리에 서 있으면 저절로 행하게 되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잠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악을 미워하고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자는 악을 행하게 된다. 결국 모든 죄악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기를 알지 못하는 교만에서 나오는 것이다.


바울이 대적하여 싸운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교만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의 대적은 그러한 교만에서 나온 망상 곧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생각'이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생각은 교만임과 동시에 망상이다. 교만은 위치와 태도를 말하는 것이고 망상은 그 생각의 내용과 실제를 말하는 것이다. 교만은 망상을 낳는다. 인생은 다리를 땅에 붙이고 서 있어야 견고한데 그렇지 못하고 공중에 뜨게 된다면 그의 위치는 견고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 아는 것보다 더한 인생의 가치가 어디 있는가? 진리를 거스려 행할만한 더 나은 일이 어디 있는가? 그러므로 사람이 진리 위에 발을 붙이고 서 있지 않고 (마귀의 거짓말에 속아서) 공중에 떠 있는 채로 시도하는 모든 일은 다 (실제가 아닌) 이론(理論)이요 망상(妄想)에 지나지 않는다.

망상은 정신병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인생에게 정하신 길(진리)을 모르는 것이고 그와 같이 진리를 모르면서도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이렇게 저렇게 설정하고 그 길로 가면 인생이 행복하고 잘 될 줄로 생각하며 망상을 진리처럼 붙잡는 사람은 정신이 이상해진 사람이다.

진리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연구하여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을 때 이미 정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오직 하나님 안에 있고 그분의 말씀 안에 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그 분 앞으로 가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 있으면 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를 알면 자유를 누린다. 자유란 헛된 일에서 벗어나 해방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한다. 그런 사람의 삶이 곧 선한 삶이고 진실한 삶이고 겸손하고 경건한 삶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는 인생의 갈 바를 모르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는 것은 하나님이 괴롭고 슬퍼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바로 우리 자신이 망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인류의 근본 문제는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와 교만에서 모든 문제가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어야 한다. 그를 사랑하여 가까이하며 그를 알기를 힘써야 한다. 그의 뜻을 알고 힘써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자유고 안식이고 행복이고 영광이다.


잠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18:12)

왜 마음의 교만은 멸망을 가져오는가?

첫째, 하나님이 그것을 싫어하시며 그것을 금하시고 꺾으시기 때문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말4: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눅1:51)

둘째, 교만한 생각과 행동은 진리를 거스르는 것이므로 저절로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교만한 생각에서 나온 망상은 곧 '되지 않을 일을 추구하는' 것이다. 우주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그가 허락해야 무슨 일이든지 되고 그가 높여야 사람이 높아지는 것이지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일을 꾀한다고 일이 되고 스스로를 높인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잘난 사람 대단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 안에 있는 자, 그의 정하신 길(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를 사랑하신다. 간단히 말해서 인생이 잘 되려면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야 한다. 그러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마음과 뜻을 알며 거기에 순종해야 한다.


교만과 망상을 우리 곁에 있는 실제적인 일과 연관하여 생각해 보자. 교만이란 내가 내 곁에 있는 한 작은 형제를 대할 때 그의 외형이 좋지 못하거나 그의 행위가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그를 멸시하며 나를 그 위에 높이는 것이다. 즉 내가 어떤 형제를 생명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보지 않고 육신의 모양을 따라 멸시한다면 그것이 바로 교만하게 행하는 것이고 또한 그것이 바로 망상에 빠진 것이다.

왜 그것이 교만이고 망상인가? 형제를 멸시하는 것이 교만이고 망상인 것은 내가 하나님보다 더 나은 판단자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과 내 위치를 생각하지 않고 '내 생각과 기분을 따라' 그와 나를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람의 외형과 행위가 어떠하든지 그것을 보지 않고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귀한 인생이라는 사실만을 보고 그를 형제로 여기며 나보다 낫게 여겨 사랑한다면 우리는 육신의 감정과 느낌을 따라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사람을 판단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이며 진리 안에 있는 것이며 겸손히 행하는 것이다.

사람을 그 생명을 따라 판단하지 않고 육신의 외모와 행위를 따라 판단하는 것은 교만일 뿐 아니라 망상이며 어리석은 행위이다. 그것은 곧 자기 눈을 스스로 찌르는 것이다. 남에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은 이러한 망상을 일깨우는 말씀이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그 잣대를 우리에게 들이대신다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본래 세상에 없던 자이다. 부모님이 우리를 낳을 때 비로소 세상에 태어나 오늘에 이른 것이다. 우리는 어릴 때 똥오줌을 못 가리던 자요 수많은 실수와 실패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렀고 또 현재에도 그때와 별 차이 없는 많은 실수와 허물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들의 사랑 안에서 이만큼 자라서 인간으로서의 권위와 품위를 가지고 여기 서 있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 판단하고 있는 저 사람 곧 내게 작게 보이거나 내 마음에 안 드는 저 사람도 역시 하나님과 사람의 사랑을 받는 하나의 존귀한 인생임을 아는 것이 바로 무언가 제대로 아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그 사람은 먹통이며 교만으로 인해 망상에 빠진 것이다. 내가 귀한 것처럼 형제도 귀하고 내가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살 가치가 있고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처럼 형제도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이고 진실한 태도이다. 어떤 이유로든지 자기를 높이고 형제를 낮추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전혀 근거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형제를 멸시할 때 바로 우리를 교만한 자로 내치실 것이다.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마음이 높아진 사람'은 많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한다는 것은 인생의 목표와 내용이 하나님을 알고 누리며 찬양하는 것에 있지 않고 다른 데 있는 것을 의미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아는 것보다 더 크고 더 귀하게 여기는 것들을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는지! 일생을 성경만 연구한 신학자라도 하나님 아는 것보다 지식의 즐거움을 더 추구하는 경우가 허다하며 가장 경건한 사람조차 하나님 아는 것보다 자기 영광과 자기 성취를 더 추구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고린도교회의 거짓 선생들은 무엇을 했기에 바울로부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교만하게 행했다'고 책망을 받았을까? 그들이 '하나님은 아무 것도 아니다'고 가르쳤거나 '하나님은 알 필요가 없으니 무시하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쳤을까?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대해서 말했을 따름이었다. 그들은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더 경건해야 한다고 사람들을 가르친 자들이었다.

그들의 유일한 문제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결국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생명으로 삶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며 영화롭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주의의 회복을 획책하던 거짓 무리들은 그리스도를 제쳐놓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말한 것이다. 이로서 그들은 자신들이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순종하는 자들이 아님을 드러내었다. 그들이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길을 거부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계시를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한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 영광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사람의 영광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얼마나 '하나님 아는 것'에 문제가 있는 태도인가! 그리스도가 오시고 또한 그로 말미암아 성령님이 오심으로써 하나님과 사람이 영 안에서 하나가 되는 놀라운 세계가 전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육신대로만 아는 자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계속 죽은 유대교의 형식적 경건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천 년 이상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과 교통(관계)을 추구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을 돌아보지 않았다.

유대주의자들이 교리와 의식 준수와 같은 종교적 방법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자 하는 것이 아무 효험도 없는 죽은 행위라는 사실을 끝내 깨닫지 못하고 흘러간 물로 물레방아를 돌리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을 계속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 진정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일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누리고자 했다면 그 방법이 무용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즉시 알아차리고 율법과 선지자들이 약속한 새로운 방법 곧 그리스도와 성령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 앞에는 이미 베드로와 요한, 바울 같은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함으로써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을 누리는 무리들 곧 교회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누리는 자들, 하나님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알아서 하나님과 일체가 되어 움직이는 사람들이 지금 자기들 앞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누리는데 있지 않고 사람의 영광에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그것을 외면하고 율법 준수와 각종 외형적 경건의 예법들을 고수하고자 했던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 기도를 하는 것, 성경을 읽는 것, 구제를 하는 것, 금식을 하는 것, 선행을 하는 이 모든 것은 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누리기 위한 방법이며,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는 과정에서 나온 산물이다. 그러므로 이런 모든 종교적 행위의 이유와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데 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연합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있다. 모든 경건의 모양은 다 하나님을 아는 것(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는 것)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 자신과는 비교될 수 없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일을 아는(하는) 것' 간에는 차이가 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일을 사랑하는 것 간에도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가장 중시되어야 할 일은 설교도 성경 공부도 기도도 아니고, 전도나 선행이나 생활을 지혜롭고 규모 있게 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 자신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교통하며 우리 마음이 그의 마음과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이것이 가장 귀한 것이며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이보다 더 귀하고 더 추구하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우상이다. 그런 마음은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교만한 마음이다.


이러한 교만은 비천한 죄인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지위가 높고 가진 것이 많고 외형이 좋은 자들에게서 나타나기 마련이다.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중심에 앉았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 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어늘....네 큰 지혜와 장사함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인하여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열왕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겔28:2,5,17)

지혜와 재물의 부유함이 두로 왕의 마음을 교만케 한 것과 같이 많은 지식과 경건의 모양이 교회 안의 어떤 사람들의 마음을 교만케 만들었다.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노니" (고전4:18,19)
그러므로 언제나 자기가 무지하고 비천하며 약하다고 느껴지는 사람보다 지혜롭고 강하며 부유하다고 느껴지는 사람이 훨씬 더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 아는 것, 하나님 믿는 것을 가장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곧 자기의 죄인 됨과 죽을 운명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자아가 살아 있는 사람이 하는 모든 생각과 일은 다 결국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유능한 자가 되고자 할 것이 아니라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이 허망하고 교만하게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것이며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신17:16-20)

이스라엘의 왕에게 하신 이 말씀대로 하면 된다. 즉 소극적으로는 우리 마음을 진리에서 멀어지게 할만한 것들을 멀리 해야 하고, 적극적으로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는 길이다. 왕은 큰 권세와 부를 소유하고 있으므로 극히 조심하지 않으면 금새 그 마음이 교만하게 되어 하나님의 길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왕은 소극적으로는 아내와 말(군사력), 금은보화와 같이 그의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것들이나 그가 의지하고 자랑할만한 것들을 가까이 하지 말아야 했고, 적극적으로는 율법책과 선지자와 충언을 하는 성실한 신하들을 늘 곁에 두고 그것들을 청종해야만 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본래 매우 지혜로운 자요 하나님의 큰 은혜 가운데서 출발한 복된 사람이었지만 마땅히 주의해야 할 것들에 주의하지 않음으로써 마음이 교만해지고 그 행위가 허망하고 어리석게 되어서 말년에 이르러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말았다. 그는 자기가 죄 중에서 잉태된 자요 약하고 무능한 하나의 작은 인생이라는 사실을 잊고 그 마음을 높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나이든 충신들의 조언을 무시한 결과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만 것이다.


또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헛되이 마음이 높아진 교만은 사탄이 주입하는 '망상'을 거부하지 못하고 수용하는 데서 온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일1:6-9)

이 말씀처럼 망상 중에 제일 큰 망상은 자기가 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망상에는 처음부터 자기는 전혀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망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죄가 있었지만 예수를 오래 믿다 보니 좋은 사람이 되어서 이제는 내가 연약한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망상 곧 이제 내가 좋은 사람이 되었으니 범사에 주님을 그렇게 철저히 의지하지 않아도 다 잘해나갈 수 있다는 망상도 포함된다.

실제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는 것도 심각한 망상 중 하나이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치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요16:1-3)

망상에 빠진 사람은 자기가 거짓말을 해 놓고도 마음 속으로 자기가 참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기가 잘못을 해 놓고도 속으로는 자기가 잘했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잘못한 것을 속으로 알고서도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에 해당하지만 잘못을 저지르고도 속으로 자기가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망상에 빠진 자이다.

바울도 처음에는 망상에 빠진 사람이었다. 그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그 곁에 서 있다가 그의 죽음을 마땅한 것으로 여겼다.(행8:1) 나중에 그는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러한 자기 행위에 대해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했고"(빌3:6)라는 말로 표현함으로써 그의 행동이 결코 하나님을 열심으로 섬긴 것이 아니라 망상에 빠져서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이라는 사실을 고백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핍박당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스럽지 않아서 직접 자신이 그 도(道)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기까지 했다. 그는 그것이 하나님을 참으로 섬기는 길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분명히 크게 잘못하는 일이었다. 오늘날에도 이런 망상에 빠져서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왜 사람들은 이런 망상에 빠지는가? 그 이유는 첫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는 계시가 없어서 진리도 모르고 자신의 실상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망상에 빠져서 허무한 행동을 하고 헛된 길로 걸어가는 것은 그들이 참으로 관심이 있고 사랑하는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이것을 아는가? 사람은 지금 처음 지음 받은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락했다. 그래서 아무리 경건하고 선한 소원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 본성에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은 없고 오직 자기를 사랑하고 사람의 영광을 취하려는 욕망만 가득하다.

또 타락으로 인해 사람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과 '하늘의 참 생명'과 '참 영광'을 볼 수 있는 눈을 상실했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도저히 취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취하겠는가?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오직 눈에 보이는 바 사람의 영광, 사람으로부터의 칭찬과 사람들이 보기에 그럴듯한 경건을 추구할 수밖에 없고 육체가 좋아하는 쾌락을 인간의 참 행복과 기쁨으로 착각하며 집요하게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구하여 우리 눈이 밝아지도록 해야 한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부어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바로 보고 바로 알고 있어야 한다. 눈이 열려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것이요 가장 좋은 것이며 완전한 소망과 행복임을 늘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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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예가 되는 하나님의 약속 (고후1:17-22) 이상봉 2010.05.02 6852
58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사탄 (고후11:13-15) / 2001.12.23 이상봉 2010.05.02 6569
57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 (고후12:5-10) / 2002.2.10 이상봉 2010.05.02 5404
56 살리는 영의 직분 (고린도후서 3:4-11) 이상봉 2010.05.02 5133
55 약한 것을 자랑함 (고후12:1-10) / 2002.2.3 이상봉 2010.05.02 5124
54 믿음을 확증함 (고후13:1-5) / 2002.2.24 이상봉 2010.05.02 5098
53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사 (고후13:13) / 2002.3.24 이상봉 2010.05.02 5057
52 수건이 벗어진 자 (고린도후서 3:12-18) 이상봉 2010.05.02 5045
51 사탄에게 속음 (녹취) - 황정자 자매 이상봉 2010.05.02 4928
»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마음 (고후10:4-6) / 2001.11.25 이상봉 2010.05.02 4894
49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음 (고린도후서 13:8) (녹취) - 황정자 자매 이상봉 2010.05.02 4853
48 사탄의 속임수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810
47 우리의 돌아보는 것 (1) (고후4:10-18) / 2001.7.15 이상봉 2010.05.02 4728
46 기뻐하며 온전케 됨 (고후13:11) / 2002.3.17 이상봉 2010.05.02 4655
45 사탄의 속임수 (고후11:14,15) / 2002.1.13 이상봉 2010.05.02 4630
44 자기를 통해 그리스도를 표현함 (고후11:16-30) / 2002.1.27 녹취 이상봉 2010.05.02 4619
43 진리를 거스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음 (고후13:8) / 2002.3.10 이상봉 2010.05.02 4600
42 하나님께 쓰이도록 연단된 인격 (고후12:11-13:2) / 2002.2.17 이상봉 2010.05.02 4574
41 수동성의 위험 (고후11:13-15) / 2002.1.20 이상봉 2010.05.02 4567
40 진리 안에 있도록 형제를 권면함 (녹취) - 이성숙 자매 이상봉 2010.05.02 4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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