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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하나님의 인도를 받음 (1:6,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산에 거한지 오래니 방향을 돌려 진행하여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가고...."(1:6,7) 호렙산(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신 방법 곧 이스라엘 진이 어떻게 움직였는가 하는 것에 대해 민수기는 이스라엘 진이 구름의 움직임과 그것을 전하는 나팔 소리에 의해 진행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신명기는 그렇게 표현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는 것같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말씀하신 것을 연상케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기의 생각을 전하실 때는 나팔소리나 구름의 움직임으로 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너무도 친밀하시고 가까이 계신지라 그런 간접적인 방법을 쓰지 않으셨다. 이것이 발전하여 오늘날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친히 말씀하시며 우리와 교통하고 계신다. 창세기의 분위기와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의 분위기는 조금 다르다. 출애굽기 등에서는 무언가 방대한 조직이 있고 여러 가지 의식과 규례와 모형적 예법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 일시적이고 형식적인 것이다.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9:8-10)


 

그러나 신명기에 오면 상황은 도로 반전되어 비교적 의식과 예법이 적어지며, 심지어 중보자적 존재인 제사장도 비교적 적게 나타난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보다 직접적으로 백성들과 친교하는 것을 보여준다. 혹 제사장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예식적 도구로서가 아니라 그저 말씀을 증거하는 도구로서 나타나고 있을 따름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모실 수 있고 또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들의 모든 움직임과 일에 그토록 큰 관심을 가지게 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이며 특권인지! 하나님은 그들이 한 곳에 얼마동안 머물러 있어야 하는지를 알고 계시며 또 그들이 다음에는 어디로 진행해야 하는지도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여행이나 기타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스스로 염려하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눈 아래 있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손 안에 들어 있는 자들이다. 그의 능력은 전능하며 그의 지혜는 착오가 없으며 그의 자원은 다함이 없다. 부르신 자들을 무한히 사랑하시는 우리 하나님은 사람들을 친히 돌보실 책임을 스스로 지시며 그들의 모든 필요를 다 아시고 모든 필요를 준비하시며 채우시는 분이시다.


 

그렇다면 사람이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 다만 '그를 믿는 것'이며 '그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안식하며 언약을 붙잡는 것이다. 언약을 붙잡는다는 것은 곧 언약의 내용을 이루는 그의 말씀(계명)을 순종하는(지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참으로 그들의 움직임에 대해 스스로 염려하고 괴로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스스로 계획하고 판단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의 여정은 호렙에서 가데스바네아에 이르는 모든 길의 과정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에 의해 이미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다만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날 그날을 감사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인도하시는지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한다. 물론 우리는 어디로 움직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교회 즉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사는 오늘 우리는 적어도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보다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문제에 있어서 결코 불리한 위치에 있지는 않다. 분명히 우리는 음성을 듣거나 천둥이 치거나 구름의 움직임을 보는 일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좋은 것, 보다 높고 완전한 것, 보다 친밀한 것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크신 사랑과 완전한 능력으로 각 방면에 있어서 우리를 완전하게 인도하실 수 있는 충분한 대책을 마련해 두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방법에는 일반적으로 서너 가지 방법이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기록된 말씀 곧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 다음으로 우리는 성령님의 직접적인 깨닫게 하심 또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거룩한 신적 성품)에서 나오는 본능적 깨달음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 그리고 환경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 그리고 동일한 생명을 지닌 신실한 형제들의 말을 통해서 인도를 받는다. 이 모든 것에는 다 성령님이 함께 하심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는 성경 읽기로는 미신적이고 상식적인 판단밖에 얻지 못한다. 성령님의 함께 하심이 없는 주관적 깨달음은 망상과 자기 생각일 뿐이다. 성령님의 함께 하심이 없는 환경 역시 주관적인 판단밖에 가져다 주지 못한다. 성령의 간섭 없는 형제들의 말은 인간의 말일뿐이다. 하나님의 인도가 명백하려면 이 모든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의 직관적인 느낌 즉 신적 성품의 본능, 그리고 성령의 부담(직접적 깨우치심), 성경의 가르침, 그에 준하는 신실한 형제들의 일반적인 가르침과 판단, 순리적인 환경, 이 모든 요소들이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확정할 수 있다.


 

우리는 무슨 문제든지 할 수 있는 한 오래 기다리며 신중하게 하나님의 뜻을 판단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하나님의 뜻과 관련하여 우리가 먼저 믿어야 할 것은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분명한 뜻을 예비하고 계신다는 것이며, 둘째 우리가 그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뜻이 없거나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의 약속은 분명하며 그의 나라와 관련된 그의 영원하신 계획은 언제나 확고하게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오락가락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땅에 있는 우리가 그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가져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뜻을 세우실 뿐 아니라 그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우리로 그것을 이행토록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단순한 충동이나 인상, 어떤 지엽적이고 부분적인 환경 여건, 어떤 사람의 가볍고 독단적인 말에 기초해서 행동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지극히 위험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자 하는 사람의 전체적인 인격과 삶이다. 거룩한 자만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거룩한 생명을 가진 자만이 거룩한 세계를 온전히 깨달을 수 있다. 더러운 것을 생각하고 더러운 것을 추구하는 자의 눈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과 그 세계가 온전하게 보일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리고 마음이 겸손하고 참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인도를 온전히 받을 수 있다.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道)를 가르치시리로다"(시25:9) 하나님의 통지를 받지 않고서도 급한 마음으로 움직이거나 행동하려고 생각하는 종은 참된 종이 아니다. 우리에게 확신이 없다면, 조용히 기다리며 앉아 있는 편이 낫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전혀 요구하지도 않는 일을 괜히 자기 편에서 안달이 나서 벌여놓고서는 염려하며 설치고 있다. 우리 영혼의 전반적 상태는 하나님의 인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기억하자. 우리가 겸손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신뢰를 버리고 단순한 마음과 정직한 정신으로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기만 하면 그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분명하게 인도하실 것이다.


 

우리가 특히 주의해야 할 일은 우리가 이미 마음에 작정한 일이나 우리의 의지가 크게 기울고 있는 문제를 두고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고 하며 하나님께 형식적인 인도를 구하는 것이다. 열왕기상 22장의 여호사밧은 이런 점에서 큰 실수를 했다. "제3년에 유다 왕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로 내려가매 이스라엘 왕이 그 신복에게 이르되 길르앗 라못은 본래 우리의 것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어찌 아람 왕의 손에서 취하지 아니하고 잠잠히 있으리요 하고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당신은 나와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싸우시겠느뇨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과 일반이요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일반이요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일반이니이다. 여호사밧이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청컨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 보소서"(왕상22:2-5)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어떤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겠다고 생각하기 전에 그의 마음이 작정되었다는 점이다. 여호사밧은 그릇된 위치와 잘못된 환경 가운데 들어 있었다. 그는 원수의 계략에 빠졌다. 그러한 자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에 적절치 않는 자리였다. 그는 이미 이스라엘 왕을 도우려고 이스라엘로 간 상태였다. 거기서 무슨 하나님의 다른 인도가 있을 수 있겠는가? 결국 하나님은 그가 그의 뜻대로 기울어지도록 내버려두실 수밖에 없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을 망하게 내버려두신 것처럼 그도 긍휼히 여기시지 않고 내버려두셨다면 여호사밧 역시 아람 사람들의 칼에 죽어 전쟁터의 시체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이스라엘 왕에게 "청컨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한지 물어보소서"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과 그의 행동이 이미 참전(參戰)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결정되어 있었다. 그는 나중에 진실한 여호와의 사자 미가야로부터 원정 전체에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실 것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결국은 자기 고집대로 했으며 그 결과 거의 생명을 잃을 뻔 했던 것이다.


 

우리는 예레미야 42장에서도 같은 사건을 볼 수 있다.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이 남아 있는 모든 자를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소서 당신이 목도하시거니와 우리는 많은 중에서 조금만 남았사오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의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말을 들었은즉 너희 말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무릇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시는 것을 숨김이 없이 너희에게 고하리라.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여호와는 우리 중에 진실 무망한 증인이 되시옵소서.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고 좋지 아니함을 물론하고 청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렘42:2-6) 이 말만 들으면 이들은 매우 경건하고 하나님의 참 인도를 받을 자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과를 보면 그들의 실제가 말과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요구에 따라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뜻을 물어서 그들에게 고했다. 하나님의 뜻은 이러했다. "너희가 이 땅에 여전히 거하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너희를 심고 뽑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킴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그 두려워하는 바벨론 왕을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하여 너희를 구원하며 그의 손에서 너희를 건지리니 두려워 말라 내가 너희를 긍휼히 여기리니 그로도 너희를 긍휼히 여기게 하여 너희를 너희 본향으로 돌려 보내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만일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복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우리는 이 땅에 거하지 아니하리라 하며 또 말하기를 우리는 전쟁도 보이지 아니하며 나팔소리도 들리지 아니하며 식물의 핍절도 당치 아니하는 애굽 땅으로 결단코 들어가 거하리라 하면 잘못되리라....무릇 애굽으로 들어가서 거기 우거하기로 고집하는 모든 사람은 이같이 되리니 곧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을 것인즉 내가 그들에게 내리는 재앙을 벗어나서 남을 자 없으리라"(렘42:10-17) 즉 애굽으로 가지 말고 바벨론에 순종하여 이 땅에 남든지 아니면 바벨론으로 가서 살아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판단과 뜻이 자기들의 뜻과 일치하지 아니함을 알고서는 이렇게 말했다. "호사야의 아들 아사랴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및 모든 교만한 자가 예레미야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너희는 애굽에 거하려고 그리로 가지 말라고 너를 보내어 말하게 하지 아니하셨느니라"(렘43:2) 여기서 우리는 교만과 고집이 하나님의 참 뜻을 깨닫지 못하도록 막는 전형을 본다. 그들의 서원과 약속은 거짓이었다. 이것을 알고 예레미야는 말한다. "너희가 나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보내며 이르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에게 고하라 우리가 이를 행하리라 하여 너희 마음을 속였느니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너희에게 명하신 말씀을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고하였어도 너희가 그 목소리를 도무지 순종치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가서 우거하려 하는 곳에서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을 줄 분명히 알지니라"(렘42:20-22)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그들의 뜻대로 되었다면 일은 잘 되어나갔겠지만 하나님의 반응이 자기들의 의지와 다르게 나오자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했다. 예레미야 당시의 거역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예루살렘에 남아 있지 않고 결국 자기 고집대로 애굽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마침내 칼과 기근과 질병으로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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