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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정탐꾼 보내는 것을 허락하심 (1:19-24)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 가나안 경계 지역인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얻으라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신1:21)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지금 바로 들어가도 된다는 보증의 말씀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땅이 바로 지금 자기들 눈 앞에 펼쳐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바로 지금 그리고 올라가서 그 땅을 얻으라고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정탐꾼을 먼저 보내 보자고 말했다.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 앞서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회보케 하자 하기에"(신1:2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들여보내고자 하시는 것은 최근에 즉흥적으로 결정된 일이 아니라 이미 수백 년 전에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음으로써 결정된 일이었다. 또한 하나님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땅을 얻으시고자 하셨다. 오래 전에 그의 친구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지금 때가 되어 그의 후손들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시는 이 일의 궁극적 목적은 단지 그 땅만 얻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땅을 시작으로 하여 온 세상을 다 얻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이러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대해 (그것은 충분히 계시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금이라도 인식이 있었다면 조금도 걱정이나 두려움 없이 편안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그 땅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따라서 정탐꾼은 전혀 필요없는 것이다. 내 형편과 실력은 이만한데 저쪽 형편은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보는 것이 정탐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형편은 어떤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땅을 이미 약속하셨고 또한 그 약속이 이행되는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즉각적으로 수행하실 태세인 것이다. 한마디로 만사 OK인 것이다. 그러므로 저쪽 형편이 어떤지는 알아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땅의 좋고 안 좋음에 대해 알아보겠다는 것도 쓸데없는 일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하나님이 복 주시고 가꾸는 땅이 안 좋은 땅이 어디 있겠으며 또한 (자기들 눈에) 안 좋으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거나 광야에서 살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하나님이 주신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소유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며 그것을 소유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려고 하기 전에 먼저 그것이 어떠한지 따져보았다. 물론 믿음도 따지는 일을 포함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은 따지더라도 언제나 하나님에서 시작하여 환경을 살피는 쪽으로 따지지 결코 환경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을 따지는 쪽으로 가지는 않는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이것이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자의 기본적 태도이다. 사람의 시야에 하나님이 가득 차게 되면 환경의 여러 어려운 문제점들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며 혹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로만 보이게 된다. 믿음은 시험이 올 때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한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1:2-4,12)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의 다수(多數)를 비롯하여 오늘날의 많은 신자들도 믿음이 없어서 범사에 정탐꾼에 의지한다. 하나님의 약속보다 환경의 어떠함, 하나님의 판단보다 인간 자신의 생각과 판단, 하나님의 도우심보다 사람들의 도움을 더 살펴보며 거기에 더 주의한다. 바다에 길을 내시고 황량한 광야를 어린아이를 포함한 수백 만의 사람들이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인도해 오신 하나님이 어찌 자기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수 없겠는가! 그러나 백성들은 정탐꾼을 파송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살아계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단순히 의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민수기를 보면 백성들이 먼저 가나안으로 정탐꾼을 보내자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그렇게 하라고 명하시지 않았느냐고 반문한다. 또 신명기에도 백성들이 먼저 그런 요구를 했든지 안했든지 간에 적어도 모세가 그것을 선히 여기고 받아들인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 신명기 1:21-23에 따르면 하나님이 먼저 그렇게 하도록 명하신 것은 아니고 이스라엘의 그러한 요구를 하나님이 받아들였다. 따라서 적어도 하나님께서 정탐꾼을 파송하도록 허락하신 것은 사실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탐지하게 하되 그 종족의 각 지파 중에서 족장 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 모세가 여호와의 명을 좇아 바란 광야에서 그들을 보내었으니" (민13:1-3)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했다는 것이 아니라 왜 그것을 허락하셨는가 하는 배경이다. 왜 하나님은 정탐꾼을 보내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를 수용하셨을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면 안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민수기에는 단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정탐꾼을 보내신 역사적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만 신명기에는 그 배경과 근원이 설명되어 있다. 신명기가 말하는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정탐꾼을 보내서 안심하고 만족할만한 결과 보고를 듣지 않고서는 아무리 하나님의 약속과 보증이 있어도 그대로 그 땅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은 전혀 원치 않으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 정탐꾼을 보내셨다는 것이다.


 

먼저 여기서 우리는 민수기와 신명기의 차이점과 조화에 대해 볼 수 있다. 민수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사실적으로 서술한 책이라면 신명기는 그러한 일들을 만들어낸 백성들의 영적 배경에 대해 말하고 있는 책이다. 그러므로 후자는 전자의 보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만일 단지 민수기에 기록된 역사만 가지고 있다면 그다지 분명한 교훈을 얻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나 감사하게도 신명기를 함께 가지고 있음으로 인해 단지 역사 뿐 아니라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논평하시는 하나님의 음성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을 알게 되더라도 우리에게는 약간의 의문이 남는다. 이스라엘의 요구가 잘못된 것이고 믿음 없음에서 나온 요구라면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지 말아야지 왜 들어주셨느냐 하는 것과 어찌 되었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을 한 이스라엘의 행위가 무엇 그다지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 답은 이것이니, 곧 정탐꾼을 보낸 행위 자체보다 정탐꾼을 보내고자 소원하는 그 '마음이 있는 한' (그 마음에 상응하는) 행위는 뒤따를 수밖에 없으며 또한 불신앙적인 마음과 행위는 그것이 하나님의 허락이 있었든 없었든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태복음 19장의 이혼문제에서도 이와 유사한 것을 볼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린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19:3-8)


 

남자가 자기 아내를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본래 계획이거나 하나님의 마음에 일치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며 따라서 그런 이유로 이혼을 허락하신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즉 어차피 이혼이라는 일이 세상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절차로 이혼이 허락된 것일 뿐이다. 어차피 마음과 생활에서 이미 갈라서 버린 두 사람이 있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나마 여자가 다른데 가서 새로 시집가는 것마저 불가능하게 되므로 부득이 그것을 허용하신 것이다. 여기에 복잡한 문제는 아무 것도 없다. 인간에게 이혼하려는 마음만 없다면 아무 문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정탐꾼도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정탐꾼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정탐꾼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은 단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정탐꾼에 대한 생각을 품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사태의 실상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에 맞게 하나님께서 대응하신 것이다.


 

그 후의 세대도 광야의 자기 조상들처럼 똑 같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마음에도 없는 일을 수락하게 만들었다.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삼상8:5-9) 이미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그의 지배를 원치 않고 인간 왕을 원하고 있는 자들에게 다른 무슨 조치가 따를 수 있겠는가?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 왕의 제도를 세울 것을 수락하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어떤 욕구를 허용해 준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스라엘은 왕을 구하지 말았어야 했다. 여호와로 만족스럽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실제로 그들의 왕이 되어 그들을 모든 어려움에서 구해주시고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지 않으셨던가? 왜 지금까지 그들을 위해 싸워주신 하나님을 제쳐놓고 육신의 군대와 육신의 장수, 육신의 왕을 필요로 하는가? 왜 살아계시고 참되시며 능하신 하나님을 외면하고 약하고 벌레 같은 인간을 의지하려고 하는가? 모든 힘, 모든 지혜, 모든 참된 선이 다 하나님께만 있고 인간에게는 존재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대부분의 인생들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인간의 도움을 더 신뢰하고 더 의지한다.


 

이스라엘이 그들의 마음의 욕구를 따라 한 왕을 얻었을 때 그들은 안식과 평안을 얻었는가?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 왔을 때 그들은 분명히 용맹한 사울 왕을 따랐건만 그들에게는 아무 평안도 없었다. "그를 좇은 모든 백성은 떨더라"(삼상13:7) 사울의 통치를 보면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나라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방해자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전 생애는 결국 하나님을 대체하는 놀라운 인간 왕이 아니라 자기 죄와 자기 백성들의 죄로 인해 고통당하며 비참하게 죽어간 비극적 인생에 지나지 않았다. 선지자 호세아는 이러한 실상을 다음의 짧은 문장으로 잘 표현하였다. "내가 분노함으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호13:11) 요컨대 사울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과 자기 고집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요 해답이다. 사울의 길보아산에서의 수치스런 실패와 멸망은 그 자신의 인생 실패일 뿐 아니라 그러한 인생을 하나님 대신 자신들의 왕으로 요구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체적인 실패를 나타내는 것이다.


 

정탐꾼을 파송하는 것도 알고 보면 믿음 없는 인생들의 '딱한 사정'에서 나온 것이다. 얼마나 답답하고 불안했으면 그렇게 했겠는가? 그들의 마음이 가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의 가난하고 답답한 마음을 참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가난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신뢰하며 의지하는 것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이런 저런 지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실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을 의지하게 마련이다.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이다"(시9:10) 그러나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따라서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알기 어려운 가운데서 숨어 계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그를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 반드시 자기를 계시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아는대로 의지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를 더욱 알리신다. 문제는 하나님을 일단 신뢰해 보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믿고 잠잠히 기다리는 태도를 취하기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를 맛보게 될 것이며 그 결과 더 하나님을 추구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더욱 드러내게 될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노래하게 될 것이다.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6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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