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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먹고 먹히는 생명 / 창1:29,30

2010.05.03 14:52

이상봉 조회 수:2935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1:29,30)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시기 전에 그가 복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구비해 놓으셨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 나올 때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었다.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 물과 공기와 양식이 다 있었다. 아담이 먹을 양식으로 하나님은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주셨다. 그리고 동물들에게는 풀을 먹이로 주셨다.

우리는 이러한 생물들의 먹이 사슬을 통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땅의 질서의 한 면을 엿볼 수 있다. 즉 세상에 있는 모든 생물은 다 자기보다 큰 것 또는 하나님이 자기를 먹도록 정하신 다른 생명체에 의해 먹히게 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어떤 영적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먹이 사슬의 제일 밑에는 풀과 같은 미미한 식물이 있고 제일 위에는 사람이 있다. 사람은 동물의 고기나 식물을 먹고 동물은 그보다 작은 동물이나 풀을 먹고 산다. 최초의 먹이가 되는 풀 종류는 하나님이 주신 공기와 물과 빛을 먹고 산다. 이렇게 한 생명이 다른 생명을 먹고 사는 것은 약육강식의 원리를 나타내고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사실은 이러한 질서를 하나님이 정하셨다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스스로 자기 생명을 보존 내지 확대하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즉 죽고 싶어하는 생명체는 없다는 말이다. 만일 이런 성질이 없다면 생명체는 그 생명을 잠시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다른 생명체가 자기를 먹으려고 할 때 (방어력이 없는 식물은 제외하고)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런 성질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먹히고 만다.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한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에게 먹히지 않도록 정해놓으셨다면 아무도 다른 생명체를 잡아먹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생명체가 일정하게 성장한 후 결국 다른 생명체에게 먹히게 하심으로써 그 위에 있는 생명체가 살 수 있도록 정하셨기 때문에 결국 그렇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생명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안다. 생명이 소중한 근본 이유 (이것은 하나님이 만물을 그의 영광을 위해 지으셨고, 또 만물에 그의 형상이 일부라도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를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자기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은 알기 때문에 다른 생명의 소중함을 어느 정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식물은 할 수 없지만) 생명체를 죽여서는 안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옳은 말이다. 그러한 생각 역시 하나님이 주신 생각이다. 만물을 다스릴 자로 지음받은 사람이 자기 밑에 있는 생명체들을 마구 대하고 마구 죽이는 자일 수는 없다. 그러나 결국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구든지 먹지 않을 수는 없고 또 먹자니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중이라도 식물은 죽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무조건 아낀다고 나설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참으로 소중히 여기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 두 원리 즉 생명은 소중하고 보존되어야 한다는 것과 또 다른 생명을 먹이로 삼는다는 원리는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이것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즉 한 생명은 하나님의 공급으로 충분히 성장한 후 다른 생명체의 생명 유지를 위해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봉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아무리 미미한 생명체라 할지라도 모든 생명체는 소중히 여겨지고 보존되어져야 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그 생명체는 그냥 자기 생명을 보존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살 수 없고 때가 되면 반드시 다른 생명체를 위해 어떤 식으로든 봉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불행과 저주의 상태가 아니라 창조의 아름다운 질서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처음에 사람이나 기타 동물들에게 식물만을 먹도록 정하신 것을 안다. 그러므로 동물이 고통을 못느끼는 식물이 아니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다른 동물을 먹는다는 것은 타락 이후에 생긴 불행한 일이요 저주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다른 생명을 먹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며 그것 자체는 결코 잘못된 저주의 상태가 아니다.
생명이 다른 생명을 위해 먹힘으로써든 어떤 식으로든 봉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원리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일방적으로든 상호적으로든 서로 돕고 서로 생명을 공급하지 않으면 안된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13:13,1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행2:42,44)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4:32)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12:5,6)

쥐가 고양이에게 먹히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쥐는 그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으면 거부하다가 마지 못해 먹힌다. 또 고양이 역시 마지 못해 쥐를 잡거나 감사하면서 그것을 먹는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생존을 위해 물고 물리는 것뿐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고 자기가 먹고 부리는 자들을 안다. 주님을 보라. 그는 자기 목숨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스스로 하나님께 드렸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5)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10:18)  

이것이 바로 사람의 권세이고 영광이다. 할 수 없이 먹히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스스로 그 생명을 내어주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드려지는 것이 합당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이 아름답고 합당하다. 아버지와 아들은 한 생명이며 형제들 또한 한 생명이다. 그러므로 서로를 위해 자기의 모든 것, 생명까지라도 내어주며 섬기는 것은 지극히 합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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