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제46과 나사로를 살리심

이상봉 2010.05.05 13:27 조회 수 : 2790

제46과 나사로를 살리심 

 

요한복음 11장
 

75.충분히 기다리신 후에 일하심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요11:6,7)  


주님은 나사로를 살리시기로 마음먹으셨다. 그러나 주님은 즉시 나사로의 동네 베다니로 출발하지 않고 계신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물다가 그리로 가셨다. 주님이 즉시 나사로에게로 가지 않으신 것은 그 계시던 곳에서 바쁜 일이 있었거나 아니면 일부러 그랬을 것이다. 주님이 나사로를 특별히 사랑하는 친구로 생각하고 계셨던 것을 감안하면 주님이 가려고 하는 마음만 가졌다면 만사를 제쳐놓고 즉시 그리로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즉시 가시지 않은 것은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것이다. 왜 그랬을까? 주님이 가진 생명의 권능을 여러 사람들에게 보다 확실하게 나타내 보임으로써 사람들로 자기를 믿도록 만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어떤 일로 주님께 기도를 하고 기다리지만 주님이 우리 뜻대로 급히 움직이시는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종종 받게 된다. 그때 우리는 그 일들이 우리에게는 한시가 급한 일인데 어째서 주님은 그렇게 응답을 지연시키시는가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급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일보다 더 급한 일은 주님 자신을 알고 깊이 경험하는 것이다. 주님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종종 우리의 여러 급한 일들을 이용하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이 주님께 눈을 돌리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여유 있을 때 주님께 관심을 가지고 그 분의 생명을 추구하고 경험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급히 찾을 수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을 맞았을 때 우리로 당신의 생명을 깊이 경험할 수 있도록 이틀을 기다리게 하신다.  


주님은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주님이 그 곁에 있지 않음으로 인해 그가 고침을 받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11:15) 주님이 곁에 계시지 않음으로써 나사로가 고침을 받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것은 사람들로 주님의 생명의 능력을 더 확실히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우리는 항상 지금 즉시 하나님이 우리 문제를 (더 커지기 전에) 처리해주셔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로 당신의 더 큰 역사를 경험할 수 있도록 문제를 키우시는 것을 기뻐하신다.  


76.낮에 행함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요11:7-10)  


그때 주님은 예루살렘(유대)쪽으로 가는 것이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주님이 유대로 가자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죽으러 가는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요11:16) 유대교 지도자들과의 충돌로 인해 주님은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어려운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다시 유대로 가려고 하셨다. 그것은 주님이 유대인들의 박해와 위협이 사라졌을 것으로 생각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때(일할 시간)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일들을 다 이루기까지는 하나님의 보호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결코 사역을 중단케 되거나 죽음을 당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 것임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가 꼭 해야 할 일을 하려고 할 때 그 일이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그의 모든 환경을 돌보신다. 물론 주님도 결국은 유대인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고 우리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정한 시간 동안에는 충분히 일할 수 있도록 보호받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짧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동안에는 우리는 대낮에 길을 걷는 것처럼 머뭇거리거나 넘어지는 일 없이 우리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허락하신 일이라는 확신만 가질 수 있으면 얼마든지 마음놓고 일을 해도 된다. 그때 우리는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77.죽음과 잠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요11:11-14)  


使者가 주님께 와서 나사로를 고쳐달라고 부탁한 때 이미 나사로는 죽어 있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이틀 후에 가서 보니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 이상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자가 주님께 오는 동안에 나사로는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아시고서도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지금 자고 있는데 깨우러 간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제자들이 나사로가 정말 자는 줄로 생각하는 것을 보고서 주님은 나사로가 죽었다고 다시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사람의 육체적 죽음을 진정한 죽음으로 생각하지 않고 단지 자는 것으로 간주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다.(히9:27) 그러나 그 육체적 죽음이 진정한 죽음(멸망)은 아니다. 진짜 죽음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끊어지는 것이다. 나무의 죽음은 겨울에 잎이 떨어지고 바짝 마른 상태로 들어가는 그것이 아니라 뿌리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은 더 나은 삶(생명)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弱한 것으로 심고 强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고전15:42-44) 부활 생명을 받은 사람에게 있어서 육체의 죽음은 멸망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몸으로의 변화의 절정이다.   


사람의 육체적 죽음이 이런 성질을 지닌 것이기 때문에 주님은 나사로가 병들고 죽게 되었을 때에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으신 것이다. 주님이 정말로 큰 일로 생각하는 것은 육체적 질병이나 죽음이 아니라 영혼이 병들고 죽게 된 채로 있는 것이었다. 주님이 오신 목적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주님은 무엇을 어떻게 살리셨는가? 그가 하신 일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불어넣어 그의 영을 살리는 것이었다. 주님이 육체의 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신 것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영이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믿게 하기 위함이었으며 또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렇게 영(정신)이 살아나야 사람이 진정으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육체적 건강이 아니라 영적 건강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니라”(요6:63) 정말로 육은 무익한 것이다. 몸이 아무리 건강하고 무병장수해도 그것이 사람을 살게 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죽이는데 누가 살 수 있겠는가?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시90:3-7) 참으로 살려면 이것을 뚫어야 한다. 주의 노(努), 주의 분내심을 통과할 수 없으면 그는 죽어야 한다. 그러므로 영원히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다고 인정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나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죽은 사람은 그 갈 길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 하나밖에 없다.  


주의 진노(심판)를 통과하려면 아들의 생명을 그 속에 가져야 한다.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생명,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그리스도) 안에 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2) 주님의 목적은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주어 우리 영혼을 살리는 것이다. 그의 목적은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오직 그 한 가지에 있었다. 결코 영혼과 육체의 생명을 한꺼번에 다 살리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언젠가는 한 번은 죽어야 한다. 그리고 그 후에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요 우리의 목표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피하려고 하거나 육체의 생명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주님은 몸을 위하신다.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고전6:13) 몸은 이제 우리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므로 주님이 알아서 관리하신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6:19)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몸을 정욕을 위해 쓰지 않고 주님을 위해 합당하게 드린다면 주님은 우리 몸을 소중히 관리하셔서 우리로 충분히 주님을 위할 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몸의 쓰임(삶)과 휴식(죽음)에 대해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죽기까지 병에 안 걸리고 기운이 쇠잔해지지 않은 상태로 있으면 더 좋겠지만 혹 병에 걸리거나 그것으로 인해 죽게 된다고 하더라도 영이 살아있으면 아무 문제도 없다. 영이 살아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는 것이요 속에 부활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써 영적 생명 곧 부활 생명을 얻는 것과 믿음으로 그것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나사로의 일을 접하셨을 때 인간적인 감정으로 대처하시거나 다급하게 서두르시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주님이 가지고 계시는 생명(부활 생명)을 사람들에게 나타낼 기회로 삼기 위해 여유 있게 대처하신 것을 주목해야 한다.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