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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과 눈물을 흘리신 주님

이상봉 2010.05.05 13:31 조회 수 : 2778

제48과 눈물을 흘리신 주님 

 

요한복음 11장
 

80.눈물을 흘리신 주님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비통)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비통)히 여기시며” 


주님은 마리아와 주변의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마음에 비통(悲痛, 痛憤)함과 불쌍함(憫惘함)을 느끼셨다.(He was deeply moved in the spirit and troubled.) 나사로의 죽음과 그것을 슬퍼하는 사람들의 눈물을 보시고 주님은 감정적으로 크게 격동되었던 것이다. 주님이 나사로의 죽음과 주위 사람들의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서 비통해 하신 까닭은 무엇일까?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첫째,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의 죽음으로 대표되는(드러난) 인간의 저주 곧 사망 아래 있는 인간의 참담한 형편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 때문이었을 것이다. 
 

둘째, 모든 고난과 슬픔의 원인이 되는 ‘죄’와 그것(죄와 사망)을 불러온 마귀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을 것이다.  
 

셋째, 주위 사람들의 태도가 답답하고 한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님은 자신이 나사로의 죽음 문제를 어떻게 보시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문제를 어떻게 능력으로 처리하실 것인지에 대해서 마리아와 주변 사람들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제 막 그것을 실행하시려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주님을 믿고 조용히 지켜보지 않고 마치 이제는 주님도 아무 소용없다는 듯이 계속 슬퍼하였다. 그들은 주님이 과거에 이미 여러 차례 큰 표적을 행하며 ‘죽은(절망에 처한) 자’들을 살리신 것을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오직 눈에 보이는 대로 생각하며 반응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없는 것이다. 주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답답한 상태에 슬픔을 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님이 깊이 생각한 것은 ‘죄’와 ‘사망’이었을 것이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며 인간의 실패(타락)와 저주의 산물이다.(창3:19) 주님은 마리아와 그 이웃사람들이 그 형제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 때 죄와 사망 아래 놓인 인간의 서글프고 참담한 상황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뿐 아니라 주님은 세상에 계실 동안 내내 저주(죄와 사망) 아래 놓인 인생의 암울한 자리를 생각하며 살았다. 그래서 그는 사실 (성경이 암시하는 바에 의하면) 거의 웃지 않았다. 그가 웃지 않은 것은 그에게 개인적으로 웃을(즐거운) 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전체적인 상황이 웃을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그 저주받은 인류의 대표자로 세상에 오셨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실상은 무엇인가?” 주님의 관심사는 언제나 그것이었다. 그는 언제나 삶을 전체로 보았으며 인간을 전체적으로 보았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삶을 육신의 형편과 느낌에 따라 판단하지 않았다. 지금 내 육신의 형편이 어떤가 하는 것을 기준으로 삶이 좋다 나쁘다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전체적인 상황이 어떠한가 하는 것을 기준으로 삶을 본 것이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보았으며 하나님의 뜻을 보았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뜻) 안에서 인간의 삶이 어떠한가 그것을 생각한 것이다. 육신에는 웃을 일도 있고 울 일도 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를 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떤 위치에 놓여 있으며 세상이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가 하는 그것을 보았다.  


그 결과 주님은 언제나 ‘애통’(哀痛)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인간에게 의가 없으며 진리가 없으며 생명이 없는 것을 비통하게 생각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그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53-6)  


주님은 참으로 애통하는 자였다. 몸이 아프거나 가난하거나 매일 육신(생활)적으로 괴로운 일만 있었기 때문에 애통한 것이 아니라 인생 자체가 애통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무슨 일이 있는가? 사람들은 자기가 아프거나 건강한 것을 생각하지만 주님은 하나님이 사람을 죄로 인해 버렸고(사실은 사람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지만) 하나님 없는 그 자리를 마귀가 차지하고 앉아서 온통 삶을 (죄와 사망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난하거나 부유한 것을 생각하지만 주님은 사람이 영(하나님과의 관계 또는 인간의 존엄성과 영광)은 이미 죽었고 몸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을 생각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특단의 조치가 없는 한 인류에게는 죽음과 영원한 멸망이 기다리고 있을 뿐인 것이다. 이것을 알면서 어떻게 기뻐할 수 있겠는가?  


주님이 인생의 어두운 면만 보는 비관주의자이거나 염세주의자여서 일생을 슬퍼하며 지낸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인간의 절대적인 저주와 사망(절망)을 분명하게 보았기 때문에 희망과 웃음을 갖지 못한 것이다. 물론 주님 개인으로는 절망할 일도 슬퍼할 일도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아들이요 영생을 가진 분으로서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자유로운 자였다. 그러나 그는 개인 자격이 아니라 인류의 대표자로 세상에 온 분이었다.  

 

그 위치에서 곧 죄인의 위치, 종의 위치에서 그는 인간의 실상을 느껴야 했으며 사람들에게 그것을 말해야 했다. 그래서 슬퍼하며 운 것이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6:20-25)

 

주님이 애통해 하신 것은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간의 이러한 절망적 상황에 대해 제대로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유일한 희망인 ‘하나님의 약속’(구원)을 믿음으로 붙잡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인생의 절망을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보이는 세계(육체, 세상) 안에 소망을 두고 있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결코 그것이 임하지 않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는 날에는 그들의 왕국이 무너져 버릴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활을 원했지만 실제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모순과 무지에 대해 주님은 비통함을 금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사랑도 능력도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단지 막연한 ‘기대’와 ‘희망’이었다. 그것은 믿음과 전혀 다른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 약속대로 지금 아들(구원자)을 보내셔서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함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화답하지 못하고 무지와 불신앙 가운데서 다만 ‘장차 좋은 일이 일어나기만 막연히 기대하면서’ 울고 있는 것이다. 주님이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마르다가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고 답한 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이러한 불완전한 믿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서 이러한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울기도 하셨다.(눅19:41) 또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보고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 때 주님은 그들에게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23:28)고 말씀하기도 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이 애통해하신 것은 무엇보다도 불신앙과 거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안타까운 상황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나 마르다를 비롯한 유대인들의 체념과 울음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다. 사실 오늘날 신자들의 체념과 울음은 과거 유대인들보다 더 큰 불신앙을 내포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주님이 나사로의 집으로 오신 것은 그냥 오신 것이 아니라 나사로의 가족들이 불러서 오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주님이 베푸실 구원을 기대하면서 조용히 주님을 지켜보았어야 마땅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주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마치 상황이 완전히 절망적인 것처럼 계속 탄식하며 울기만 했다. 오늘날에도 상황은 동일하다. 문제를 만난 대부분의 신자들의 태도도 이러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입으로는 기도하며 하나님을 찾지만 실제로는 전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그렇다면 어려운 상황을 만났을 때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4-7) 왜 범사에 기뻐해야 하는가? 어떻게 범사에 기뻐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이 기뻐해야 하며 또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상황이 좋기 때문이 아니고 단지 ‘주께서 가까우시기’  (주님이 곁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기뻐하라”가 아니고 “주 안에서 기뻐하라” 인 것이다.  


문제보다 주님(하나님)이 더 크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하나님)이 더 크다. 우리는 항상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만물은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느 때 나온 것이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상황보다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을 더 크게 보아야 한다. 주님이 함께 있으면 지옥이라도 문제없다.

 
만드신 이는 보지 못하고 만들어진 것(세상에 속한 여러 가지 것들)만 보는 사람은 때로 기뻐하고 때로 감사할 수는 있지만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는 없다. ‘나타난 것들, 보이는 것들’을 쳐다보는 사람은 결코 견고한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없으니 그 바라보는 것들이 물결과 같아서 어느 때는 좋았다가 어느 때는 안 좋았다가 하며 요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을 목표로 삼고 바라보는 사람은 항상 기뻐할 수 있으니 주님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슬퍼할 때는 슬퍼하고 괴로워할 때는 괴로워해야 하겠지만 그럴 필요가 없는 일에서까지 슬퍼하며 괴로워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형제가 슬퍼할 때 함께 슬퍼할 수 있으며 형제가 심각한 영적 상태에 처해 있을 때 당연히 슬퍼하며 탄식해야 한다. 그러나 충분히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될 수 있는 환경적인 문제나 육신적인 문제로는 슬퍼하거나 탄식할 필요가 없다. 주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필요한 것을 주님께 구하면 된다. 

 

안 주려는 물건을 빼앗으려는 사람처럼 근심 속에서 억지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염려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구하면 다 해결할 수 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주님이 바로 우리 친구이시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와 평안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주님을 실제적으로 찬송하는 길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길이다. 위기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체험하며 나타내는 기회이다.  


인생의 존재 목적은 그가 만나는 모든 일을 통해서 그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임을 나타냄으로써 그에게 생명을 주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여유롭게 대처해 나감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81.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기도 - 믿음의 기도
 

우리는 주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 드린 기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1:41,42) 주님은 여기서 어떻게 기도했는가?  

 

주님은 하나님께 ‘나는 아버지를 확실히 믿습니다. 살려주실 줄 믿습니다’ 라는 식으로 믿음을 표현하는 요란한 말을 하지도 않았고 ‘주시려면 주시고 말려면 마십시오’ 라든지 ‘할 수 있거든 한 번 살려주십시오’ 라는 식의 체념적인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는 아버지를 깊이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여러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단지 그가 기도를 하는 이유(더 근본적으로는 죽은 나사로를 여러 사람들 앞에서 살리려고 하는 이유)가 아버지의 살아계심과 능력과 사랑을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라 다만 주위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사랑과 능력을 나타냄으로서 그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아버지께 조용히 아뢰었을 뿐이다.

 

우리도 이러한 기도를 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기도는 (믿음을 구하는 기도를 제외하고는) 믿음의 표현이다. 하나님을 진실로 믿지 않고 기도할 때 우리는 횡설수설하게 되며 많은 말을 하게 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의 약속을 알고 붙잡는 것’이다. 죄 사함을 얻고자 하든 일용할 양식을 얻고자 하든 보호와 인도를 얻고자 하든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들을 우리에게 이미 허락하셨으며 약속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당당하게 그리고 담대하게 그것들을 구할 수 있으며 염려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구하고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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