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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과 복음은 가난한 자의 것

이상봉 2010.05.05 13:42 조회 수 : 2791

제50과 복음은 가난한 자의 것 

 

요한복음 12장
 

84.마리아의 절대 헌신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 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저를 가만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12:1-8) 


유월절 엿새 전에 주님은 베다니의 나사로의 집으로 오셨다. 이 나사로는 앞의 11장에서 죽었다가 주님에 의해 다시 살아난 그 나사로이다. 주님을 맞은 나사로와 가족들은 주님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잔치를 준비하는 중에 나사로는 사람들과 함께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고 마르다는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주님께 나아와서 그가 가지고 있던 값비싼 향유를 주님의 몸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는 놀라운 헌신을 하였다. 

 

이 마리아는 전부터 주님을 깊이 청종하였으며 그의 지혜로운 선택으로 인해 주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다.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10:38-42) 

 

그녀는 생명을 사모하는 사람이었으며 다른 어떤 것보다 주님의 사랑을 더 귀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가 주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주님의 사랑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로운 재산으로 생각하였으므로 기꺼이 주님을 위해 그의 소중한 재산인 향유를 부을 수 있었다.  


주님이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나사로의 집으로 온 것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주님은 이때 낮에는 예루살렘에서 활동하시고 밤에는 나사로의 집에서 유숙하신 것으로 보인다. 나사로의 집에서 이루어진 마리아의 헌신 이야기는 마태복음 26장과 마가복음 14장에도 나오는데 거기서 나사로의 집은 ‘베다니에 있는 문둥이 시몬의 집’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거기서 말하는 문둥이 시몬은 나사로 본인이거나 나사로의 아버지 또는 마르다나 마리아의 남편일 것이다. 만일 그가 나사로라면 나사로는 주님에 의해 살리심을 받기 전에 문둥이였다가 고침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나사로와 그 가족들은 매우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주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친구로 삼아 교제하시고 함께 먹고 마셨다. 그렇게 된 것은 주님이 일부러 그런 사람들만 찾아갔고 그들에게만 천국 복음을 전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만 주님의 말을 듣고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닌 유대인들 곧 스스로 경건하다고 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이나 다수의 평범한 유대인들은 주님을 배척하거나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것은 그 시대의 다수의 유대인들이 적어도 ‘마음이 가난하지는’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들의 생활 형편은 어려웠고 환경은 좋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자(메시아)를 기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유대인들은 그 마음이 마리아와 같이 ‘절대적으로(하나님 앞에서) 가난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주님이 예루살렘에 계실 때 예루살렘에서 머물지 않고 그 근교 베다니의 나사로 집에서 머무르셨다는 사실도 유대인들의 상황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정상적이라면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머물러야 할 곳은 예루살렘의 성전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이 참으로 하나님의 처소였다면 하나님의 아들은 마땅히 거기 머물며 사람들로부터 최고의 대접을 받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 까닭은 유대와 예루살렘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알아보지도, 섬기지도 못할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예루살렘과 성전 안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아니라 강도들과 도둑들만 있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모양은 있으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먼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성전을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기들의 이익을 채우는 곳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주님은 마가복음 11-13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성전을 청소하셨고 성전에서 나오면서 “이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 것이다.  


주님은 성전에만 계실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부잣집이나 보통 가정에도 머물며 대접받지 못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멸시받던 세리 삭개오처럼 누구라도 주님을 영접하여 모시고자 했다면 주님은 기꺼이 거절하지 않고 그 집에 들어가셔서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머물 수 있는 곳은 오직 변두리 베다니에 있는 문둥이 시몬의 집뿐이었다.  


주님이 계시던 그 곳은 성전과 거리가 먼 보잘것없는 거처였다. 그러나 그 가장 가난한 집에서 주님은 풍성하기 그지없는 잔치를 즐길 수 있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 중의 하나인 마리아가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으로 세상에서 가장 비싼 헌신을 했기 때문이다.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는 값이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비싼 향유를 주님께 주저 없이 부어드렸다. 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300일분의 품삯에 해당되는 거액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다 놀랐을 뿐 아니라 분노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주님의 제자들도 그랬다. 그들은 마리아가 터무니없는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눈에 마리아의 행동은 규모 없고 무절제한 행동이었으며 광신적이며 충동적인 행동으로 보였다. 주님의 제자 중 하나인 유다는 마리아에게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고 책망하였다. 마가복음은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300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님이 그녀의 행동을 인정하시고 받아들이실 뿐 아니라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하시면서 그녀의 일을 두둔하시고 더 나아가서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고까지 하신 것이다.(마26:20-23)  


그것은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주님은 왜 그녀의 행동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셨으며 참된 헌신의 영원한 표상(모범)으로 삼으셨는가? 주님에게 제자들 만한 상식도 없어서 그랬던 것인가? 또 마리아는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했는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어떤 자리에서 주님을 믿고 받아들이게 되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복음서의 기록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을 만난 사람은 많지만 주님을 진심으로 따른 사람은 오직 몸과 마음이 진실로 가난한 사람들뿐이었다는 사실이다.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한 여인도 주님께 마리아와 비슷한 헌신을 했는데 그 역시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아주 보잘것없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결국 세상에서는 가장 가난한(낮은) 사람이었다. 자기보다 아래가 없는, 가장 가난한 사람의 그 절대적인 가난(형편)은 여유로운 주변 사람들이 충분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의 행동은 그와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제대로 헤아리기 어렵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입장(서 있는 자리)은 무엇이었는가?   


간단히 말해서 그녀에게 있는 유일한 소망이 주님이라는 것이다. 자기를 알아주고 자기를 사랑해 줄 사람도 주님뿐이고 자기 마음을 바칠 곳도, 바쳤을 때 받아줄 사람도 세상에서 오직 주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가난한 사람들 즉 다른 사람들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이웃)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그래도 가난한 사람보다는 더 나은 사람들이다. 밥 먹는 사람이 죽 먹는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 돕는 것이지 죽도 못 먹고 맹물만 먹고 있는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마리아를 보고 왜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허비하느냐 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그들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나은 사람들인 것이다.  


이 여자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어찌 보이든 간에 자기로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들의 책망에 양심의 가책을 받을 처지도 아니었다. 그는 예수가 아니면 세상에서 설 수 없는 자였다. 가난한 자를 도와야 된다는 상식적인 이야기는 그 수준에 있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이 여자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고 하신 것이다. 밥 먹는 사람에게 죽 먹는 사람을 돕지 않느냐고 하면 그는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맹물 먹는 사람에게 왜 너의 맹물로 죽 먹는 자를 돕지 않느냐고 한다면 그는 얼마나 괴롭겠는가?  


이 여자는 자기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쏟아 부었다. 그것은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주님께 자기의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부을 수 있고 자기 인생을 주님께 전적으로 바칠 수 있는 사람은 이 여자와 같이 ‘절대적으로 가난한 사람’ 뿐이다. 조금이라도 딴 데 눈 돌릴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 다른 곳에서 무언가 할 일이 있고 자기를 알아주고 받아주는 사람, 세상에서 설 자리가 있는 사람은 이렇게 무모한 헌신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의 가난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가난하지 않은 사람은 주님이 자기에게 이렇듯 소중한 존재로 자리잡고 있을 수 없다. 혹 주님께 어떤 헌신을 하더라도 후에 남들이나 그 행동의 합리성을 들어 비난을 하면 차라리 그것으로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85.주님의 장사(죽음)를 예비함
 

주님은 마리아의 행동이 주님의 장사를 예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주님과 우리 사이에 조금만 여유가 생겨도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따를 수 없고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며 또 주님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주님은 벌써 여러 번 자기가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다른 제자들은 아무도 이런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으며 장사를 위해 준비하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어떻게 주님의 장사를 예비하게 되었나? 그녀는 자신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발붙일 곳이 없는 자였기 때문에 주님의 처지와 그 길(운명)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주님께서 자기의 길(세상에서의 배척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실 때마다 깊이 공감하고 새겨들을 수가 있었다.  


이에 비해 주님 곁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심지어 제자들이라 할지라도) 다 제각기 자기 일과 계획이 있었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과 성전 문제 등이 그런 것들이었을 것이다.(막13:1-4) 그러나 이 여자에게는 오직 주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말씀과 행동과 가는 길이 그녀의 유일한 관심사였고 또 그것이 분명하게 보였던 것이다. 물론 그녀가 주님의 죽음을 정확하게 미리 알고 그 장사를 위해 향유를 예비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주님의 죽음이 멀지 않음을 직감했고 그 때문에 자기가 주님을 좀 더 오랫동안 가까이 하고 싶다는 보존(保存)의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주님께 향유를 부었던 것이다. 주님께서 이를 아시고 그녀의 행동은 주님의 장사를 예비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86.복음은 가난한 자의 것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 복이요 지혜이다. 이 여자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얻게 되었는가?  그녀는 남보다 나은 무슨 여건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녀는 머리가 좋은 여자이거나 성경에 능한 사람이어서 그런 지혜롭고 복된 선택을 할 수 있었는가? 이 여자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와 영원히 함께 있기를 원하여 향유를 붓기까지 하게 된 것은 그녀가 단지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그리스도 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없는 그녀의 처지가 그녀를 복된 길로 이끈 것이다. 이러한 처지와 상황을 우리는 가난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주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이다.(마5:3, 눅6:20)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 전파되도록 되어 있다.(마11:5) 이론적으로는 어떻든 우리의 경험은 복음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와 미련한 자의 것임을 말해준다. 상식적으로는 복음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자들과 부자들에게 더 잘 전파될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꼭 가난한 자에게 전파되는 것이다.  

 

가난하기만 하면 누구나 복음을 당연히 받아들이는가? 부자는 누구이며 가난한 자는 누구인가? 우리는 부자인가? 가난한 자인가? 부자란 어떤 면에서든지 세상에 속한 것을 많이 가진 자이다. 부자는 자기가 강하고 강화된 자이다. 가장 보편적인 부자는 돈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아쉬운 것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밖에 자기 일이 많은 사람도 부자이다. 어딜 가도 대접받고 설 자리가 있는 사람도 부자이다. 지혜가 많아 자기 인생 길을 스스로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사람도 부자이다. 

 

이러한 부자들은 주님을 따르기 무척 어렵다. 또 물질적으로 가난하다고 다 心靈이(정확히는 ‘靈 안에서’) 가난한 자는 아니며 따라서 가난한 자들이 다 주님을 따르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오직 주님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절대적 가난 가운데 처하지 않으면 결코 주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택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에게 조금만 여유가 있어도 그리스도를 택하지 않을 만큼 세상을 사랑하는 우리 마음의 뿌리가 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원래 지음 받을 때 하나님 외에 아무 것도 없도록 지음 받았다. 우리의 눈이 열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사람의 모든 것이 되도록 하시고 그 안에서 모든 만족과 풍요를 누리게 해 놓으신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가난한 자의 자리에 두시는 것이나 그리로 계속 이끄시는 손길을 향해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하고 감사하며 당연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금 세상에서 여러모로 가난하다면 그것은 이미 복된 자리에 놓여진 것이다. 왜냐하면 그만큼 우리가 영 안에서 가난한 자이므로 그리스도를 따르기 쉽기 때문이다. 바울은 전에는 매우 부요한 자였지만 복음이 가난한 자의 것임을 알고 스스로 가난한 자리로 내려가는 지혜를 보였다. 빌립보서 3:4-9에서 바울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말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은혜와 지혜가 있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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