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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과 기록된 대로 사는 삶

이상봉 2010.05.05 13:44 조회 수 : 2764

제51과 기록된 대로 사는 삶 

 

요한복음 12장
 

87.어린 나귀를 타신 그리스도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12:12-16)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크게 환영했다. 사람들이 주님을 환영한 것은 그들 보기에 주님이 ‘약속의 메시아(구원자)’로 보였기 때문이다. 나사로를 살리신 것과 같은 여러 표적과 착한 일들로 인해 주님은 많은 유대인들에게 구원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들은 주님께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라고 외쳤다.  

 

그런데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다. 왕 같으면 큰 말을 타거나 병거(兵車)를 타야 할 터인데 격에 맞지 않게 나귀새끼를 타신 것이다. 요한은 이것이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된 예언의 성취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예언은 스가랴 9:9이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왕이신 그리스도가 나귀새끼를 탔다는 것은 그의 왕권(王權)이 어떤 왕권이며 그의 힘과 능력이 어떤 힘과 능력인지를 말해준다.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 어린 나귀를 타는 왕의 왕권은 ‘섬기는’ 왕권이며 그의 힘과 능력은 사람을 사랑하며 받들어 살리는 능력이다. 그리스도를 왕이라고 하는 것은 군림하여 부리는 일에 그가 으뜸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으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공의로운 분이라는 것은 그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큰 자나 작은 자나 다 같이 존중하고 귀히 여기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종종 하나님이 매우 높고 엄하며 두려운 분인 것처럼 묘사된 것은 그가 때로 사람들을 책망하며 심판하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일 역시 생명을 위하고 살리는 작업의 한 부분일 뿐 군림하고 부리는 일은 아니다. 범죄는 사람을 죽고 망하게 하기 때문에 그것을 못하게 간섭한 것이지 사람들에게 군림하고 힘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사람들의 삶에 간섭을 한 것은 아니다. 하라 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사람들의 삶을 규제하며 다스린 구약의 하나님(여호와), 진노와 징계를 발하며 그 백성을 두렵게 한 구약의 하나님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부드럽고 겸손한 그 하나님이다.  


88.기록된 대로 사는 삶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은 세상에 오실 하나님(구원자-그리스도)에 관한 여러 가지를 미리 예언했다. 그리고 신약 성경 기자들은 여러 군데서 그 예언들이 주님에게서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증거했다. 그리고 주님 자신도 종종 자신의 삶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요13:18) - 이것은 주님이 신뢰하던 측근에 의해 배신당한다는 예언(시41:9)의 성취를 말한 부분이다.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5:25) - 이것은 세상이 공연히 주님을 미워한다는 예언(시35:19, 69:4)의 성취를 말한 부분이다.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요19: 23,24) - 시편22:18의 성취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요19:32-36) - 시편34:20의 성취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마27:34)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요19:28) - 시편69:21의 성취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26: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눅22:37)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눅24:44)

 

이렇게 주님의 인생은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말씀을 성취하는 인생이었다. 그렇다면 주님은 일부러 자신에 대해 기록해 놓은 말씀대로 맞추어 행동하셨는가? 그렇게 해서 그에 대한 예언의 말씀들이 이루어진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사람이 자기의 모든 행동을 어떤 계획표에 맞추어 움직인다는 것도 불가능하고 또한 외부 환경(다른 사람들의 행동)이 그 계획표대로 조성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일생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루어진 것은 그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살 수밖에 없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다른 사람이 주님처럼 하나님의 뜻에 절대 복종하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며 겸손하고 온유한 왕으로 살았다면 그에게도 성경의 예언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예수말고는 없었기 때문에 예수를 성경에 예언된 그 그리스도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록된 대로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기록된 삶이란 어떤 삶인가? 여기서 말하는 ‘기록’은 일차적으로는 성경의 예언을 말한다. 그러나 더 광범위하게 보면 주님은 단지 그에 대한 기록해 놓은 특별한 예언만 성취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삶에 대해 언급하시고 요구하신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일생을 통해 다 이루셨다. 그러므로 기록된 삶이란 단지 메시아에 관한 예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마땅히 추구할(나타낼) 전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영역을 확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좋다.   


사람의 삶에 대해 언급한 성경의 모든 말씀은 다 하나님이 사람의 삶에 대해 정해 놓으신 창조 원리요 생명의 근본 원리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한 것은 그것의 본질을 말한 것이며 하나님이 거기에 대해 정해 놓은 길과 원리를 말해 놓은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죽도록 정해(기록해) 놓으셨다.(출31:14-15) 그렇다면 안식일을 지키며 사는 것이 바로 ‘기록된 길’이다.  


사람이 안식일에 쉬지 않는 것이 반드시 죽을 일이 되는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만일 그런 법을 만들지 않았다면 단지 사람이 ‘쉬지 않았다’고 해서 죽음을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벌어지지도 않을 일’을 억지로 정해 놓으신 것이 아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완전하게 마치신 후에야 안식하시는 분이시다. 만물을 다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완전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7일째에 쉬신 것이다. 

 

사람이 7일 째 되는 날에 쉼으로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안식에 동참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이루신 모든 창조 사역이 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 또는 신약의 경우 구속 사역을 완전하다고 인정치 않는 결과가 된다. 사람이 7일에도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해 놓으신 일이 부족하므로 자기가 더 해야 한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일에 기초하여 안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근거로 안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과는 관계없는 자요 하나님에게서 끊어진 자이다. 


이와 같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는 단지 쉬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을 자기의 생명의 근거와 원동력으로 삼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마지막 산물로 나온 존재이다. 사람은 6일 째 지음 받았고 사람의 실질적 첫날인 7일 째 되는 날에 바로 안식부터 한 존재이다. 사람은 지음 받자마자 하나님의 안식에 동참한 것이며 이것은 인간 삶의 영원한 원리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일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그리스도) 안에서 쉬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그가 이루신 모든 사역을 찬양하고 인정함으로써만 진정한 삶과 승리를 누릴 수 있도록 지음 받은 자들이다. 따라서 안식일에 쉬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사형을 선고하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진 자요 죽은 자이다. 율법의 정죄나 사형의 집행은 이미 그런 것을 분명히 하는 것 뿐이요 사실을 선고한 것뿐이다.  

 

이상의 예를 통해 살펴본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어떤 일이나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예언)으로 기록해 놓아도 ‘기록된 길’이요 기록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기록된 길’이다. 사람이나 일이나 그 ‘기록된 길’ 곧 하나님의 정한 길을 넘어 ‘기록되지 않은 다른 길’로 갈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철저하게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신” 분이다.(막14:21) 주님이 기록된 대로 가셨다(사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 대해 무슨 인생 각본을 정해 놓으신 것이 있어서 그대로 행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 의미는 주님이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으로서 가장 정상적이고 당연한 삶을 사셨다는 뜻이다.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생명으로 삼아 산 사람이요 오로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버지의 모든 요구에 순종하며 인생 길을 걸어 간 분이다. 그것이 기록된 대로 가는 삶이다.  


주님이 다윗의 집에서 나시고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으며 나사렛 사람이라 불리시고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다는 이 여러 사실들은 물론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그가 메시아이심을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위해 이루어진 일들이며 따라서 이것을 두고 주님이 기록된 대로 사셨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주님의 그런 삶의 내용은 메시아로서의 표시를 위해 특별히 무엇을 하는 가운데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헌신한 그의 전체적인 삶의 일부로서 나타난 것이다. 

 

주님은 당신의 종인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비천하고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셨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온갖 고난받으시다가 마침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다. 이런 주님의 삶은 본인의 인격과 의사와 관계없이 각본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오직 주님 자신이 그런 분이었기 때문에 당연하게 그런 삶이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하나님이 지으신 참 사람으로서, 또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지음 받은 아들로서 순간 순간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다 보니 그 길로 갈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주님에 대해 예언해 놓은 모든 말씀이 그대로 그에게서 적용되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도 주님 자신처럼 살면 자기와 같은 대접을 받고 같은 고난과 영광을 얻으며 같은 길을 가게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제자들에 대해 기록된 길이라는 것이 인생 각본이라면 각각 처지와 여건이 다른 제자들에게 어떻게 그런 말씀을 원리적으로 하실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사람으로 살되 지음 받은 대로, 기록된 대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천하 만물 가운데서 기록된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제 마음대로 가는 존재는 사람밖에 없다. 산이나 들에 있는 나무와 풀과 새를 보라. 여름과 가을에 아무리 풍성하고 화려하게 지내다가도 겨울이 오면 어김없이 기록된 대로 다 벗고, 또한 겨울이 지나 봄이 오면 어김없이 새순을 내놓고 생명의 도약을 한다. 미물이라고 하지만 개나 고양이 같은 짐승들은 먹을 만큼 먹은 후에는 아무리 맛있는 것이 눈앞에 있어도 거들떠보지 않으며 탐심으로 더 먹으려고 덤비거나 싸우지 않는다.  


주님에게서 나타난 기록된 대로 가는 삶의 내용 중의 하나가 바로 ‘어린 나귀를 타신 일’ 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왕, 구원자, 메시아는 크고 위대한 인물로서 사람들 위에서 큰 권세로 군림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로마 황제처럼 큰 말을 타고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오셨다. 그가 짐승을 타신 것은 그가 왕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가 어린 나귀를 타신 것은 그가 왕이라도 세상 왕과는 다른 ‘겸손한 왕’이라는 사실을 나타내었다. 그는 권세가 있는 사람이고 높은 자였지만 사람을 섬기는 사람으로 사셨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권세가 무엇이며 하나님 나라에서의 통치가 어떤 것임을 보여주셨다.  


요한복음에는 주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과 장대에 매달린 구리 뱀과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의 밀로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다 구원자요 왕이신 주님의 인격과 삶의 어떠함을 말해 주기 위해 묘사된 것이다. 주님은 자기의 힘과 권세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누르고 그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해서 더 큰 힘과 존귀를 취하는 세상의 왕과는 달리, 사람들을 실제로 섬길 수 있는 힘이 있는 자신을 연약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 한 알의 밀처럼 땅에 묻히게 함으로써 희생했다. 그는 분명히 사람들 위에 높이 들린 왕이요 구원자였지만 모세 시대에 뱀에 물린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사람들 가운데 장대에 높이 매달아 놓은 놋뱀과 같이 십자가 위에서 높이 매달린 왕이었다.  


이것이 다 기록된 대로 사신 그리스도의 길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의 기록된 길은 오직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결국 하나님께서 ‘사람은 이런 존재다’라고 정해놓은 참 사람의 길이다. 기름부음이 있는 자란 하나님의 참 아들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생명으로 사는 자이며 그의 뜻을 내 뜻으로 삼아 이를 이루기 위해 사는 자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기록된 대로 가는(사는) ‘진실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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