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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과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그리스도

 

요한복음 13장
 

95.발을 씻김 (13:1-15)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유월절 만찬)를 하시는 자리에서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어 주셨다.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까닭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제자들이 먼저 주님의 발 및 서로의 발을 씻어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주님이 그들의 발을 씻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을 끝까지 사랑한다는 마음을 표시하며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려고 하신 것이다.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으실 때 베드로는 황송하여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만류했다. 그때 주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베드로는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두 말씀은 발을 씻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의미는 첫째,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생명(사랑)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고, 둘째, 제자들 중에 더러워진 발과 같은 사람 즉 그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여 새롭게 할 필요가 있는 사람(가룟 유다)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자. 발을 씻는 것은 생명을 새롭게 하고 시원케 하기 위함이다. 발을 씻는다는 것은 몸 전체를 씻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유대인들처럼 먼지가 많이 나는 (황야) 지역을 샌달을 신고 다니는 사람의 발은 항상 지치고 피곤하며 더러워지기 마련이므로 집에 들어갈 때는 발을 씻는 것이 필요하다. 이때 발을 씻는 것은 몸의 더러운 때를 벗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먼지와 땀을 제거함으로써 ‘몸 전체에 생기를 돋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발을 씻는 것은 (근본적인) 죄와는 상관없다. 주님은 베드로를 깨끗하다고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기어이 베드로의 발을 씻으려 하신 것은 그의 지치고 시든 생명이 (풍성하고 온전한 생명의 소유자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새롭고 시원하게 회복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으실 때 그들에게 발에 먼지를 묻혔다고 책망하거나 앞으로는 조심스럽게 다니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먼지 나는 길을 걷는 사람의 발에 때가 끼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책망이 아니라 물을 떠다가 먼지와 피로로 찌든 발을 씻어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을 공급하는 사역이다. 주님은 그렇게 사랑으로 제자들의 먼지 낀 발을 씻어 주셨다. 그러므로 주님이 씻어준 것은 단지 발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이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발을 씻어야 한다. 우리는 이 땅에 발을 붙여 살지라도 근본 소속은 하늘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나그네와 순례자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세상 때를 묻히지 않고 길을 지나가야 한다. 하지만 땅을 밟는 이상 최소한 땅의 먼지라도 묻기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는 종종 지치고 피곤하며 불안하고 권태를 느끼게 된다. 이것은 근본적인 죄의 문제가 아니라 시험과 유혹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 역시 그대로 방치하면 죄(세상)에 빠져서 모든 것을 잃게 만들기 때문에 반드시 그때그때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자에게 있어서 죄가 처리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으면 사탄의 공격 발판이 되는 것처럼 세상의 먼지들로 인한 피로와 권태(생명을 약화시키는 사망의 요소들) 역시 처리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으면 사탄에게 틈을 주게 된다. 우리의 생명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자주 신선함과 활기를 잃게 된다. 그러므로 자주 새롭게 충전되어야 한다. 온 몸을 목욕할 필요는 없을지라도 발은 계속 씻어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이 일을 해야 하는가? 누가 지치고 때로 찌든 발(영혼)을 씻어주어야 하는가? 제자들에게 처음 이 일을 행하신 분은 주님 자신이다. 그러나 계속하여 형제들의 발을 씻는 일은 주님 홀로 하실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교회에게 위임하신 일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형제의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2-15)


이 일은 의식적(意識的)이고 형식적(形式的, 儀式的, 예식)으로 할 일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무의식적이고 자연스러운 상호 섬김으로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즉 이 일은 성찬식을 하듯 세족식(洗足式) 같은 것을 함으로써가 아니라 한 형제가 다른 형제를 만나서 주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격려하고 같이 기도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인 것이다.  


우리는 일터에서 하루의 일을 마친 후 또는 가정에서 일상생활로 인해 피곤하여 말씀을 읽거나 기도할 여력마저 없다고 느낄 때 형제들의 모임에 참석하거나 형제들과 대화를 나누게 되면 피곤이 가시게 되고 생기를 얻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원기(元氣)를 얻어서 주님을 따라가는 일을 계속해나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서로 발을 씻겨주는 일의 의미이다. 발을 씻겨주는 행위의 의미를 한 마디로 말하라면 ‘상호간의 생명의 보살핌’ 바로 이것이다.  


둘째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자.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으려 하신 것은 그 행위로서 그가 제자들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주님의 그러한 마음(사랑)은 조금 전에 마귀에게 마음을 빼앗긴 가룟 유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주님은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이 마귀의 시험과 공격으로 인해 발이 더러워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더러워진 발’은 12명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그 중 한 명인 가룟 유다를 의미하고 개인적으로 보면 12명 모두가 마귀의 시험으로 인해 그 마음의 한 부분이 약화되고 더러워진 상태에 있던 것을 의미한다.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가룟 유다나 (그 비슷한 시험과 유혹을 받고 있던) 다른 제자들이 그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하기 위함이었다. 주님은 처음에 ‘너희의 일부분이 더러워졌다’고 간접적으로 말씀하셨지만 나중에는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직접 말씀하셨다. 그들이 주님의 이러한 사랑 어린 마음을 제대로 받아들였다면 주님을 팔거나 배신하지 않았을 것이다.   


96.발을 씻어줄 수 없는 사람들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줄 수밖에 없었던 첫 번째 이유는 제자들이 먼저 주님의 발 및 서로의 발을 씻어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풍습은 손님이 집에 들어오면 발 씻을 물을 주고 종이나 (특별한 경우) 주인이 손님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다.(눅7:44 참고) 이것은 손님을 크게 대접하는 것이다.  

 

세례요한은 자기가 주님의 신발 끈을 푸는 일조차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는데(막1:7) 이 ‘신발 끈을 푸는 것’은 손님의 발을 씻어주려고 신을 벗기기 위해 하는 일이다. 그런데 주님 일행이 모인 다락방에는 발을 씻어줄 종이나 주인이 없었다. 오직 그들뿐이었다. 그러므로 제자들 중 한 사람이 그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일을 하지 않으려 했다. 그것은 그들이 방금 서로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즉 식탁에 앉는 순서 문제로 기(氣)싸움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눅22:24)  


이것은 지금 제자들의 자리가 주님의 자리와 다르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자리가 다르다는 것은 생명이 다르고 인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는 하늘에 속한 자이고 하나는 땅에 속한 자인 것이다. 하나는 아버지(하나님)께 속한 자이고 하나는 마귀에게 속한 자라는 것이다. 물론 제자들이 완전히 주님과 다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발이 더러워졌다는 말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부분적으로는 분명히 주님과 달리 깨끗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제자들을 위해 자리(처소)를 예비하러 가야 할 이유이다.(14:2,3)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13:33-36) 이 말씀은 지금 제자들의 상태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상태 곧 주님과 길이 다르고 자리가 다른 그 상태라는 것이다. 한 사람은 타인을 위해 목숨이라도 내놓는 자리에 있지만 한 사람은 자기의 영광을 위해 다른 사람의 목숨이라도 팔 그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구원받아야 한다. 새롭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단지 발을 씻어주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결코 ‘남의 발을 씻어줄 수 없는’ 사람으로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베드로는 주님이 네가 나의 가는 곳을 지금 따라올 수 없다고 말씀하시자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가 주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 이것은 어려운 예언이 아니다. 인생의 본질이 무엇인지만 안다면 어린 아이라도 할 수 있는 예언이다.  

 

중요한 것은 생각이나 의지가 아니다. 사람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지식이나 의지가 아니라 생명 자체이다. 남의 발을 씻어주면 내가 종이 되고 낮아지며 죽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떤 결심으로 남의 발을 씻어줄 수 있겠으며 목숨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떤 지식, 어떤 이론과 결심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것은 지식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고 생명의 문제이고 눈(계시)의 문제이다. 무엇을 보느냐 하는 것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결정한다. 주님은 아버지를 보고 있었고 하늘에 속한 영생(사람의 궁극적인 생명)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육신과 땅과 눈에 보이는 영광만 보고 있었다. 그러니 주님이 하는 것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리(처소)가 다르고 생명이 다르다는 것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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