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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과 유다를 향한 권면

이상봉 2010.05.05 13:54 조회 수 : 2760

제55과 유다를 향한 권면 

 

요한복음 13장
 

97.주를 본 받음 (13:12-17)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3:12-15)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주인, 근본)로 생각한다면 범사에 실제로 그를 따라가야 한다. 창조도 모방에서 시작된다. 생명(영생)의 길은 생명이 충만한 사람을 따라가며 그가 누리는 삶을 모방하는 데서 시작된다. 어떤 사람이 나물 먹고 물 마시는 극히 소박한 생활 속에서도 행복해 한다면 우리는 그의 행복이 어디서 오는지를 주목해 보게 될 것이다. 

 

그가 말하기를 나의 행복은 음식 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누리는데서 오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들을 때 그리고 그 사랑은 사랑을 받을 때가 아니라 사람을 사랑할 때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가 들을 때, 우리는 그가 하는 것을 따라할 수 있다. 첫째, 우리도 나물과 물만 먹어보는 것이다. 즉 화려한 물질적 삶을 탐내지 않고 소박한 자리에 있어보는 것이다. 둘째는 그 소박한 환경에서 사람을 사랑하고 섬겨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따라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왕과 주(主)와 선생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가 자기 아래 있는 사람(제자)들의 발을 씻은 것을 따라해야 한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그의 생명(기쁨과 행복)이 그렇게 함으로써 더 충만케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반(反)생명적인 일, 반(反)영광적인 일은 결코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형제의 발을 씻기는 것은 형제만 살고 나는 죽는 일이 아니고 형제도 살고 나도 사는 일이며 형제만 영광(시원함)을 얻고 나는 낮아지는(피곤해지는) 일이 아니라 형제와 내가 함께 영광을 얻고 시원함을 얻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의 주(主) 곧 사람의 근본 되시는 이가 그것을 하신 것이다.  


98.하나님의 위임 권세자 (13:16-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13:16-20) 


주님을 본받는 사람 곧 주님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주님의 제자가 된다. 주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 주님과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은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이 한 일은 곧 하나님이 친히 세상에서 일하신 것으로 간주된다. 이것이 바로 권세의 위임이다. 

 

권세는 어떤 형식적인 직책을 통해 구사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실제적인 능력 곧 그 사람의 생명(인격)과 정신, 속 사람의 어떠함에 의해 구사되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여 그의 영혼을 시원케 해주기를 원하며 그의 발을 기꺼이 씻어주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러한 마음을 가지신 하나님과 한 생명을 가진 것이며 그러한 일을 하는 하나님과 한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그가 바로 아들이고 종(대리인, 보냄 받은 자)이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진심으로 원한 것은 명령에 의해 선한 일을 하는 자가 아니라 생명의 본성과 능력에 의해 선한 일을 하는 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한 선한 생명은 선하신 분(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을 영접함으로써 얻는 것이다. 이것을 종합하면 일의 순서는 이러하다. 첫째, 사람은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 그가 자기의 발을 씻기도록 그 앞에 발을 내밀어야 한다. 사람에게는 본래 형제의 발을 씻길만한 여유(사랑)가 없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하려고 나설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어야 한다. 둘째, 그의 일을 본받아 실행함으로써 그를 더 깊이 영접하도록 해야 한다. 이때 일(발을 씻는 일)은 일 자체로서의 의미보다 주님의 생명을 깊이 누리는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99.끝까지 사랑함 (13:21-32)

 

요한은 13:1에서 주님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증거했다. 이 끝까지 사랑한 자기 사람에는 가룟 유다도 포함되어 있다. 흔히 사람들은 가룟 유다는 주님이 선택하신 참 제자가 아니며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악의 씨이므로 주님이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주님은 유다의 성향으로 볼 때 그가 주님을 배신하고 자기 길을 가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다.  

 

주님은 여러 차례 그러한 사실을 제자들에게 주지시키셨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저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요6:70,7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요13:21) 그러나 주님이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은 유다를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돌이키기 위한 것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23:37)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막14:21) 앞의 말씀은 주님을 끝내 거부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뒤의 말씀은 주님을 끝까지 따르지 못한 가룟 유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이 말씀들은 최종적인 구원을 얻지 못하는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말씀이다. 주님의 제자 베드로와 요한도 순간순간 이어지는 주님의 도우심을 입지 못했다면 이런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사람인 것이다. 


주님은 유다가 야심이 있는 사람이며 그로 인해 마귀의 시험에 걸려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그는 총명하고 일을 잘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주님은 그에게 회계를 맡기셨다. 그러나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의 세계(의의 나라)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기회 있을 때마다 그를 일깨우시며 돌이키려고 애썼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마찬가지였다. 주님은 몇 번이나 자기를 돌아보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13:10의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라는 말씀과 13:18의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는 말씀, 13:21의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13:26)고 말씀하시며 그에게 떡을 찍어주셨다. 그것이 최후의 기회였다. 그 행동은 사람들 앞에서 유다가 바로 배신자라고 직접 말하는 것과 같은 강한 자극이었다. 물론 그 일은 다른 사람들이 눈치를 채지 못하고 본인만 느끼도록 은밀히 진행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끝내 주님의 권면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자기 길을 가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인생(인간)의 저주를 보아야 한다. 유다가 생명의 주를 거부하고 멸망의 길로 간 것은 그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악한 인간이 아니라 보통의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놓여 있는 자리가 어디인가 하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아담(인간)은 이미 저주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가만히 두면 다 악을 행하다가 멸망을 받게 되어 있으며 하나님을 끝내 거부하고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일을 하게 되어 있다. 주님이 오신 것은 이러한 인생에게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다.  


주님이 하시는 일은 진리를 사람에게 일러(일깨워)주는 것이다.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 간의 영적 전쟁의 결과이다. 우리 삶의 배후에는 하나님과 마귀의 전쟁이 있다. 유다가 주님을 배신한 것은 마귀가 그의 마음 속에 악한 생각을 넣은 결과이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요13:2) 이때 주님은 그를 불쌍히 여겨 여러 차례 말씀으로 일깨우셨다.  

 

그러나 최후의 기회마저 그가 거부했을 때 마귀는 그를 완전히 점령하고 접수해버렸다.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요13:26,27) 우리는 이 상황을 주목해야 한다. 유다가 주님의 최후의 권면(돌이킬 기회)을 거절하였을 때 그의 마음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어 결국 파멸로 치닫고 만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과 사람의 의지 중 어느 것이 어느 정도로 작용하여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다만 하나님의 선택이 있다는 것과 그것이 결정적인 구원의 요소요 근본이라는 사실은 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사람의 선택(의지) 또한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도 안다. 유다가 끝내 주님을 따르지 못하고 배신한 것은 그가 (영생을 누리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가 되도록 선택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이 그러한 유다로 인해 마음이 아팠으며(심령에 민망하여) 그를 돌이키기 위해 끝까지 기회를 주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마음을 열어 주님의 권면을 받아들이면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대해 주님이 외친 탄식도 그것이다. 몇 번이나 암탉이 새끼를 품으려 하듯 품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원치 않음으로써 일이 틀어진 것이다.  


주님은 유다가 주님을 팔기 전에도 그가 마귀에게 강하게 사로잡혀 주님을 끝까지 따르지 못할 자임을 알고 계셨다. 그렇지만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일이다. 마귀가 사람 속에 거짓말을 집어넣고 사람을 넘어지게 하려고 흔드는 것은 유다 같은 사람에게만 있는 일이 아니고 베드로나 요한 같은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시험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가룟 유다만 시험을 받은 것이 아니고 가룟 유다만 마귀가 그 속에 악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집어넣은 것이 아니다. 

 

베드로도 그러했고 우리 모두가 다 그러한 것이다.(마16:21-23) 문제는 이러한 자리에서 주님께서 그를 끝까지 잡아서 시험을 이기도록 도우시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22:31,32) 중요한 것은 시험을 받느냐 안 받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돌이키느냐 돌이키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며 돌이킬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베드로와 가룟 유다가 큰 차이가 있는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들은 똑같이 세상 속에서 구별되어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이 (“내 살과 피를 먹으라”는) 주님의 말씀에 걸려 넘어졌을 때(주님을 떠났을 때)도 그리스도가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믿고 주님을 떠나지 않았으며(요6:65-69) 또한 똑같이 시험받았고 똑같이 흔들렸으며 실패했다.  

 

그리고 가룟 유다가 시험에 들었을 때 주님의 일깨우심(요13장)을 받은 것처럼 베드로도 시험에 들었을 때 같은 일깨우심을 받았다.(눅22장, 요13:36-38) 그럼에도 베드로는 최종적으로 승리했고 유다는 실패했다. 거기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딱 한 가지 차이밖에 없다. 그 차이는 이것이니, 베드로는 주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인 고로 실패했을 때 그 마음이 부드럽고 낮게 되어 주님의 말씀 안으로 다시 돌아갔고 가룟 유다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시험 이전에 처음부터 진리에 충실하여 시험에 들지 않거나 넘어지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은혜이다. 이것이 선택받은 자의 가장 큰 흔적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흔들리며 넘어진다. 그럴 때 주님은 끝까지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여러 가지 형태로 그에게 나타내신다. 그것이 바로 가룟 유다에게 행해졌던 직,간접적인 권면이다. 요6:64-71의 말씀으로부터 시작하여 요13장(막14:21)의 말씀에 이르기까지 주님은 여러 차례 유다에게 자기를 돌아보게 하는 기회를 제공하셨지만 그는 그러한 말씀에 진실하게 자기를 비추어보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생명 얻도록 선택받지 못한 사람(멸망의 자식)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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