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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과 산 자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요한복음 14장
 

106.밖에서 안으로 들어오신 그리스도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14: 22, 23) 


하나님은 생명이시므로 죽은 것들과는 함께 하실 수 없다. 지금은 온 세상이 죄와 사망 가운데서 처음 생명을 잃은 상태이므로 부득이 하나님이 이 죽은 세상 안에서 활동하실 수밖에 없지만 때가 이르면 하나님은 사망에 속한 모든 것을 떠나 오직 생명 있는 것들과만 함께 하실 것이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1-4)  


이러한 역사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후 그리고 성령님이 그리스도인들 안에 들어오시게 된 후 벌써 시작되었다. 주님은 이제 세상과는 더 이상 상관하지 않고 오직 자기 사람들과만 상관하신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볼 수 없고 오직 ‘살아 있는 자’(“너희도 살겠음이라”)라고 일컬어지는 자(제자)들만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 성령님이 오신 후 이제 세상은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고 오직 주님의 택함을 입은 사람들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만 하나님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 거룩하지 않은 자들 곧 거짓되고 불의한 자들과는 본질적으로 상종할 수 없다. 이것은 영원 불변의 원칙이다. 주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지내신 것은 특별한 은혜이다.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있어서 죄인들을 상관하신 것은 빛이 어둠이 함께 한 것과 같으며 하나님이 우상과 함께 한 것과 같으며 생명이 사망과 함께 한 것과 같다.  

 

그런 상황이 영구히 지속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특별한 은혜의 기회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1,2)  


이러한 원리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세상과 함께 할 수 없다. 세상이 우리와 함께 하려고 하지도 않겠지만 설사 그들이 우리를 수용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과 함께 할 수 없다. 그들이 우리를 아는 것 같아도 알지 못하는 것이며 자리를 같이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세계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 안에 서 있다. 우리는 의와 진리의 세계 안에 서 있으며 자기를 위해 사는 자리가 아니라 형제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자리에 서 있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이러한 사실을 스스로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 속해 있지 않고 하늘에 속해 있으며 그의 사랑 안에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우리 자신이 그것을 못 느끼고 마치 자신이 여전히 세상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치 자신이 세상에 속한 자인 것처럼, 세상처럼 생각하고 세상처럼 행동하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생명은 사망과 함께 할 수 없다. 백로는 까마귀와 함께 할 수 없으며 백조는 오리 가운데 거할 수 없다. 거기서 백조는 단지 ‘미운 오리새끼’가 될 뿐이다. 아무리 좋은 옷이 탐나고 금은이 탐나더라도 하늘에 속한 보물을 얻은 우리는 그런 것에 마음을 줄 수 없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마11:7,8) 사람이 다르면 자리가 다르고 길이 다른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길을 가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이 왕궁에서 호화로운 (육신적) 생활을 하는 사람의 길을 갈 수는 없다.  


주님은 오늘날 그 분이 우리 밖에나 곁에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정신만 차린다면) 우리 자신이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 지식이 세상의 어떤 지식보다 귀하고 중요하다.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히8:10,11) 성령님은 우리를 가르쳐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며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길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아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하나가 되어 영원히 거하시는 것을 아는가? 우리는 세상이 우리와 본질적으로 (생명이) 다르며 그 길과 최종 목적지가 다르다는 것을 아는가? 그들이 화려하고 편안하고 욕망을 한껏 펼치는 삶을 살더라도 그것은 단지 (제한된) 육신의 삶일 뿐 영원한 삶이 아니며 반대로 우리의 삶이 곤고하고 세상 보기에 초라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껍데기일 뿐 속은 날로 새로워지고 영광스럽게 되어가는 것을 아는가?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도다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시73:1-20) 이 시인이 진리를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성소 안에서였다. 이와 같이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님의 빛이 비취면 우리는 진리를 깨닫고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삶을 살 수 있다.  


107.그리스도의 평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14:27-29) 


그리스도의 평안은 어떤 평안인가? 그것은 진리 안에서의 평안이다. 주님의 평안의 핵심은 진리 곧 ‘사실’을 아는 것이다. 사실을 알면 근심할 필요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실은 일의 ‘전모(全貌)’이다. 당장 눈앞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결국 되어질 일 그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사실(진리)이다. 우리는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그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 일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할 때 당장 눈앞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 일이 최종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주님이 제자들을 떠나 십자가로 가는 것은 ‘당장 눈앞에 전개될 일’로 말할 것 같으면 근심하고 두려워할 일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이 단지 ‘가는’ 것이 아니라 ‘갔다가 다시 오는’ 것이라고 하셨다. 제자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근심 대신 기뻐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진리를 알아야 한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하고 평안하게 만든다.  


주님은 어디로 갔는가? 일차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유대인들에게 잡히러 가셨다. 그러나 그는 단지 잡히러 간 것이 아니라 죽으러 갔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왜냐하면 세상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용납(수용)할 수 없어서 죽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님은 죽으러 간 것인가? 아니다. 그는 죽으러 간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다시 살려고(부활하러) 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은 영생하는 존재라 결코 영원히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26) 씨는 다만 묻을 수 있을 뿐 죽일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매장된 뒤 다시 살아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다만 잡히고 죽으러 간 것이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기 위해”(롬1:4) 가셨다. 그러나 그것도 최종적인 것은 아니다. 최종적인 사실 즉 진리는 무엇인가? 주님 자신의 표현 가운데 그 답이 있다.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즉 주님은 아버지께로 가신 것이다. 그는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그의 자리를 다시 확고하게 하신 것이다. 그는 단지 잡히러 간 것도 아니고 단지 죽으러 간 것도 아니고 단지 부활하러 간 것도 아니다. 그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하여 자기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며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러 가신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사는 삶, 그것이 바로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이고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15:9,10) 죽든지 살든지 우리는 아버지께로 간다.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다 우리를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은 다 우리를 하나님 안으로,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더 깊이 이끌기 위한 것이다. 당장 눈앞에 벌어지는 일은 핍박과 고통과 멸시일지라도 그것은 다 최종적으로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끄는 것이다. 우리는 범사에 이 진리를 보아야 한다. 이것을 알면 모든 상황에서 평안할 수 있다. 

 

제자들에게 더 기쁜 것은 주님이 단지 아버지께로 갈 뿐 아니라 다시 제자들에게 오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주님이 하나님을 제자들 안으로 몰고 온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 주님의 최종 목적은 제자들을 ‘자기(아들)의 세계’로 즉 하나님이 사람과 하나가 되어 사는 세계, 사람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세계,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지극히 거룩한 존재가 되는 세계로 이끄시는 것이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제시된 하나님의 약속이다. 사람을 하나님(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도록 만드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은 오늘 우리에게도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가 죽고 부활하시며 성령이 내려오심으로써) 이미 하늘에서는 성취되었으며 오늘 우리 안에서 순차적으로 성취되고 있다.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계21:9-11)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이미 성취된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성은 어린 양의 아내 곧 교회를 말한다. 교회의 영광은 지극히 귀한 보석처럼 빛난다. 그리스도인이 겪는 모든 고난과 과정은 이러한 빛난 보석 같은 인격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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