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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과 성경과 그리스도

이상봉 2010.05.04 15:10 조회 수 : 2780

제26과 성경과 그리스도

 

요한복음 5장
 

40.성경의 존재 의미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5:39-47) 


유대인들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성경에서 영생을 얻지 못했다. 그 까닭은 그들이 성경이 말하는 바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종들(모세와 선지자들)과 아들(예수 그리스도)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성경을 상고하였으나 영생을 얻지 못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는 곧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곧 아버지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유대인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며 그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나 유대인 자신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자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항상 하나님과 함께 있으며 말씀이 그들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옷소매에 써 가지고 다녔으며 심지어 이마에 말씀을 기록한 두루마리(원통)를 묶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니 자신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말씀을 거절하는 자라고 생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왜 이런 문제가 생겼는가? 어디서 잘못되었는가? 문제는 유대인들이 성경이 무엇이며 모세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성경은 무엇인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정확히 말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전에 그의 종들을 통해서 하신 말씀을 기록해 놓은 책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읽을 수 있다. 먼저 분명히 해 둘 사실은 성경 자체는 하나님이 아니며 하나님의 일부분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성경은 다만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숭상하거나 경전으로 떠받들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말하는 책이다. 그 점에 있어서 성경은 확실한 책이다. 그리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성경은 정확하게 하나님만 말하는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하나님을 빼버리면 성경은 아무 것도 아니다. 성경은 윤리책도 아니고 철학이나 종교서적도 아니고 역사책도 아니며 문학책도 아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을 말하는 책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하나님을 알고 누리는 것을 얻지 못하면 성경은 무용한 책이다. 성경을 읽은 결과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과 ‘하나님을 닮은 사람으로의 변화’가 아니라면 나머지는 다 무의미한 것이며 성경을 오용(誤用)한 것이다. 


사람이 성경을 상고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대인들의 경우 그들은 영생은 얻기 위해 성경을 상고했다. 영생(영원한 삶)은 무엇이며 어떻게 얻는 것인가? 영생은 영원한 삶이다. 영원한 삶이란 단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수준으로 사는 질 높은 삶을 의미한다. 죄와 고통으로 시달리는 삶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의 자유를 누리는 삶이 영생이다. 영생은 환경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삶이다. 


이러한 삶은 당연히 하나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영생을 얻으려면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다”(요17:3)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떻게 했는가? 그들은 성경은 상고하면서도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왜 그랬는가? 그들이 원하는 영생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과 달랐기 때문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복과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복이 다르고 그들이 추구하는 영광과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영광이 달랐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영생은 의와 진리 안에서의 삶 곧 하나님의 거룩한 삶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원하는 영생은 육신의 안락(安樂)이었다. 즉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었고 유대인들이 원한 것은 자기를 보존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인간(세상, 육신)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을 대하여 살아나도록 애굽에서 건져내셨지만 그들은 오직 새로운 애굽, 새로운 인간(이전과 같은 고통과 제한이 없는 확장된 인간 삶)을 갈망했다. 결국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원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을 원한 것도 아니고 (그런 영생을 주는) 성경을 원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아담 안에서’ 형통하고 번영하기를 원했다. 그러니 그들이 성경에서 영생을 얻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가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에 달려 있다. 영생을 사모하면 영생을 얻을 것이고 세상을 사모하면 세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교회를 다니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성경을 읽는 어떤 사람이 진실로 하나님을 사모하고 그 안에서의 삶(영생)을 갈망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잠2:3-5) 

 

그러나 그가 육신의 형통을 사모한다면 그는 그것을 얻거나 못 얻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겠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나 성경은 거기에 관계없으며 영생은 얻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얻고자 하는 영생이 하나님 자신이 아니고 단지 하나님의 도움으로 육신적 삶을 확장하고 형통케 하는 것이라면 그는 성경에서 어떤 도움도 얻지 못할 것이다.  


유대인들은 성경(율법)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많은 가르침을 실행하며 많은 의식을 준수했지만 그 모든 것의 핵심이자 목적인 그리스도(하나님)를 놓쳤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여전히 곤고하고 허무했다. 그들은 영생을 바랐지만 영생은 결코 전개되지 않았다. 오늘 우리는 유대인들의 실패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의 목적과 목표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 무엇 때문에 성경을 상고하며 무엇 때문에 교회 생활을 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추구하는 영생(삶, 복)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절대적이고 궁극적으로 가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하나님) 뿐이다.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거나 교회를 다니거나 목사의 말을 듣거나 그 어떤 선한 일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알고 누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다 무의미한 일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다 그리스도를 알고 누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까닭에 하는 것이다. 성경=그리스도, 기도=그리스도, 찬양=그리스도, 교회=그리스도, 목사=그리스도, 선한 일=그리스도가 아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 해야지 다른 이유로 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성경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몇 가지 예들을 들면 다음과 같다. 
 

1.읽고 이해하기 쉽든지 아니든지 무조건 교회가 전통적으로 오래 사용해오던 성경을 경전처럼 권위를 부여하여 받들며 읽는다. 예를 들어 천주교에서 19세기까지 신자들이 읽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라틴어 성경을 가지고 설교를 하거나 암송을 하게 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오늘날 개신교에서도 문법이 현대적이지 않아 뜻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오래된 번역 성경을 권위 문제 때문에 거의 고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같은 오류를 반복하는 것이다.   

 

2.많은 신자들이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실제로 그 말씀을 실행하는 것과 관계없이 단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고 성경 읽기를 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을 하나님을 알고 누리기 위한 목적으로 쓰는 것이 아니고 성경 그 자체에 신비한 힘이 있는 것처럼 즉 성경을 하나의 종교적 경전으로 생각하고 받드는 것이다.  


불교나 회교나 힌두교 라마교 등의 이방 종교에서는 경전을 읽고 암송하는 것만으로도 거기 적힌 내용(축복)들이 사람에게 적용된다고 믿는다. 심지어 경전 구절을 적은 나무판 같은 것을 만지거나 경전 구절이 적힌 천이나 종이를 바람에 날리기만 해도 거기 적힌 내용들이 사람에게 적용된다고 믿는다.  


3.성경을 기록하는 필사(筆寫)도 오용되는 경우가 많다. 성경 필사가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좋다. 기록하는 가운데서 성경을 조금이라도 더 읽게 되고 내용을 더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팔만대장경을 만든 고려 사람들처럼 경전을 기록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그것을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그렇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행한다.   


4.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같은 속도와 같은 집중력으로 마치 책을 떼듯이 성경을 획일적으로 반복하여 훑는 통독이라는 것도 잘못된 관념으로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 흔히 1년에 1독(讀)한다든지 지금까지 성경을 10독(讀)했다든지 하는 식으로 성경을 읽는 이런 성경 읽기는 성경을 경전으로 생각하여 받드는 마음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성경을 꼭 그렇게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그것이 성경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도 아니다. 성경을 많이 읽는 것 자체에 목적을 두고 성경을 읽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니다. 어떤 경우든 성경을 하나의 영험한 경전으로 알고 받드는 식의 일을 해서는 안 된다. 


5.성경을 다루는 가장 저급한 방법은 성경을 많이 읽고 공부하여 지식을 쌓은 후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거나 나타내는 것이다. 성경 지식을 자기 의로 삼아 사람들에게 자기를 자랑하며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수단으로 삼는 이것이 성경을 가장 오용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바로 성경을 이렇게 사용했다.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 그 차는 경문(經文)을 넓게 하며 (성경 구절을 적어놓은) 옷술을 크게 하고”(마23:5)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마23:3,4) 성경은 어떠한 경우에도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경건한 삶을 추구하는 거룩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기 위한 수단으로 쓰여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유일한 목적은 그리스도를 알고 누리는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하나님(성령)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오직 성경만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많은 경우에 ‘전에 하신 말씀’(기록된 말씀-성경)을 통해 말씀을 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주목하며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는 한 구절이라도 정확하고 깊이 읽고 이해해야 한다. 못 알아듣는 말은 뒤로 넘겨도 된다. 그러나 적어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 알고 반드시 깊이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 알고 깊이 받아들여 즉시 순종해야 한다. 말씀은 순종과 실천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행 없이 말씀을 지식으로만 축적해서는 안 된다.  


성경을 대하는 방법은 ①읽고 ②해석(이해, 연구)하고 ③묵상(암송)하며 ④가르치고(전하고) ⑤다른 사람의 행동을 판단하고(재판하고) ⑥실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행하는 것이다. 읽는 것의 목적이 거기 있고 해석하고 공부하는 것의 목적이 거기 있으며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는 것의 목적이 거기에 있다.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27:26)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도를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 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 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1:22-25)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서도 그것을 실행하지 않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 어떻게 속인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있지 않은 것인데도 그는 자기에게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으므로 마치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롬14:17) 


41.성경의 이해
 

유대인들이 성경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원치 않고 영생을 원치 않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그들이 성경의 맥(脈)을 놓쳤기 때문이다. 성경을 이해하려면 성경의 키(key, 핵심)를 찾아야 하며 그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구약 성경은 크게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추구해야 할 삶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해 놓으신 것이다. 이 세 사람 안에는 그리스도의 인생 곧 하나님의 아들의 인생이 녹아 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받은 영광스러운 사람의 모습 곧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모습이 있었으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나타내고 있다.  


1.아브라함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히11:8-13)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행7:2-5)

 

이 말씀들 안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그리스도(구원자)에 대한 약속을 믿었으며 그것을 갈망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시간적으로 볼 때 아브라함은 그가 받은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주님은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일생동안 순종한 것이 결국 그리스도를 만나서 누린 것과 같다고 인정하셨다.  

 

2.모세
 

모세는 율법을 포함한 모세 오경을 기록한 사람이다. 물론 그 성경들은 모세가 자기의 생각을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모세 오경의 많은 부분은 모세가 하나님 안에서 다루심 받은 그의 인생(영적) 체험을 바탕으로 기록된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이나 그가 쓴 글들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일생(체험)을 통해 하나님께 배운 사실 곧 하나님이 사람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모세는 그의 체험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가? 모세가 일생을 통해 배운 것은 사람의 육적 자아(肉的自我 : 인간적 야망, 생각, 능력)는 반드시 죽어야 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언약)을 받아들여서 그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데 그것을 받아들이고 붙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통해 배웠다. 


사람(아브라함의 자손 : 이스라엘 & 택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 생명 안에서 하나님 아들의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사탄에게 속은 자신의 이전 삶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먼저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한다. 모세는 이러한 사실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양한 형태의 말씀으로 고했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를 비롯한 모세 오경에 나오는 여러 말씀이다.  


모세의 글이 말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이스라엘은 육신적, 세상적, 상식적, 이기적 삶을 버리고 하나님 안에 있는 삶 곧 의와 진리의 거룩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들의 영혼이 잘 됨 같이 그들의 육신적 필요도 하나님이 다 채워주셔서 그들이 세상 사람들처럼 죄와 고통의 길(살기 위해서 죄를 짓고 그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악순환의 굴레)에서 헤맬 필요가 없도록 하시겠다고 하셨다. 

 

둘째, 이스라엘이 스스로 이러한 거룩한 삶(하나님께 순종하고 진리 안에서 사는 삶)을 살기 어렵다고 느낄 때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자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구원(변화)을 가능하게 하는 약속의 구원자,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새롭게 하는 구원자를 보내주실 것이니(신30:1-8) 그를 사모하고 기다리라는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제사제도를 제시했다. 

 

사실 흠없는 짐승을 제물로 바쳐 사람의 죄를 속죄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제사 제도는 모세 때에 비로소 생긴 제도가 아니라 인류의 범죄 직후 즉 아담과 가인과 아벨 때부터 시행되어 오던 것이다. 그것을 모세가 다만 율법화(형식화)한 것이다. 제사제도가 인류 역사 초기부터 있었다는 것은 성경이 일관되게 강조하는 바가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그것을 붙잡으라는 것임을 말해준다.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자 곧 그리스도(여자의 후손, 하나님의 아들, 어린 양)를 통해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모세가 그의 성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한 것은 첫째, 이스라엘이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니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 받은 그들도 거룩한 자가 되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거룩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이 예비하신 은혜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제사제도와 기도가 바로 그것이다. 

 

제사제도는 미래의 구원을 미리 당겨서 쓰는 것이다. 짐승을 통한 속죄와 화목을 통해 이스라엘은 그리스도(구원자)를 통한 속죄와 화목(하나님과의 연합)을 미리 당겨 쓸 수 있었다. 그리고 기도는 사람이 자기의 실상을 깨닫고 자기를 부인하며(내려놓고) 언약(그리스도의 오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이 속히 성취되기를 촉구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는 이러한 모세의 정신을 이해하고 실행한 사람들이 드물게나마 있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막15:43)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눅2:25)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성경을 알고 또한 모세를 알며 진실로 성경과 모세를 사랑한 자들이다. 

 

그리고 이들과 같이 경건한 사람은 아니었을지라도 적어도 자기의 죄를 깨닫고 은혜를 사모하며 약속의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세리 같은 사람이 그러한 사람이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18:13,14) 

 

3.다윗
 

다윗은 아브라함이나 모세처럼 그리스도를 친히 보지 못한 구약 시대의 사람이지만 계시 안에서 그리스도를 먼저 보고 그를 갈망한 사람이며 그의 은혜를 진실로 사모하며 붙든 사람이었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 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시40:11,12)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燔祭)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5-17)

 

이 다윗의 시를 보면 그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고 있다. 그 구원은 자기를 곤고한 환경에서 건져달라는 것이 아니라 곤고한 인격(영적 기근) 즉 타락하고 부패한 자아에서 건져달라는 것이다. 그는 깨끗한 마음과 참된 영을 갈망하고 있다.  

 

그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있었으며 약속하신 은혜의 구원을 간절히 구했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시51:18,19) 이것이 바로 약속을 붙잡는 믿음이다. 


유대인들이 이러한 그들 선조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유하고 있었다면 그들은 성경을 정확하게 이해했을 것이고 또한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성령 안에서 마음을 열고 진실로 성경을 상고했다면 그들은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았을 것이며 그랬다면 약속을 따라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영생을 얻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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