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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과 오병이어의 표적

이상봉 2010.05.04 15:12 조회 수 : 2678

제27과 오병이어의 표적 

 

요한복음 6장
 

42.표적의 의미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6:1-15)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실 때 주님은 대개 그곳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그로 인해 주님이 가시는 곳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어느 때 주님은 모여든 무리들이 (가난해서 먹을 것을 챙겨오지 못했거나 사먹을 곳도 없는 광야이므로) 굶주리고 있는 것을 보시고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는 몇 개의 떡과 물고기로 기적을 행하여 모인 사람들(한 번은 여자와 아이를 빼고 5천명, 또 한 번은 4천명)을 먹이신 적이 있다. 


이 일은 유월절이 가까운 어느 때에 이루어졌다. 요한이 이 기사를 쓸 때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깝다는 사실을 언급한 것은 당시 로마의 속박에 매여 있던 유대인들이 새로운 유월절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던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이다. 즉 유대인들은 과거에 모세를 통해 애굽의 속박에서 벗어났듯이 오실 메시아를 통해 로마인의 속박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주님이 놀라운 표적을 행하자 사람들은 그를 로마의 속박에서 건져줄 구원자로 생각하고 따랐으며 왕으로 삼으려고 했다.(6:15)  

 

그러나 주님이 무리들을 기적으로 먹이신 이러한 일은 말씀이 전해지는 모든 자리에서 항상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태복음 6:1-12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이러한 일은 단지 두 번만 있었거나 극히 제한적인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일은 단지 사람들을 굶주림에서 건지거나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기 위해 이루어진 일이라고만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일은 표적(表蹟, sign)인 것이다. 표적이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말씀하시려고 어떤 일을 일으키신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일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일 이면(裏面)에 있는 메시지(말씀)가 목적인 것이다.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표적을 통해 말씀하시려고 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이 우리 생명의 주(主)시며 그 자녀를 먹이고 기르시는 아버지시라는 사실이다. 마태복음 6:25-32에서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는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염려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기도할 때도 그 일에 대해 많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자녀들의 필요를 아시기 때문이다.(마6:7,8, 6:32) 주님은 이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능력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게 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구원자로 세상에 온 자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이 표적을 행하셨다. 

 

둘째, 주님 자신이 바로 사람의 참된 양식이라는 사실이다. 주님은 이 표적을 행한 후 사람들에게 썩는 양식 곧 사람으로 잠깐 배부르게 하는 육신의 양식만 추구하지 말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정한 양식을 추구하라고 말씀하셨다.(6:35-51) 그리고 그 양식은 바로 주님 자신이라고 증거하셨다.   


주님 자신이 어떻게 사람들의 생명이 되고 양식이 되는가? 그리스도는 다음 두 가지 과정을 거쳐서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신다.


1.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자기를 사람들의 대속(희생)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사람들의 양식이 되셨다. 요한복음 6:53,54에서 주님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죽기 전 날 밤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과 같은 말씀이다. 결국 주님이 주신 하늘의 떡(오병이어의 표적)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오신 자기 자신을 나타낸 것이다.  

 

주님은 이스라엘이 먹은 유월절 희생양의 실체이며 누룩 없는 떡의 실체이다. 어린양과 무교병이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생명이 되었던 것 같이 주님은 죄 가운데서 죽은 모든 인생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신다. 주님은 자기를 드려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셨다. 그러므로 주님이 베푸신 표적의 떡은 그것을 먹는 자에게 그의 옛 생명을 버리고 주님을 자신의 새 생명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2.그리스도는 그의 진리(생명)의 말씀으로써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신다.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생명을 얻는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이 생명의 떡인 것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6:63) 오병이어의 표적은 사람들로 주님의 진리(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기 위해 행해진 것이다. 말씀 안에 있는 아들(그리스도)의 길이 바로 모든 사람이 가야 할 길 곧 생명의 길이다. 주님이 주신 떡은 주님이 사람들에게 한없이 주고 싶어하셨던 진정한 생명의 양식인 ‘진리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이 사람들의 생명이 되시는 것은 실제적으로 그가 사람들의 대속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과 함께 그의 말씀을 듣게 하심으로써 이루어진다. 주님이 자기를 희생의 떡으로 주시는 일과 말씀을 주시는 일은 반드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만일 주님께서 말씀을 증거하심 없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기만 했다면 어떻게 될까? 반대로 주님께서 죽고 부활하심 없이 진리의 말씀만 증거하셨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었다면 사람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알게 해 주고(지식, 계시) 십자가의 희생은 그 아는 바 아들의 삶을 실제로 살 수 있게 해 준다(능력). 주님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자로 만들어 사람으로 하여금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로 살 수 있게 만든다. 주님의 부활 생명은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생명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힘을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율법의 차이가 바로 여기 있다. 율법도 사람에게 생명의 말씀이 되지만 거기서 말하는 생명은 단지 진리라는 뜻이지 사람을 살린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은 죄로 인해 죽은 인생에게는 이름뿐인 생명의 말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의 말씀과 삶으로 사람의 길을 보여주실 뿐 아니라 그것을 실행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는 참 생명의 말씀이시다. 그래서 그의 말씀을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을 통해 우리는 표적의 의미와 목적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요한이 말하는 바는 표적의 목적은 결코 표적 자체를 즐기거나 누리는데 있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그로 말미암는 영생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추구하게) 하려는데 있다는 것이다.   


주님을 따른 무리들이 다 영생을 얻고자 하여 주님을 따른 것은 아니며 그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려고 모인 것도 아니었다. 다수의 사람들이 단지 호기심으로 혹은 병을 고치기 위해 모였으며 주님을 따랐다. 이런 사람들 곧 그리스도와 진리가 아니라 자기의 생활에만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주님은 복음을 전하시기 전에 먼저 복음의 내용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하는 선행이나 표적을 행하심으로써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시고자 했다. 

 

즉 주님이 행하신 선한 일들이나 표적은 죄와 영생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육신적(생활) 문제에만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들이 처한 근본 문제인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을 위해 주님이 오셨고 그가 사람들을 위해 희생의 떡이 되심으로써 그들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행해진 것이다. 결국 주님께서 표적을 통해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한 것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러한 표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심지어 주님의 제자들마저 그랬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마16:1-12)  

 

이 말씀에 나타난 바와 같이 주님이 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유대교 지도자들은 주님에게 또 다른 표적을 요구했다. 그때 주님은 더 이상 표적을 보여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사람들이 표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함으로 인해 표적의 목적이 달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표적은 더 행해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제 주님의 남은 표적은 요나의 표적 곧 자기를 믿고 바라는 자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대속 제물로 내어주고 하나님의 손에 의해 다시 살아나는 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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