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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과 하늘에 속한 사람

이상봉 2010.05.05 13:02 조회 수 : 2778

제34과 하늘에 속한 사람 


요한복음 8장
 

52.위로부터 난 생명과 아래로부터 난 생명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하려는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세상에는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은 지금도 그리스도(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항상 그리스도를 기다려 왔지만 정작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왔을 때는 언제나 거절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항상 그리스도를 기다리지만 그리스도를 실제로 만나면 언제나 거절하는 이상한 사람들이다. 현재는 그리스도가 없고 언제나 앞으로 만날 날만 기다리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과거의 유대인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들은 장차 죽은 후에 주님을 만날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지금은 언제나 그리스도 없이 살아가고 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에게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죄 사함을 구하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다. 죄를 자복하고 죄 씻기를 힘쓰는 그들이 어째서 죄 가운데서 죽어야 하는가? 양을 잡고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서 날마다 죄를 처리하는 사람들이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는 말을 듣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분명히 날마다 죄를 회개하고 있는데도 죄 가운데서 죽는다고 하는 것을 보면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죄는 사람들이 날마다 짓고 날마다 처리하고 날마다 용서받았다고 믿는 그런 죄와는 다른 죄일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유대인들이 날마다 죄를 씻는다고 하지만 그 죄가 그대로 남아 있었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주님은 어째서 유대인들이 날마다 죄를 회개한다고 하는데도 죄 가운데서 죽을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했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느니라.” 바로 이것이 핵심이다. 이 말씀에 의하면 사람의 근본적인 죄는 이러 저러한 악한 일들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아래서 났다는 것이다. 

 

문제는 무엇을 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났느냐’ 하는 것이다. 주님의 기준에 의하면 죄란 ‘아래서 난 것’ 즉 아담에게서 난 것이다. 문제는 행위가 아니라 생명이다. 사람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그의 생명이 그런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속해 있는 것, 아담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죄다. 사람은 어떤 악한 일(범죄)을 하든지 안 하든지 ‘본질상 죄인’이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본래 ‘아래서’ 난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만들어진 존재로서 본질상 ‘위로부터 난’ 존재인 것이다. 다른 피조물과 같이 흙으로 지음 받았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불어넣어짐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아들)과 모양으로 지음 받은 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주 예수님이 그러한(위에서 난 사람인) 것처럼 다 위에서 난 자여야 한다. 그런데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이 사람에게서 떠났고 사람은 땅에 속한 자(육체)가 되고 말았다.  


하나님은 사람의 이러한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불렀고 그 자손들에게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영이며 사람 안에 본래 들어 있던 하나님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스스로 믿던 유대인들은 적어도 땅에 속한 자가 아니고 하늘에 속한 자들이어야 마땅하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었고 하나님의 역사가 펼쳐졌기 때문에 그들은 세상과 다른 인격과 다른 삶을 지녀야 마땅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위로부터 나신 분(주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절했다. 그들은 여전히 아래서 난 자로 살고 있었다. 그들은 말만 하나님의 백성이지 실상은 이방인들과 같이 땅에 속한 자로서 세상과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은혜로 선택하신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인류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를 거부해 왔다. 사람은 왜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그들의 죄 때문이다. 주님이 사람들에게 무슨 잘못을 했거나 주님이 착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사람들 자신의 인격과 생명이 주님과 다르며 그들 안에 근본적으로 주님을 받아들일 수 없는 어떤 성질(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님을 거절하는 것이다. 주님은 그것을 가리켜 죄라고 하셨다.  


만일 누구든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면 그는 죄 가운데서 죽지 않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는 반드시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얼마나 착하게 혹은 악하게 행하느냐가 아니고 위로부터 난 자 곧 하나님께로서 난 자인 예수를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다. 그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행하든 하나님께로서 난 분이신 예수를 알지 못하고 또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이며 결국 그의 죄 가운데서 죽게 될 것이다. 


그러면 같은 죄인이라도 예수를 믿는 자는 자기 죄 가운데서 죽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렇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위로부터 난 자임이 틀림없다. 그것은 위로부터 온 자만이 위로부터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그 행위를 통해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와 한 생명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또 전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아니라도 예수를 믿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늘에 속한 새 생명을 주시기 때문에 그는 자기 죄 가운데서 죽지 않고 하나님의 영접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도덕적 혹은 양심적인 죄 즉 율법을 어긴 죄로 인해 죽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고 더 근본적인 죄 곧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 상태에서 죽을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로서 온 사람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긴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서 온 분인 예수님을 못 받아들이고 기어이 거부할 수밖에 없는 왜곡된 인간의 체질을 하나님은 죄라고 부르신다. 이런 죄 가운데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결국 그 죄 가운데서 죽고 마는 상태를 저주라고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주님 당시의 유대인들과 오늘날의 많은 기독교인들 사이에는 닮은 점이 있는데 그것은 둘 다 그리스도를 찾고 기다리기는 하되 실제로 그를 만나면 영접치 못하고 죄 가운데서 죽고 만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오늘날도 캄캄한 방에 들어가면서 “그리스도여 오셨습니까?”하고 묻는다고 한다. 그들은 항상 기다리는 자들이다. 기다리다가 실제로 만나면 배격하면서도 항상 기다리는 것이다.  

 

그들은 어째서 아무리 기다려도 만나지 못하고 아무리 찾아도 만나지 못하는가? 그들은 왜 그런 이상한 상태에 항상 머물고 있는가? 그것은 그들이 찾고 기다리는 사람과 오시는 분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찾는 것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서로 맞지 않으니까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아무리 열심히 찾아도 서로 만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문제는 사람 자신에게 이상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시지 않은 데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필요를 따라 선물을 주시지 않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이 풀리지 않는 문제의 진정한 원인은 사람 속에 그 무엇 즉 하나님과 상관없는 그 어떤 견고한 목표가 들어 있다는 데 있다. 그것과 그리스도가 서로 맞지 않기 때문에 도저히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근본적인 죄이다. 유대인들은 간절히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했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메시아를 오랫동안 기다렸다. 그런데 실제로 그를 만났을 때 그들은 그를 이리 저리 가늠해 보다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정하고 거부해 버렸다. 이것이 죄가 아니고 무엇이며 저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야 만나기도 쉽고 받아들이기도 쉽다.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나 안 믿는 것이나 누가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 혼자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니까 내가 믿는다 하면 믿는 것이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면 사랑하는 것이 되지 어디 무슨 객관적인 증거나 표시가 있는 것도 아니니 순전히 자기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그런 믿음이 아니고 명백히 존재하는 두 사람간에서 생기는 분명한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데 혼자서 믿는다, 안 믿는다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앞에 있는 분명한 대상을 두고 내가 당신을 이렇게 실제적으로 믿는다든지 혹은 거부한다든지 하는 것이다. 주 예수님 당시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믿었고 어떤 사람은 안 믿었다. 이때의 믿고 안 믿은 것은 분명한 대상이신 예수님을 놓고 실제적으로 따를 것이냐 안 따를 것이냐를 선택한 후 실제적으로 믿든지 안 믿든지 한 것이지 결코 예수 없이 혼자 집에 앉아서 머리 속으로 생각하여 믿든지 안 믿든지 한 그런 믿음이 아니었다.  


유대인들도 하나님이야 잘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내가 하나님께로서 온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하며 하나님의 행사를 하던 예수님을 만났을 때는 이 사람을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 이리 저리 판단해 보다가 결국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보고 믿음이 없다고 한 것이다.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들의 처사는 지금까지 그들이 (예수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하나님은 잘 섬기고 있었다는 그들의 말(생각)이 헛되며 거짓임을 나타내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지금까지 사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과거에 유대인들이 주님을 만나기 전에 여호와를 믿던 것과 같이 자기 생각 속에서 가지는 종교적인 믿음이나 무슨 신념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주 예수님이라는 대상을 앞에 두고 그를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 하다가 믿든지 거절하든지 하는 그런 믿음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가 그 예수를 자기 안에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는 참으로 복된 자이며 그것은 그가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증거이다. 또 오늘날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를 대할 때 그에게 여러 가지 걸림이 될만한 육체적 문제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 생명으로 인하여 그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났든지 예수님의 제자 된 어떤 형제를 만났을 때 자기 속에 있는 어떤 사정으로 그를 받아들일 수 없을 때 그는 죄 가운데 있는 것이며 저주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이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3) 사람은 타락 후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 속에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작용하는 한 성질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성질이다. 단지 자기가 어둠일 뿐 아니라 어둠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빛을 보면 반드시 일단 거부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면 꼭 믿을 것 같은데 결국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의 놀라운 표적과 권세 있는 말씀과 능력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과거나 현대를 막론하고 유대인들이나 기독교인들 중에는 자기가 하나님을 못 만나서 그렇지 만나기만 하면 꼭 환영하고 영접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이 막상 하나님을 만나면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척할 것이 거의 틀림 없다. 그것은 그들 속에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없는 그 무엇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속으로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다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은 본래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데 지금 타락으로 인해 다른 것은 다 받아들여도 하나님만은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생명과를 먹어야 할 자가 선악과를 먹은 것이 죄인 것처럼 오늘도 참 생명의 양식인 그리스도가 제시될 때 자기 속에 다른 생각이나 욕망이 있어서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바로 죄이다.  

 

사람이 만일 밥을 주면 먹지 않고 소처럼 풀만 뜯어먹으려고만 한다면 그는 얼마나 저주 가운데 있는 것인가! 그가 만일 그 저주의 자리에서 빠져나와서 참 양식을 먹지 못한다면 결국 저주 가운데서 죽고 말 것이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바로 모든 인간이 이런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지 않으면 모든 사람은 다 이 숙명적인 저주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세상에 자기 나름대로 선을 추구하는 사람이나 종교를 믿으려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사람이 악을 행하는 것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악과는 악만 추구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선과 악을 함께 알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본성 안에는 선을 추구하는 성질도 들어 있다. 이런 본성으로 사람은 종교적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도 있고 제사도 드리며 율법도 지키려고 애쓰고 여러 가지 선행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본성으로 하는 한 하나님 앞에서는 죄일 뿐이다. 사람의 죄는 무슨 악을 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 받았으며 이를 위해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으며 자기 속에서 하나님을 나타내어야 한다. 이런 아들의 자리를 떠나서 하나님의 영광 대신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근본적인 죄이다. 그러므로 자아를 따라 행하는 것은 선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다 거역이요 죄일 뿐이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제사도 드리고 율법도 지키며 의를 추구하며 선행도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만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예수님의 삶은 자신들과 같이 적당히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보내신 자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가 아니라 종교적으로만 하나님을 믿던 이들에게 이런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의 삶과 운명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람이 그 생명의 양식인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얼마나 저주인가! 이는 마치 산해진미를 앞에 두고도 그것을 먹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것이 입맛이 없어서든 속이 탈이 나서든 속에서 거부하기 때문에 그것을 먹을 수 없으면 어차피 없어서 굶는 것이나 있어도 굶는 것이나 굶기는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저주이지 무슨 저주가 따로 있겠는가? 사람들은 예수를 안 믿으면 나중에 죽은 후에 지옥으로 가니 문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도 문제이다. 그러나 만일 문제가 그것뿐이라면 나중에는 어쨌든 우선은 괜찮지 않는가?  

 

그러나 문제는 나중이 아니라 지금 저주의 상태에 놓이는 것이다. 지금 굶주리는 사람이 먹을 것을 앞에 두고도 그것이 양식인줄 모르고 거부한다는 것이 바로 현재적 저주인 것이다. 사람들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불가사리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먹어치울 태세로 온갖 것을 다 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구하는 것은 다 참으로 배부르게 하지 못할, 양식 아닌 것들뿐이고 참 양식을 주면 거부하니 이것이 바로 저주가 아닌가!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러한 육신의 본질적인 저항감을 극복하고 생명의 양식인 그리스도를 먹는다면 그것은 얼마나 축복인가!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받아들이려면 먼저 성경이 설명하고 있는 온전한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리스도는 부처나 산신령과 별로 차이가 없다. 자기들을 지켜주고 소원을 들어주며 필요할 때 이용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복음서나 바울의 쓴 글에 나오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믿고 숭배해야 할 대상일 뿐 아니라 우리가 본받고 그 길 안으로 들어가야 할 모범이요 원형이시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런 완전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알고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만이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현재 우리 앞에 있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 곧 성령의 인도를 받는 믿음의 형제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오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오셔서 그의 몸인 교회로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다. 그러므로 마치 예수님이 나타나신 하나님 아버지였던 것처럼 오늘 교회 형제들은 나타나신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형제들을 귀하게 여기지도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인 예수님을 거부한 유대인들과 같은 거짓된 그리스도인일 것이다.  


하나님께 속했느냐 속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 기준이 되지 않고 내가 원하는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기준이 되어서 사람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받아들이지 않기도 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혹 겉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같이 보이더라도 실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어떤 특별한 죄인만의 모습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본질적인 실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외가 아니며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것을 극복해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제 여기 있는 우리는 본질적으로 이런 본성적인 저주에서 이미 벗어난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혹 사탄이 우리 육체를 부추기며 우리를 속여서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온전한 진리를 거부하며 형제를 거부하도록 속삭이더라도 그것을 단호히 거부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본성적인 죄에서 이미 구원받았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2:3-5) 그러므로 본성적인 죄 곧 하나님을 거절하고 자기 뜻대로 사는 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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