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제35과 생명의 물이신 그리스도

이상봉 2010.05.05 13:04 조회 수 : 2703

제35과 생명의 물이신 그리스도

 

요한복음 7장
 

53.인간의 갈증과 하나님의 해법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7:37,38) 


주님은 명절에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에게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외쳤다. 그를 받아들임으로써 성령을 받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는 곧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영이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함으로써 그 사람 안에 생명이 흘러 넘치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의 모든 배고픔과 목마름은 (그것이 육신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다 그 속에 마땅히 있어야 할 생명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사람이 되었다. 흙으로만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정신이 그 속에 깃들어 있음으로 해서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영)이다. 이 생명이 (타락으로 인해) 빠져나갔기 때문에 사람이 곤고하고 목마르게 된 것이다.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껍데기만 보는 사람들은 오늘날 인간의 많은 문제들이 환경적인 어려움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땅에 가시와 엉겅퀴가 있고 사망의 그림자가 인생에 드리워져 있기 때문에 (즉 창세기 3장에 언급된 하나님의 저주가 있기 때문에) 사람의 삶이 어렵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먹을 것이 없고 마실 것이 없으니 어찌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까지 하늘에는 항상 햇빛이 비취고 있고 항상 비가 내리고 있다. 진정한 문제는 땅이 아니고 곡식과 물이 아니다. 땅은 사람들을 수용할 만큼 넓고 곡식은 모든 사람들을 먹일 만큼 풍성하게 생산되지만 인간의 죄와 탐욕이 약한 자들을 좋은 땅에서 밀어내고 좋은 것을 혼자 먹으려고 한 결과 이 모든 어려움들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의 본질은 사람 안에 하나님의 정신(영, 말씀)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신이 없다는 것은 곧 제 정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문제의 본질은 바로 이것이다. 사람이 제 정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엉망이 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이 조성하신 환경은 ‘두 사람이 떡 세 개, 물 세 병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둘이 충분히 먹고 마시며 배부를 수 있다. 그런데 세상은 왜 고통을 겪는가? 똑 같은 비유로 말하자면, 강한 한 사람이 약한 한 사람의 것을 뺏어서 혼자 다 먹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한 사람은 과식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고 약한 사람은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것이 충분한데도 남의 것을 뺏는 사람은 왜 그런 일을 하는가? 믿음이 없고 정신(진리의 지식과 지혜)이 없기 때문이다. 나중에 굶게 될지도 모르니 (즉 앞으로 해가 안 뜨고 비가 안 내릴지도 모르니) 저축을 해 놓아야 되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한 개를 먹어도 이렇게 좋으니 세 개를 먹으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는 한 개를 먹었는데도 배가 부르지 않고(행복과 만족이 없고) 여전히 허전하니 계속 먹어보아야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 그의 허전함과 배고픔은 원인이 다른 데 있는데 말이다.  


세상에는 욕구 불만으로 인해 폭식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분명히 환자이다. 그들은 배가 고파서 먹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곳의 허전한 것을 먹는 것으로 채우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만 환자가 아니라 오늘 대부분의 인류가 다 그와 같은 병에 걸려 있는 똑 같은 환자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온갖 그럴듯한 명분을 붙여놓고 하는 수많은 일들은 대부분 하나님 앞에서 무의미한 일들이며 마지막 날에 다 사라지고 말 것들이다.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며 온 힘을 쏟아 붓고 있는 수많은 일들이 다 폭식증 환자와 마찬가지로 정신병에서 나온 것이다. 그 속에 생명이 없으므로 인해 그의 생명을 점점 더 축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영적으로 말하면 (앞에서 말한) 뺏는 자와 빼앗기는 자, 먹는 자와 주리는 자가 둘 다 배고프고 목마른 상태에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 제 정신이 있으면 한 번은 바보짓(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의 것을 뺏어 혼자 다 먹는 것)을 하더라도 나중에 그것이 무의미한 일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그것을 계속 하고 있으니 제 정신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빼앗긴 자도 마찬가지다.  

 

그는 적어도 강자가 약자의 것을 독식하는 이러한 세상(과 세상 정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절반(약자)은 그런 일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그런 인간 행태의 모순점을 지적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 단지 다음에 자기(가 강한 자가 될)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주리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며 목마른 상태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일 문제의 핵심이 물질적이고 환경적인 데 있다면 절반은 주리고 목마르지만 절반은 배부르고 만족스러운 상태에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둘 다 주리고 목마른 것이다. 둘 다 제 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기를 원하셨다.  

 

사람은 어떻게 제 정신이 될 수 있으며 어떻게 생명을 얻을 수 있는가? 제 정신인 사람을 따라가면 된다. 누가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인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 사람 곧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제 정신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3,14) 육신대로 살지 않고 영을 따라 사는 그 사람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러한 사람의 처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생명을 얻으려면 그를 따라가야 한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6:63)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1,32) 하나님의 영을 따라 사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그의 영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따라가라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고 가장 완전한 방법이다. 세상에는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인생의 길과 진리를 알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오직 그 아들(말씀을 받은 자들)을 통해서 그의 영을 흘려보내시며 오직 그 아들의 영을 받음으로써만 그의 말씀(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으로 사람을 얻고자 하신다.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의도는 지식을 전하고 일을 전하고 능력을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분 자신을 전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사람을 주고 사람을 얻으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로 책 가지고 사람을 구원할 수 없으며 지식으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일을 보려면 오직 하나님의 사람을 받아들여야 한다. 형제에게 나를 낮추어 순종하며 그의 말을 들음으로써만 하나님의 영을 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다. 

 

사람들은 말씀만 취하고 사람은 빼고 싶어하지만 절대로 사람이 빠지면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사람 안에 하나님 자신을 넣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는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사람을 우리 안으로 영접하는 방법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주 예수님은 하나님을 영접하고 주님의 제자 요한은 그 주인인 예수님을 영접하고 요한의 제자는 그 선생인 요한이라는 사람을 영접할 때 하나님은 그 사이에 예수라는 아들과 요한이라는 아들과 요한의 제자라는 아들을 얻게 된다. 이렇게 하여 하늘과 땅에는 하나님이 네 배로 확대 충만케 되는 것이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일1:1-3)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하속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저희가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7:40-46) 


예수는 육체로서는 볼품이 없는 분이었지만 오직 그 영으로, 그 말씀과 정신으로 가치가 있는 분이었다. 그는 그의 영을 사람들에게 주심으로써 사람을 구원할 자였다. 그러므로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들은 누구나 와서 그를 먹고 마시며 만족할 수 있다. 주님의 생명은 사람 안에서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과 같이 마르지 않고 기쁨과 안식을 제공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55:1,2)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22:17)

 

그런데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은 누구나 와서 먹고 마실 수 있다는 이 사실을 거꾸로 말하면 그를 먹고 마시려면 반드시 배가 고파야 하고 목이 말라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지만 거기에도 조건이 있는 셈이다. 그것은 생명의 갈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난은 육체적인 것을 넘어서서 영적인 지경에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주머니만 가난한 것이 아니라 속까지 가난해야 하는 것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세상에는 왜 이런 죄와 고통과 죽음이 있는가? 인간은 왜 이렇게 악한가? 왜 나는 내 인생을 내 의지대로 살지 못하는가? 이런 문제로 인해 배가 고파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필요가 전적으로 육체적인 데만 있다면 그리스도는 필요 없는 분이다. 그리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 유대인들은 그의 외모를 보고 그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내버렸다. 그것은 떡이 마치 돌처럼 생겼기 때문에 내다 버린 것과 마찬가지이다. 만져보면 보들보들하고 입에 넣어보면 부드럽게 씹히는데도 불구하고 생긴 것이 떡 같지 않다고 해서 내다 버린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잡으라고 유대교 지도자들이 보낸 하수인들은 그를 잡아오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를 눈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손으로 만져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돌이 아니라 떡이었다. 그들은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능력이다. 영이요 생명이신 분을 말씀이 아니라 외모로 판단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무지한 하수인들조차 예수님의 말을 들어보고 그가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라는 사실을 느꼈는데 왜 그들의 주인들은 예수님을 끝내 거절했는가? 그것은 그들이 배고픈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탄이 준 것들로 배를 채워서 스스로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양식이 그 속에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죄(罪)고 저주이다.

 

주님의 생명은 그가 죽기까지 사람들에게 흘러가지 못했다. 베드로와 요한은 3년이나 주님을 따라다녔지만 주님과 같아지지 못했다. 그것은 그의 영이 아직 그들에게 부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그들에게 부어지지 않은 것은 그가 죽고 부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명은 오직 부서짐으로써만 밖으로 흘러갈 수 있다. 밀은 부서짐으로써만 떡이 될 수 있으며 옥합 속의 향유는 옥합이 부서질 때만 밖으로 흘러가 향을 발할 수 있다.  


주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까지는 세상에 성령이 계시지 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영광이란 주님이 죽고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시게 되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3,24)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죽는 것이 바로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들(독생자)의 순종과 희생을 통해 많은 아들들을 얻으시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이것은 작은 종자 곡식으로 많은 곡식을 얻고자 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이런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함께 적용된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요12:24-26)  

 

우리가 영광을 얻는 길은 우리 생명이 사람들에게서 보호되고 옹호되고 감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제공되고 나누어지고 허비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허비되는 것 같은 인생이 ‘허비되었다고 비난받은 값비싼 향유 옥합’처럼 하나님께 최고의 드림이 되고 또한 존귀와 영광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