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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과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이상봉 2010.05.05 13:07 조회 수 : 2841

제36과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요한복음 8장
 

54.정죄치 않는 인격 안에서의 안식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오는 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8:1-11) 


주님이 성전에서 백성들에게 말씀을 증거하실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한 여자를 주님께 끌고 왔다. 그들은 주님께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물었다. 그들이 주님께 온 것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고소할 거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때 만일 주님이 그 여자를 살려주라고 하면 그들은 주님을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자요 율법을 어기도록 가르치는 자로 고소할 것이고, 만일 주님이 여자를 법대로 죽이라고 한다면 지금까지 강조한 소위 사랑과 용서의 정신이라는 것은 어디 갔느냐고 조롱하고 비난할 것이었다.    


질문은 받으신 주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셨다. 뒤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주님은 아마도 땅에다 율법의 계명들을 쓰신 것 같다. 그리고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부터 젊은이까지 하나씩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과 그 여자만 남게 되었다. 그때 주님은 여자에게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면서 여자를 돌려 보내셨다.   


율법의 지식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죄는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죄를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알고 싶어했다. 주님은 그들과는 달리 사람을 정죄하고 책망하기보다는 사랑과 자비로 용서하는 분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율법을 어기는 죄인들을 주님이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했다. 이를 시험하기 위해 그들은 율법이 규정한 여러 죄 중 겉으로 가장 뚜렷이 드러나는 대표적인 죄라고 할 수 있는 간음죄를 등장시켰다. 


율법은 하나님이 친히 내신 것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완전하게 표현한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회초리를 들었다고 해서 회초리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모든 것(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율법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은 언약이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형식면에서) 법이다. 언약이라는 면에서 율법은 부드럽고 좋은 것이지만 법이라는 면에서 율법은 딱딱한 것이다. 언약으로서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굉장한 말씀(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거룩한 사람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므로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율법은 그것을 받는 사람들이 하늘에 속한 사람이요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책이다. 그러나 법으로서의 율법은 생명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규칙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엄격하고 철저하게 집행되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율법이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어떤 죄인을 용서하시는 것은 쉽지 않다. 하나님은 자기 원칙에 충실한 분이기 때문이다. 또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이 설사 어떤 죄인을 용서하고 받아주신다 하더라도 땅에서 실제로 그 법을 적용하는(집행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과 상관없이 죄인을 법대로 집행한다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재판관이 법에 따라 죄인을 정죄하고 죽인다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간음한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율법(레위기 20:10)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바로 용서해 버렸다. 모두에게 쉽지 않은 죄 문제가 주님 안에서는 아주 간단하게 처리되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가? 그 여자를 정죄하고 돌로 칠 사람들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상의 많은 문제들이 어려운 것은 하나님 때문이나 율법 때문이 아니라 사람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절대적인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죄는 절대적인 것이면서도 한편으로 상대적인 것이기도 하다. 죄든 선행이든 상대가 있기 때문이다. 죄는 혼자 짓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간에 또는 하나님과 사람간에 짓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문제삼지 않으면 그것은 때로 문제가 안 될 수도 있다. 물론 사람이 하나님께나 다른 사람에게 범죄하는 것이 작은 일은 아니다. 특히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므로 의로우신 하나님은 그것을 엄하게 다루신다. 그러나 만일 어떤 이유로 하나님이 그것을 문제삼지 않으신다면 즉 하나님이 그를 정죄하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행위가 죄가 되느냐 아니냐는 반드시 객관적으로만 판단될 문제는 아니다. 아버지의 물건을 몰래 가져가 쓰다가 잃어버리거나 과자를 사먹기 위해 아버지의 돈을 훔쳤다면 그것은 죄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때 만일 아버지가 아들의 행위를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죄가 안 되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죄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아버지에게는 그것이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이다. 사실 죄로 인해 손해를 보고 따져 심판해야 할 자는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가 문제로 삼지 않으면 아무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간음한 여인을 붙잡아 징계하려고 한 유대인들의 행동을 객관(율법)적으로는 나무랄 수 없다. 그 여자는 죄인으로서 마땅히 심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여자의 죄는 옆에서 구경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상관 있는 죄가 아니라 가족들이나 당사자들에게 있어서만 문제가 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의로우신 하나님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민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데 있다. 즉 간음자를 처벌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가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보상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유지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데 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어떠한가? 여자의 죄와 직접적인 상관도 없는 사람들은 그녀의 죄를 문제삼고 죽이려 하는데 정작 그녀를 정죄하고 심판하셔야 할 하나님은 그 여자를 당신의 딸로 생각하고 살리려 하신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간과한 것은 죄인도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이 그를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이다. 죄인이라도 딸은 딸이며 아버지는 무조건 딸을 살리기 원하신다. 이것이 가장 큰 진리이다. 죄를 처벌하는 것은 죄가 생명을 좀먹기 때문이며 죄와 생명이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지 죄인(사람)을 미워하며 없애고 싶기 때문은 아니다. 간음한 자를 처벌하는 것은 사람을 살리기 위함이지 죽이기 위함이 아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죄(간음)이다. 간음이 사람을 파괴하고 사회를 파괴하기 때문에 간음을 없애려는 것이고 간음을 없애려다 보니 간음자를 사형시키는 것이지 사람을 죽이는 것 자체가 목적은 아닌 것이다.  


공의와 사랑 속에서 하나님은 간음한 그의 딸을 어떻게 처리하셔야 하는가? 하나님은 딸이라도 불의한 자를 용납하실 수 없다. 그러나 살리기는 살려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쓰신 방법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그녀를 위한 대속 제물로 삼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여자를 받으셨다. 영원히 죽을 수 없는 (부활 생명을 가진) 그의 아들을 일시 죽임으로써 자기 자녀들을 살리고자 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의 대속이 이루어지기 전에도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셨으며 실질적으로 살리며 용납하셨다. 동물 제사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이 있기 전에 사람을 사랑하시며 살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먼저 있었다. 그 마음을 따라 주님이 오셨고 십자가의 대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모든 것은 사람을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더 풍성케 하기 위함이다. 율법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살게 하기 위함이었다. 단지 이스라엘이 그것을 받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생명의 떡이 되지 못했을 따름이다. 율법이 좋은 것이요 살게 하는 것이지만 사람이 연약하여 그것을 받아먹고 살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오셔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신 것이다. 율법은 경직된 것이어서 사람들이 먹고 양식으로 삼지 못했지만 인격이신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먹고 마실 수 있는 생명의 양식이 되셨다. 그는 가장 낮은 인간(죄인)조차 받아들일 수 있는 낮은 분으로 물 같은 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스스로 경건하다고 하던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방인들은 물론이고 그 형제인 대부분의 이스라엘 민중들에 대해서도 멸시하고 정죄했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겉으로는 율법 때문이지만(사람들이 율법을 모르거나 지키지 않음) 실은 그들의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에게서 떠나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 죄인들을 싫어하고 정죄하기 때문에 자기들이 그들을 싫어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들이 사람들을 싫어하고 받지 못했을 따름이다. 사람을 싫어하고 미워하기 때문에 율법이라는 도구를 근거로 삼아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죄인인 그 여자를 살리기를 원하셨다. 살려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주님이 보시기에 그녀가 범죄한 것은 그 속에 하나님이 없음으로 인해 생명이 없고 공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녀를 정죄하지 않고 도리어 생명을 주려고 하셨다. 죄는 일차적으로 (사람 되셔서 그 여자 앞에 서 계신) 하나님 자신과 그 여자간의 문제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녀를 정죄하지 않으시니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주님이 그녀를 정죄치 않고 받아들이자 그녀는 즉시 살게 되었다.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과 마음으로 행하지 않고 율법과 종교의 규례로만 사람을 대하면 죄인은 결코 살아나지 못하며 그의 죄는 도저히 처리될 수 없다. 우리는 사람이 죄를 지을 때는 죄를 짓고 싶어 짓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죄를 지을 필요가 있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어서 죄를 짓는다는 사실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죄 문제는 죄를 짓지 말라고 가르치거나 정죄하고 심판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충족이 있어야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조상이 선악과는 왜 먹었는가? 그것은 그가 사탄에게 속아서 무언가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배부른데 누가 억지로 먹지 말라고 한 것을 먹겠는가? 그가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은 자기의 위치를 불만족스럽게 느끼고 자기에게 무엇인가 부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탄의 꾐을 따라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아담이 만일 하나님의 생명 나무 열매를 먼저 먹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렇다면 그는 헛된 불만이나 부족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이 굳이 먹지 말라 하신 것을 먹지 않았을 것이다.  


간음한 여자 역시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에 간음한 것이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우물가의 여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사람들은 다 참 생명이 없어서 지친 사람들이었고 목이 마른 자들이었기 때문에 간음을 했고 남편을 여럿 바꾼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을 비난하고 정죄하기 전에 주님이 하신 것처럼 우리 자신을 그들에게 생명의 물로, 생명의 양식으로 주어 그들을 살게 할 생각을 해야 한다.  


사람은 참으로 생명이 되는 것을 충분히 먹고 마셔서 생명이 충만할 때만 참된 삶을 살 수 있다. 생명이 없으면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지금 병으로 곧 숨이 넘어가는 사람에게는 금덩어리나 박사학위 같은 것이 필요 없듯이 어떤 교훈이나 율법과 가르침도 지금 생명의 결핍으로 숨이 넘어가는 사람(죄인의 상태가 바로 이것이다)에게는 다 소용이 없으며 그것으로는 생명을 살리지 못한다.   


주님 당시 그 사회를 지배하던 종교인 유대교는 가장 고상하고 완전한 종교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 안에는 모든 좋은 가르침이 다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산 사람을 온전케 하는데는 효과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죽은 사람을 살려내지는 못했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 할지라도 죽은 자에게는 효용이 없는 것이다. 여기 나오는 간음하다 잡힌 여자는 생명이 없는 여자이다. 이런 자에게 어떤 좋은 말, 옳은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녀에게는 오직 생명을 주는 일만 필요하다. 그래서 주님은 그 여자에게 먼저 무엇을 고치고 옳게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다만 그를 받아들이고 살게 하셨던 것이다.   


주님은 이 여자를 살게 하기 위해 그녀를 정죄하여 죽이려는 자들을 지혜롭게 쫓아내셨다. 사람이 죄를 범했을지라도 우선은 살아나야 고칠 수 있고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 어떤 범죄한 사람이 서 있고 또한 주님이 우리 가운데 서 계신다 할지라도 주님은 다시 형제를 정죄하여 죽게 하려는 자들을 다 쫓아내실 것이 분명하다. 그래야만 그 연약한 사람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율법을 알고 조금 지키는 것을 큰 무기나 자랑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으로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정죄했다. 그러나 그들 중 아무도 율법을 다 지키지 자는 없었다. 그러므로 사실 율법으로 말하고 자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그 사람들도 율법을 자신 있게 자기 것으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주님은 마치 자기들이 율법을 전가의 보도(傳家의 寶刀)처럼 휘두르려던 자들에게 ‘죄 없는 자부터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실제를 드러내셨다. 그들이 그 말씀을 듣고 다 달아난 것을 보면 과연 그들 중 누구도 율법으로 남을 정죄하고 심판할 수 있는 자는 없었던 것이다. 주목할만한 사실은 그때 젊은 자들보다 늙은이들이 먼저 나갔다는 사실이다. 이는 곧 사람이 오래 살수록 죄를 짓는 기간이 더 길므로 더 많은 죄를 지었다는 얘기가 된다.  

 

선생일수록,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일수록, 지도자일수록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많이 죄를 범했고 율법을 어길 수 있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도무지 형제를 정죄할 수 없다. 율법주의자는 자기가 쓰고 있는 율법에 의해 날마다 정죄를 받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성경을 들먹이며 형제를 정죄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기  자신에게 ‘나는 성경대로 다 행하고 있는가’를 물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성경을 사용하여 사람을 살릴 생각을 해야지 그것으로 사람을 정죄하거나 자기를 자랑할 수는 없음을 알아야 한다.  

 

어쨌든 이 여자는 주님에 의해 살아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여자에게 죄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죄는 그대로 있더라도 일단 살아났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살아 있고 그 안에 강한 생명력이 있다면 그 몸 속에 어떤 병이나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반드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무슨 혹이나 암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의 생명력이 병보다 강하다면 그는 죽지 않는다. 죽지 않을 뿐 아니라 결국 그의 생명력이 몸에 있는 병을 삼켜서 없애 버리게 된다. 

 

김일성의 목 뒤에 붙어 있던 혹덩어리를 생각해 보라. 10년 넘게 혹을 붙이고 있어도 그는 그것으로 죽지는 않았다. 그의 생명이 혹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병도 사실 죽을 병과 살 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병이 아무리 커도 생명이 그 병보다 강하면 사는 것이고 아무리 시시한 병이라도 생명이 그보다 약해져 있으면 그는 죽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8장의 여자는 주님에 의해 정죄가 없는 세계에 들어와서 살아났기 때문에 결국은 그의 산 생명으로 그의 죄(암)를 이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이 살아나면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므로 중요한 것은 역시 생명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생명이 커지고 충만케 되면 죄는 저절로 없어지게 된다. 이 여자에게 “너의 죄를 다 없애고 깨끗하게 한 후 하나님께 나오라”고 하면 그가 언제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 나오겠는가? 그는 결국 영원히 하나님께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고 생명과 안식을 주는 한 사람 안에서 살아나게 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하고 생명을 얻었을 때 그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 같이 하라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엡4:31-5:2)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골3:13)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6:14-15)

 

이 말씀들은 우리의 생명이 어떠한 생명이며 우리의 길이 어떠한 길인가를 말해준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주님은 율법보다 더 크고 거룩하고 완전하신 분이었지만 사람을 살게 하려고 자신을 낮추어 사람으로 오셨고 죄인과 세리의 친구로 사셨다. 그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어 사람들로 자기를 먹을 수 있게 하셨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완전하게 나타내실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날 주님뿐 아니라 우리도 주님처럼 세상에서 하나님을 완전하게 나타낼 수 있기를 원하신다. 

 

그러한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기를 낮추고 희생하여 우리 안에 사람들에게 생명과 안식을 주는 인격을 형성해야 한다. 오늘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수고롭고 무거운 짐을 벗고 쉴 자리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들에게는 법과 선생보다는 안식할 수 있는 인격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전에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사람들에게 생명과 안식을 주신 것처럼 오늘은 우리를 그 자리로 부르시고 있다.  


그리스도처럼 세상에게 생명과 안식을 주는 자가 되려면 반드시 그리스도처럼 십자가를 거쳐야 한다. 낮아지고 부서지지 않으면 사람들은 우리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곧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 안에서 죽음을 경험하여야 하고 주님의 부활 안에서 부활 생명을 누려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 자신이 주님의 부활 생명을 충만히 누릴 때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과 안식을 줄 수 있다. 어쨌든 우리의 길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한 길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만을 위해 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목적은 우리 자신을 통해 하나님을 나타내고 사람들에게 생명과 안식을 주어 그들을 그리스도의 복된 세계로 이끄는데 있다. 우리는 항상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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