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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상봉 2010.05.05 13:09 조회 수 : 2769

제37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장
 

55.그리스도의 제자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8:31,32)
 

이 말씀은 주님이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여기서 주님을 믿었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메시아)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그들에게 주님은 다음 세 가지 사실을 말씀하셨다. 첫째, 당신들은 나를 메시아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뿐 아니라 반드시 ‘내 말’에 거해야 한다. 즉 내 말을 받아들여서 실행해야 한다. 둘째,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당신들은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가지게 될 것이다. 셋째, 그 진리가 당신들을 모든 죄와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 것이다.  


‘내 말에 거하라’는 것은 주님이 가르치는 말 속에 있는 정신과 길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반드시 그의 마음과 정신, 그의 길과 자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주님의 참 제자가 되어 주님의 생명과 구원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거꾸로 말하면 주님을 따르면서도 그의 말은 듣지 않는(그의 길로 가지 않는) 사람은 주님의 참 제자가 아니며 그의 생명과 구원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柱礎)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눅6:46-49) 왜 이렇게 되는가? 왜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지 않으면 구원을 못 누리는가? 주님이 그 사람을 미워하거나 버려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가 사는 길이 아닌 죽는 길로 갔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정하신 생명의 길(법칙)이 있다. 의사가 무절제한 생활로 인해 위중한 병에 걸린 어떤 사람에게 술을 끊고 밥을 잘 챙겨 먹으며 잠을 충분히 자야 살 수 있다고 말했는데 그 말을 듣지 않는(그 말에 거하지 않는) 사람은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죽게 될 것이다. 그때 그가 죽는 것은 의사가 그를 (말 안 듣는다고) 미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생명의 법칙을 어기고 죽는 길로 갔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죽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심판하여 죽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진리 곧 생명의 법칙을 무시하고 죽는 길로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이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내 말에 거하라’고 요구하신 것이다.  


구원에 필요한 것은 예수라는 육신이 아니라 그 분 안에 있는 말씀 곧 그 분 안에 있는 의와 진리, 그 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거룩한 생명이다. 그 생명이 사람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고 의롭고 거룩한 자가 되게 하고 인생을 복되고 탄탄하게 건축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은 예수라는 한 인간과 친하니까 하나님이 예쁘게 보셔서 구원하기 때문이 아니고 예수를 믿을 때 예수의 생명 곧 하나님의 아들의 거룩하고 온전한(의롭고 진실한) 생명이 그 사람 안에 있게 됨으로써 하나님이 그를 보실 때 자기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의 육체 때문이 아니라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1,12) 그러므로 예수를 인정하고 사랑하며 따르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다. 예수더러 주여 주여 하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것도 눈이 있어야 하고 마음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귀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하며 주님의 복된 인생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진정으로 예수의 덕(구원)을 보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말씀은 안 듣고 예수라는 사람에 대해서 (성인이요 위대한 인물이라고) 칭송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예수를 말하지 않고 말씀대로 사는 것이 낫다. 주님 자신이 그의 비유(마25장)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 거기 보면 마지막 날 양(진실한 신자)과 염소(거짓 신자)를 구별하여 양은 하나님의 나라로 보내고 염소는 멸망의 세계로 던질 때 염소들은 모두 억울하다고 주님께 호소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주님을 잘 따르며 잘 섬긴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참으로 주님을 섬기지 않았다고 하며 내치셨다. 그것은 그들이 (비록 주님을 호의로 대하며 따랐을지라도) 주님의 말씀(정신)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공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할 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25:41-45) 주님의 말씀을 듣고 공과 의를 실행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참으로 따르는 유일한 길이다. 


아브라함 때부터 주 예수님 때까지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수많은 신자들이 있었고 모세를 말하며 그의 율법에 대해서 말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마찬가지로 주 예수님 때부터 오늘까지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주여 주여 하는 수많은 신자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지만 주님의 말씀에 거하는 사람은 극히 적은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냥 예수를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리고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내 생각과 내 길을 버리고 예수의 생각과 예수의 길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나를 버리고 하나님의 아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인생을 버리고 하나님의 인생을 취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하나님의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순종하는 아들의 그 정신과 길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56.진리와 자유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진리를 알게 된다. 왜 그런가? 주님이 우리 모든 인간의 원형(원본,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참 사람’이다. 마귀에게 속아서 자기를 잃어버리고 근본을 잃어버린 우리 모든 인간들은 그에 비하면 사람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유일한’ 참 사람이다. 그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원판(元版)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사람은 다 그에게서 지음 받았으며 그 자리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과 존재는 사람이 무엇이며 인생이 무엇인가를 비춰주는 빛이다. 

 

그래서 주님이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요6:63) 주님의 말씀은 실로 영이요 생명이다. 주님의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 영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원동력이라는 말이다. 주님의 말씀은 원숭이에게는 소용이 없다. 원숭이에게는 바나나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꼭 있어야 한다. 사람은 반드시 영이요 생명인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것은 사람이 육체가 아니요 영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영이라는 것은 사람이 단순히 흙으로 지음 받은 동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지닌 자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영이라는 말은 결국 사람이 하나님의 종류(종자)라는 말과 같다. 사람은 하나님과 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다른 모든 피조물은 사멸되지만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며 다른 피조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들어도 살지만 사람은 하나님과 영원히 호흡을 주고 받으며 교통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생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으로) 흘러나온 것이다.  


주님은 사람이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아시는 분이다. 그것은 그가 아버지를 아는 분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지으신 분을 알기 때문에 사람의 자리도 알며 사람의 길도 아는 것이다. 진리라는 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생명따라 진리도 다른 것이다. 새의 생명이 다르고 물고기의 생명이 다르다. 새에게는 나는 생명이 있고 물고기에게는 헤엄치는 생명이 있다. 새에게 맞는 생명의 원리는 새에게 진리이다. 그러나 그 진리는 물고기에게는 진리가 아니다. 새는 날갯짓만 하면 날기 때문에 그것을 진리로 알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물고기에게 가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진리를 이야기해주겠다. 네가 만일 날기를 원한다면 네 날개(지느러미)를 흔들어라.” 그러나 그의 말을 들어도 물고기는 날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그의 말이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물고기를 그 속박의 자리(물)에서 자유케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세상에는 그리스도의 말씀 외에도 많은 가르침이 있고 진리라는 것이 있어왔다. 그들은 자기 말을 들으면 사람이 모든 문제에서 해방되고 자유와 행복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땅에서 난 자들로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모르면 사람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면 사람의 난 자리를 모르는 것이며 사람의 길과 운명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치 새가 물고기에게 구원을 말하는 것처럼 통할 수 없는 말을 한 것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말하는 것이니 어찌 통할 수 없겠느냐고 하겠지만 타락하여 제 자리를 잃어버린 인생이 외치는 진리라는 것은 소경이 코끼리를 더듬어 알게 된 지식을 진리라고 외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직 하늘에서 온 자라야 진리를 말할 수 있다. 아버지에게서 난 자라야 아들(인간)을 말할 수 있으며 아버지에게서 보고 들은 것이 있는 자라야 아들을 말할 수 있다.  


주님의 말씀은 진리로서 우리를 모든 죄와 속박에서 자유케 한다. 예수의 말씀은 예수라고 하는 한 사람의 인격과 삶 속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안식하는 자이며 그 인생에 대해 만족하고 감사하는 자이며 거룩하고 의로워서 도무지 범죄하지 않는 자이다. 그가 범죄하지 않는 것은 죄를 지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공급으로 말미암아 풍요롭고 부유한 자이기 때문이고 그가 간음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사랑에 결핍이 없기 때문이고 그가 다른 사람과 다투거나 미워하지 않는 것은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마귀가 문제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그 속에 사람을 사랑하고 이해하며 불쌍히 여기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인생을 보았으며 사람 안에서 행위(일)를 보았다. 행위보다 사람을 사람보다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에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실망하거나 놀라지 않았다. 세상에 마귀가 있으므로 죄가 있고 악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세상을 이기고(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되찾고)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충만하게 될 것이 확실하므로 요동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 위에 서 있는 인생이다. 다 안다는 것이다. 불안이란 모르는데서 오는 것이다. 전화위복의 경우처럼 사람이 앞을 내다볼 수 있다면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즉 말을 타다가 다리를 부러뜨렸을 때 (그것 때문에 전쟁에 나가 죽지 않을 수 있게 되니) 염려하지 않고 도리어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은 그의 인생이 하나님 안에서 견고하고 깊이 안식하는 인생이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은 세 가지 방면에서 우리에게 자유를 가져다 준다. 첫째는 죄로부터의 자유이고, 둘째는 미움과 분노, 걱정과 두려움, 불안과 갈등, 낙망과 좌절 같은 심리적 요동으로부터의 자유이고, 셋째는 헛된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사람이 악을 행하고 죄를 짓는 것은 삶에 대한 근본 생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즉 ‘죄를 지어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다. 죄를 지으면 망하며 그것이 제 살 깎아먹기라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다급해도 죄를 짓지는 않을 것이다. 배가 고프다고 해서 제 살을 뜯어먹는 사람이 없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죄의 근원은 잘못된 생각 즉 헛된 욕망과 무지이다. 결국 사람이 범죄하는 것은 마귀에게 속아서 그런 것이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치 말게 하소서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시119:36,37)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0-23) 이것이 지혜이다. 그런데 이 지혜는 꼭 하나님의 사람만 깨닫는 것이 아니다.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도 이런 말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사람은 이 잘못된 길(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갈 데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다른 어느 곳으로 가야하는지 알지 못하므로 결국 도로 그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헛된 욕망으로부터 자유케 되려면 반드시 참된 만족이 있어야 한다. 하늘로부터 오는 완전한 만족(안식)이 사람을 사로잡을 때 비로소 사람은 헛된 욕망(탐욕과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거기서 벗어나야 비로소 죄와 모든 허무한 행동들로부터 자유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참된 자유는 결국 하늘에서 내려온 분 곧 하나님 안에 있는 완전한 세계를 보고 들은 분이 그 세계를 우리에게 말해줄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할 이유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길과 진리요 생명이 되는 이유이다. 그가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요 이 세계에 대한 완전한 대안을 제시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1-1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5: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7:16)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가라사대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요7:28,29)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요8:38)
 

이처럼 주님은 항상 자기가 말하는 모든 것이 하늘(하나님)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하셨다. 그것이 바로 다른 모든 사람들의 말과 주님의 말씀이 다른 이유이다. 

 

주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진리이며 영이요 생명인 것은 그가 하나님 안에서 인간과 인생(삶)을 정확하게 보고 사람의 참된 길을 제시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다. 그것은 그의 말씀이 실제로 영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영이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말하며 생명 역시 하나님의 생명을 말한다. 주님의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란 말의 정확한 뜻은 주님의 말씀이 사람 안에서 영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 것인가? 주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전해질 때 하나님의 영(생명)이 그 사람 안으로 따라 들어가기 때문이다. 성령은 언제나 말씀과 함께 들어간다.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은 영의 전달 도구인 셈이다.    


거듭나기 전의 자연인이란 육체에 불과하며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이다. 그를 죽었다고 하는 것은 영적 존재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본래 모습을 기준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즉 영적이 아니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을 살리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영을 그 속에 불어넣어 그로 하나님에 대해 살아나게 하는 것뿐이다. 주님의 말씀이 바로 사람 안에 이와 같은 역사를 일으킨다. 그래서 그의 말이 영이요 생명인 것이다. 요약하자면 주님의 말씀이 영이요 생명인 것은 첫째, 그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이고 둘째, 그 말씀이 진리의 영(성령)을 사람에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반드시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주님의 외형만 붙들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역사하는 영을 받아야 한다. 그 영을 받고 거기에 사로잡힐 때만 죄와 세상을 이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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