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lde1
slide2
slide3
slide4

제38과 죄의 종

이상봉 2010.05.05 13:11 조회 수 : 2781

제38과 죄의 종

 

요한복음 8장
 

57.죄는 어디서 오는가
 

죄를 짓고 싶어서 짓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결국 죄를 짓는 모든 사람은 다 자기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엇인가에 의해서 억지로 죄를 짓는 것이다. 즉 죄를 짓는 모든 사람은 진리가 그 속에 없음으로써 죄의 종(노예)이 되어 할 수 없이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15-24) 죄의 법, 사망의 몸에 묶여 있는 곤고한 신세,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실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나쁘다고 비난만 하지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를 모른다. 한국을 침략하여 괴롭힌 일본이나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 독일에 대해 사람들은 비난하지만 그 죄가 어디서 왔는지 그러한 행동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잘 알지 못한다. 만일 일본이나 독일은 악의 축이고 한국이나 유대인은 선한 어린양이라면 일본으로부터 괴롭힘을 받았던 한국인들은 왜 해방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동족끼리 전쟁을 벌이며 서로 죽였는가?  

 

그리고 유럽 여러 나라에서 나라 없이 핍박을 받던 유대인들은 왜 팔레스타인 땅에 자리잡으면서 그 땅에 먼저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쫓아내고 죽이며 괴롭혔는가? 그러므로 죄의 근원은 군국주의 일본이나 나치 독일 또는 시온주의 이스라엘이나 공산주의자 등등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데 있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죄는 출처를 달리하여 끊임없이 다시 등장하여 인류를 괴롭히게 될 것이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그 속에 진리가 없고 마귀의 거짓말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 행동은 다 그 마음 속에 어떤 말씀, 어떤 영, 어떤 정신이 자리잡고 있느냐 하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 거짓말하는 영, 미워하는 영, 괴롭히는 영, 살인하는 영이 자리잡고 있으면 죄를 짓는 것이고 사람을 사랑하는 영, 생명을 살리고 온전케 하고자 하는 영이 자리잡고 있으면 선과 의를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짓는 자는 다 먼저 죄의 종이 되고 마귀의 종이 되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딱 어떤 사람이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어느 순간에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없고 악한 영으로부터 오는 거짓말이 자리잡으면 누구나 악하게 되고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지켜야 한다. 마음을 방치해서는 안 되며 듣는 것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0-23)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눅8:18)  


그 속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진리의 말씀이 없으면 그 마음이 빈집과 같이 되어서 마귀로부터 오는 허망한 말들이 들어오기 쉽다. 그리고 말씀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것을 실행하여 인격과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자리까지 나가지 못하고 단지 그 말씀이 지식과 교양으로 그치게 될 때도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라는) 교만이나 자만으로 인해 그 마음이 허술한 빈집과 같이 되어 위험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유대인들의 실패가 바로 거기서 온 것이다.  


진리가 없으면 인간이 무엇이며, 인간의 참된 삶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고 마귀가 심어준 잘못된 생각과 헛된 욕망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이 잘못된 생각과 헛된 욕망에서 온갖 그릇된 감정과 그릇된 행동이 나오게 된다. 여기서 그릇된 감정이란 미움과 분노, 불안, 두려움, 갈등, 낙망과 좌절, 우울함 등과 같은 것이고 그릇된 행동이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죄 곧 부모나 형제나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 도둑질, 강도, 간음, 다툼(전쟁), 살인, 험담과 이간질, 자살 등과 같은 것이다. 이런 감정과 행동을 하는 사람은 다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고 마귀에게 종으로 사로잡혀서 하는 줄로 알면 된다. 그러므로 죄로 인해 괴로운 사람은 자기를 탓하거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 전에 먼저 마귀를 거절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잡아야 한다.  


58.종과 자유인
 

종과 자유인의 차이는 무엇인가? 누가 종이며 누가 자유인인가? 이것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어떠하며 그 마음이 어떠한가를 보고 판단해야 할 일이다. 만일 남에게 매여 종으로 일하는 사람이라도 그가 하나님께만 묶여 있을 뿐 사람에게는 자유하고 있다면 그는 종이 아닌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고용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 일을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일로 알고, 사람에게 매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일하는 것처럼 또는 자기 일처럼 정직하고 성실하게 행한다면 그는 겉으로는 종이지만 실제로는 자유인인 것이다.  


누구든지 일을 함에 있어서 사람에게 매이지 아니한다면 그는 단지 하나님의 종일 따름이다. 눈을 속이며 적당히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처럼 진실하게 행한다면 그는 실제로 사람의 종이 아니며 단지 하나님의 종이며 하나님의 종은 사람에게는 자유인이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여 눈가림만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하고 사람들에게 하듯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엡6:5-8) 


사람이 비록 육체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종으로 일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인생 전체가 속에서부터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로 사는 참 사람의 위치를 알아 그대로 행한다면 그는 곧 진리 안에서 온전히 행하는 사람이며 이런 사람이야말로 결코 사람의 종이 아니라 완전한 자유인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육체적으로는 남에게 매이지 않는 자라도 하나님 앞에서 참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육정이나 그 밖의 무엇에 매여 노예처럼 끌려다니는 자라면 그런 사람은 자유자가 아니라 명백한 종이다. 아무리 육체적으로는 남에게 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마음이, 그 삶이, 그 인격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대로의 참 사람으로 살지 못하고 정욕의 노예가 되고 돈과 명예에 매여 종 노릇하고 있다면 그는 자유자가 아닌 것이다. 누구든지 무엇에 매여서 꼼짝 못하고 그것이 시키는대로 살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종이 아닌가? 아무리 남을 부리는 사람이라도 그 속에서 자유가 없으면 종에 지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종이 아니며 자유케 될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주님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셨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따라 살지 않는 모든 사람은 적어도 죽기를 무서워하여 一生(목숨)에 매여 종노릇하고 있다고 했다.(히2:15) 마귀가 가진 최고 최후의 무기는 사망 권세이다. 즉 사람에게서 삶을 빼앗아가겠다는 죽음의 위협이다. 사람은 이 무기 앞에서 꼼짝 못하고 벌벌 떨면서 종노릇하고 있다.  

 

아무리 큰 권세를 가진 사람이라도, 아무리 큰 소리 치는 사람이라도 사망 권세 앞에서는 꼼짝못하고 무서워하여 그의 말을 다 듣고 마는 것이다. 마귀는 사람의 목숨을 인질로 잡아 온갖 요구를 한다. 여기에 매인 모든 사람은 결국 마귀의 요구를 따라 살므로 하나님께 계속 범죄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길 자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이기는 생명 곧 부활 생명을 받은 자 뿐이다. 그들만이 생에 매이지 않고 참 자유자로 당당히 살 수 있다.  


주님은 이렇게 종으로 매여있는 인생을 놓아주려고 오셨다.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2:13下-16) 주님은 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인생들을 구하시려고 스스로 자기를 낮추어 사람이 되시고 종의 자리에 앉으셨다. 그러나 그 안에는 부활 생명이 있었기 때문에 결코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으셨고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다. 주님은 종의 자리에서도 완전한 자유를 누리신 것이다. 그는 이로 인해 사망의 세력을 가지고 사람을 종으로 부리던 마귀를 없이 할 수 있었다.  


주님의 자유하심은 우리 모든 사람의 대표로서, 우리 모든 인생의 운명을 한 몸에 짊어지시고 행하신 것이다. 주님의 삶은 사망을 무기로 사람을 종으로 부리던 마귀를 근본적으로 이기신 삶이다. 이것은 우리를 위한 승리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이 승리를 믿음으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면 그도 또한 자유자와 승리자가 될 것이다. 반대로 그 어떤 탁월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자유와 승리를 알지 못하면 자유인이 될 수 없으며 이 부활 생명을 받지 않는 자는 아무리 이기고 싶어도 이길 수 없다.  


사람은 이미 마귀에게 깊이 속아 있다. 그러므로 인생이 참으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길과 진리요 승리하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야 한다. 그리고 그의 진리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진리』 곧 ‘하나님이 지으신 대로의 진정한 사람의 길’을 알지 못하면 사람은 결코 참 자유인이 될 수 없다. 사람은 이미 마귀에게 깊이 속아 있다. 자기가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마귀는 그의 머리 위에 있으며 그가 나기 전부터 인류를 요리해왔다. 그러므로 자기의 지혜와 의지와 능력을 의지해서는 안된다. 오직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붙잡아야 한다. 인생에게 참으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길은 『길과 진리이신 그리스도』밖에 없다. 우리가 참 자유인으로, 당당하고 권세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 생명 안에 거해야 한다.  


59.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식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지만 주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하셨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주님은 왜 하나님을 공경하고 마귀를 싫어한다고 하는 사람들을 마귀의 자녀들이라고 하셨는가? 


아들은 무엇인가? 아들이란 아버지에게서 난 자이다. 아버지에게서 난 자만이 아들이다. 아들은 겉으로 나타난 외모보다 그 속에 있는 생명을 보아서 판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한 자라야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말과 행동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 겉으로야 어떻든지 아버지의 생명의 본질을 그 속에서 나타내는 자라야 참 하나님의 아들이다.  


주 예수님은 외모로는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그의 인격과 삶을 통해서 즉 그의 말씀과 사역을 통해서 그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함이 확인되었다.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는 말과 같이 주님은 그 말씀과 삶을 통해 자신이 율법과 선지자가 증거한 그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다음의 몇가지 이유로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녀가 아님이 분명했다. 『첫째』,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의 행위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아버지의 착하고 자비로운 성품이 없었다.(8:38-44) 『둘째』,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분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8:37,40,46,59) 같은 생명을 가졌으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형제를 알아보아야 한다. 『셋째』, 그들이 (누가 전하든 간에)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거절했다는 점이다.(8:47)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아들의 열매는 언제나 『진실』과 『사랑』과 『화목케함』과 『평안』이다. 아버지가 언제나 그런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귀의 자녀들의 열매는 언제나 『거짓말』과 『형제를 미워하고 참소하는 것』과 『살인』과 『분열』이다. 마귀의 본성이 그렇기 때문이다. 즉 마귀를 아비로 둔 자의 열매는 언제나 『거짓말로 시작하여』 자기 이익을 위해 형제를 참소하고 해롭히다가 마지막에는 『살인으로 끝을 맺는』것이다. 그것은 마귀의 본질이 거짓이고 욕심이고 분열이고 살인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녀인 줄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주님은 그들이 마귀의 자녀들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 자신도 마귀에게 속아 있기 때문에 실제로 자신들이 마귀의 자녀가 된 것을 모르는 것이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마귀의 자녀의 상태에 있다는 것은 다른 여러 증거들을 통해서도 드러났지만 특별히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주 예수님을 미워하여 죽이려 한 것을 통해서였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으로 인해 자기들의 수치가 드러나고 찔리게 되자 주님을 미워하다가 결국 죽이고 말았다.  


아담은 마귀의 말을 듣는 순간 자신이 유지해야 할 자리-어린 양의 자리:아버지께 순종하는 아들의 자리-를 떠나 마귀와 같이 거짓말과 불순종과 교만, 살인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자마자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음성을 듣고 거짓말을 했으며 그의 아들 가인이 아벨을 죽임에서 드러났듯이 살인하는 열매를 낳았다. 이것이 오늘에까지 이어지는 변함없는 아담의 길이다. 이것은 사람이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을 바꾸는 길 외에는 달리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아담의 운명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싫든 좋든 또 알든 모르든 마귀의 종 노릇을 해야 하며 마귀의 자녀 노릇을 해야 하는 참담한 자리에 있는 것이다.  


이런 자리에서 주 예수님이 그의 삶과 말씀으로 비추시는 빛을 보고 삶의 자리를 옮기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것은 죽고 사는 생명의 문제이므로 자존심 이상의 문제이다. 사람에게는 근본적으로 자기 방어 본능이 있고 이로 인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할 때 진리를 다치지 않는 쪽보다는 자기 자존심과 감정이 다치지 않는 쪽을 택하기가 쉽다. 이것이 위험한 것이다. 


지혜로운 자,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유대인들처럼 자기를 옹호하려는 태도를 취해서는 안된다. 지금까지의 삶이 다 무너지고 자존심이 완전히 무너지게 되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주저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형제들을 통해서 또는 환경을 통해서 우리를 낮추시고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는 손길을 거부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잠깐 죽고 영원히 사는 쪽을 택해야지 유대인들처럼 병들어서 다 죽은 자아를 세우려다가 눈 앞에 있는 생명과 진리의 세계를 놓치고 영원한 멸망에 빠져서는 안된다.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