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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과 빛이신 그리스도

이상봉 2010.05.05 13:15 조회 수 : 2731

제40과 빛이신 그리스도 

 

요한복음 9장
 

62.죄와 빛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을 놓아보내시면서 주님은 그녀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라고 말씀하셨다.(요8:11,12) 주님의 이 말씀은 사람이 왜 (간음 등의) 죄를 짓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고 있다. 간음은 왜 하는가? ‘정욕이 발동하기 때문에’ 혹은 ‘그렇게 하면 행복할 것 같아서’ 혹은 ‘어쩌다 보니 그 자리까지 가게 되어서’ 라고 대답하겠지만 다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다.  

 

사람이 간음을 하는 진정한 이유는 그가 어둡기(無知하기) 때문이다. “부녀와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자라 이것을 행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며 상함과 능욕을 받고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게 되나니”(잠6:32,33) 이것을 안다면 아무도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짓는 사람은 다 무지한 것이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무지하뇨”(시53:4)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다 나름대로 생각하고 계산한 후에 하는 것이다. 간음은 상당히 무리한 일이지만 그것을 하는 사람은 어려움을 감수하고도 그렇게 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힘든(?) 일을 하는 것이다. 무릇 모든 범죄가 다 그렇다. 그러므로 ‘어쩌다보니’ 혹은 ‘땡겨서’ 어떤 일을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람이 하는 일은 다 그로서는 그것이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바닷물을 마시거나 폐수를 마시는 사람은 없다. 빛깔이 물처럼 맑고 투명해 보일지라도 그것이 물이 아닌 것을 아는 한 절대로 마시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이 어떤 분야에 대해 분명한 지식(빛)이 있는 한 결코 그 지식을 거슬러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것을 뒤집어 생각하면, 사람이 어떤 잘못된 행동을 한다는 것은 그가 그 행동의 의미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간음이나 도둑질도 마찬가지다. 그것으로 인해 잃는 것도 있겠지만 얻는 것이 더 크다고 생각하기(보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결과가 그의 생각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지하다(어둡다)는 것이다.  


결국 범죄의 문제는 빛의 문제이다.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암5:14,15) 이스라엘이 꾸준히 하나님을 말씀을 거스르며 우상 숭배와 범죄를 저지른 것은 자기들 생각에는 그렇게 해야만 ‘살(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눈이 고쳐지지 않는 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 것은 곧 멸망이고 자기 생명을 스스로 좀먹는 것이라는 사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한 죄는 그쳐질 수는 없는 것이다. 위로부터 빛이 비취지 않는 한 어떤 교훈과 책망, 어떤 설득과 징벌도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에게 주님은 최종적으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간음이 얼마나 반(反)생명적이며 인생과 사랑을 파괴하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기 전까지는,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사람을 완전하게 만족시키는 진정한 사랑인지를 알게 되기 전까지는, 그래서 더 이상 더럽고 파괴적인 사랑(간음) 따위는 전혀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기 전까지는 인류는 간음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마4:16, 이사야의 예언)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2:30-32, 아기 예수를 만난 시므온의 찬송)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요12:46) 

 

이 말씀들은 다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그리스도)이 곧 세상의 빛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빛은 막연히 하늘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고 어떤 신비한 책(글)으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고 신비한 체험을 통해서 오는 것도 아니다. 빛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사람이 밝게 되는 것은 오직 밝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이다. 진리를 알고 생명과 자유를 얻는 것은 어떤 철학이나 학문을 통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수양과 종교 체험을 통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빛과 생명이신 주님을 알고 따를 때만 가능하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요한은 사람(육신) 되신 하나님(말씀)만이 우리에게 은혜가 되고 진리(실제)가 된다고 증거한다. 왜 꼭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그리스도)이어야만 하는가? 왜 아들만이 빛이 되는가? 그것은 사람(아들)만이 사람(하나님의 아들로 지음 받은 우리)의 참된 길과 자리를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이 우리의 빛이 되시는 것은 그가 어떤 신비하고 특별한 지식을 우리에게 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인격과 삶이 사람의 근본(사람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요12:35,36)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빛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정하신 일정한 시간 동안만 비췬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태양 빛은 언제나 비취지만 생명의 빛은 그렇지 않다. 사실 햇빛도 낮에만 비취고 밤이 되면 사라진다. 주님의 빛은 그보다 더 제한적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생명의 빛, 진리의 빛은 모든 사람에게 항상 비취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때가 있다.  


하나님은 처음에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귀기울여 듣는 자가 적었으므로 하나님은 마지막 방법으로 그의 아들을 보내어 말씀하셨다.(히1:1,2) 아들을 보내어 말씀한다는 것은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통해서 말씀한다는 뜻이 아니라 아들(사람되신 하나님)이라는 존재 자체를 통해서 말씀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 자체가 곧 말씀이고 그의 삶이 곧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세상에 계신 동안은 세상에 빛(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뒤집어서 말하면 그리스도가 있는 곳,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는 곳이 아니면 이제 세상에는 어디에도 말씀이 없게 된 것이다. 아들이 있는 곳이 곧 말씀이 있는 곳이고 아들이 있는 곳이 빛과 생명과 진리가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가 오신 지금에 있어서는 책을 보고서 빛을 찾으려 해도 안되고 성전이나 산이나 기도원이나 골방에서 빛을 찾으려 해도 안 된다. 누구든지 빛을 보기를 원하고 진리를 알기를 원하면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오늘의 빛은 오늘의 그리스도에게 있다. 이 ‘오늘의 그리스도’는 곧 그리스도(아들)의 생명을 받은 사람들 곧 교회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늘의 빛을 보려면 빛을 받은 사람(형제)들 안에 거해야 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빛으로 오신 이 그리스도를 거부했다. 그것은 그들이 어둠에 속한 자요 그들 안에 빛이 없었기 때문이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요3:19-21)  


주님이 오실 무렵에 희미하나마 말씀의 빛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확실한 빛이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가 참 빛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그것을 잡았다. 빛을 참으로 추구하는 자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빛(약속) 가운데 거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그의 말씀과 삶으로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었을 때 거기서 빛을 발견하고 그에게로 나아가서 빛을 얻었다. 

 

그러나 진리(약속)에 대해 무관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지 않던 사람들은 눈뜬 봉사처럼 그리스도라는 빛을 접하고서도 아무 것도 보지 못했으며 결국 그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잃고 말았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마13:11,12,15)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1,2)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빛이 지금 그의 영을 받은 사람들 곧 교회를 통해 비춰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은 이 편지를 세상에다 쓴 것이 아니고 교회에다 썼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의 빛(은혜, 그리스도의 생명)은 빛을 받은 사람들끼리 서로 비추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형제의 소중함을 말해준다. 내 앞에 있는 (은혜를 받은) 형제가 곧 지금 내게 있어서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서로를 받아들이고 존중하여 피차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 잘났다고 다툴 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그것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받지(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주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도 바로 (그들 안에 빛이 없어서) 자기가 누구이며 앞에 계신 분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내 앞에 있는 분(그리스도, 형제)이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바로 그를 나의 생명과 구원이 되도록 세우셨다는 사실을 안다면 내가 그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안 보이니까 거절하고 대적하는 것이다.  


빛이신 주님이 계실 때가 곧 낮임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9:4,5) 이 말씀은 주님이 날 때부터 소경인 한 불쌍한 사람을 만났을 때 하신 말씀이다. 주님이 그 소경을 만났을 때 제자들은 주님에게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요9:2) 라고 물었다. 그때 주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9:3) 라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이 바로 위의 말씀이다.  


빛이란 사람이 자유롭게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환경이다. 빛이 있을 동안 우리는 어떤 문제를 수동적으로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손을 대서 처리할 수 있다. 밤에는 문제를 탓하고 앉아 있어야 하지만 낮에는 그럴 필요가 없고 직접 일해서 해결할 수 있다. 밤에는 어떤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을 보면서 저것이 무엇 때문인가를 생각하고 탄식하는 것말고는 할 일이 없지만 낮에는(빛이 있는 동안에는) 직접 고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빛의 힘이다.

 
인생이 왜 여러 가지 고통과 저주 가운데 놓여 있는지 그 이유를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모든 불행의 궁극적 원인이 아담의 범죄(실패)라는 사실이다. 사람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모든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경이 소경된 것도 그 부모나 자신의 죄 때문은 아닐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마치 주님은 그가 주님을 만나서 고침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소경이 된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빛에 속한 사람의 시각이다.  


소경의 저주 이유를 따지고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밤에 속한 사람들이라면 주님은 낮에 속한 분이다. 주님도 인간의 문제가 무엇 때문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병자를 치료하신 후에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었다.(요5:14) 그러나 주님은 결코 사람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분이 아니었다. 그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 구원하기를 원하는 분이었다. 그는 사람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처리하러 오신 분이었다. 그의 생명은 그 모든 것을 넉넉히 담당하고도 남음이 있는 생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 소경 거지가 누구의 죄로 그렇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따질 필요가 없었고 오직 자기가 아직 땅에 있는 동안에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고 싶은 마음으로 그를 구원하려 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빛의 권세이고 여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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