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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그리스도 


요한복음 1장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9-18) 


6.독생자의 영광

 

요한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증거했다. 그는 왜 그리스도의 영광을 그렇게 표현했을까? 독생자의 영광이란 어떤 영광인가? 독생자(獨生子)란 문자 그대로 하면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다. 이것을 더 단순하게 표현하면 그냥 아들이다. 주님에게는 그러한 ‘아들’의 영광이 있었다. 아버지의 영광이 아니고 아들의 영광이 있었다는 것이다.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삼위 하나님 중 아들 하나님)이시다. 그는 자신을 스스로 일컬을 때 언제나 인자(人子, son of man)라고 하셨다. 즉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아버지(주인)의 영광도 아니고 천사(종)의 영광도 아니고 오직 아들(상속자)의 영광이 있었다.  


요한의 눈에 비친 주님의 영광은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그의 영광은 거짓된 인생의 영광이 아니고 분명히 하늘에 속한 거룩한 자의 영광이었다. 그러나 그 영광은 아버지의 영광이 아니고 창조자의 영광이 아니고 보좌에 계신 왕의 영광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며 하늘의 거룩한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사랑하는 자의 영광 곧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이었다.  


하나님의 獨生子이신 주 예수님 안에서 나타난 아들의 영광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주님이 이러한 영광, 이러한 인생의 자리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다 우리를 위한 것이다. 즉 그 안에서 함께 하나님의 아들이 된 우리를 위해서 그러한 영광을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의 자리, 우리의 영광, 우리의 길은 바로 이 ‘아들의 자리’에서 행하는 것이다. 이 주님의 (독생자의) 영광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비춰질 때 우리도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스런 아들’로 살게 될 것이며 그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오늘까지 모든 인간이 항상 추구한 영광은 언제나 절대 권력자의 영광, 왕의 영광, 전능한 신의 영광이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인생의 정상적인 자리는 그것이 아니고 자기를 사랑하는 아버지를 즐거워하며 그를 따르며 순종하는 것이다. 그는 그 자리가 가장 영광스럽고 복된 자리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비춰주셨다.  


7.그리스도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함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좋은 것을 거저 주는 것이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에게 사랑을 베푸신 것이다. 은혜는 하나님이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그의 아들로 삼으셨으며 그의 모든 것을 상속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 완전하게 담겨 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골1:28) 

 

사람이 완전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으로써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 담겨 있으므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곧 하나님의 최고 은혜, 모든 은혜를 받는 것이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골2:3)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그리스도 밖에는 은혜가 없다. 하나님은 오직 그 아들 안에서 모든 좋은 것 곧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신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는 인간의 육체와 영혼의 모든 필요를 만족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를 은혜가 충만한 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 여기서 말하는 길이란 사람이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말한다. 그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러므로 그를 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접하는 것이며 그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을 그 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14:9,10)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6:35) 


일반적으로 은혜란 거저 주시는 선물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선물 자체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풍성함을 실제로 우리에게 누리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안에 은혜가 충만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하늘의 모든 좋은 것으로 충만한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1:16 “우리가 -모든 필요를-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그 충만한 것을 사람으로 얻게 하며 누리게 하는 분이므로 은혜가 충만하다고 하는 것이다. 단지 그가 하나님의 풍성함을 그 안에 함유하고 있는 분이라면 그는 단지 하나님의 성분이 충만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성분이 충만할 뿐 아니라 은혜가 충만한 분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과 모든 좋은 것을 받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일부분만 제공하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것을 그 속에 가지고 있는 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라는 은혜를 받아들이면 그 어떤 다른 은혜도 더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은혜 충만한 분 또는 완전한 은혜라고 하는 것이다.
은혜와 대조되는 것은 율법이다. 율법이 사람에게 약속한 것은 ‘행위(功過)에 따른 보응’ 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의 허물을 드러내어 정죄하고 결국 사람에게 사망 선고를 하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를 기쁘시게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율법이 사람에게 주어졌을 때 사람은 그것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실제적으로 충만하게 누릴 수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율법)에 이어 오게 될 하나님의 다른 완전한 은혜를 기다리게끔 되었던 것이다.  


죽은 자에게는 율법이라는 ‘산 자에게 해당되는 법’ 곧 ‘산 자의 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려주는 은혜’ 곧 ‘살려주는 영’이 필요하다. 아담은 산 자(living soul)로 지음 받았으나(창2:7, 고전15:45) 하나님을 떠남으로써 죽은 자가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살려주는 영이 필요한데 이 ‘살려주는 자’(life-giving spirit, 생명 주시는 영)로 오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것이다. 


진리의 진정한 의미는 ‘참’ 또는 ‘실제(實際, 실체)’이다. 진리는 첫째, 거짓이나 어두움에 대조하여 참(하나님께로부터 온 참 생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둘째, 구원 역사의 발전 단계와 관련된 개념으로서, 구약에 나타난 제사 제도나 성전 등과 같은 ‘그림자’, ‘모형’에 대해 ‘실제’, ‘완전한 것’, ‘성취된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히브리서 8:5, 9:24, 10:1 참조)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삶을 비로소 발견할 수 있으며 또한 누릴 수 있다. 그는 참 하나님의 길이요 인생의 정상적인 자리이다. 오직 거기서 우리는 사람으로서의 본래적 영광 곧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스런 지위를 발견하게 되며 또한 그 안에서 그것을 누릴 수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안에서 아들의 유업을 거저 물려받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영광스러운 사람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이다.

 

롬5:8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다. 이처럼 ‘표현된 사랑’ 또는 ‘나타난 사랑’을 은혜라고 한다. 덧붙여 은혜란 단지 사랑의 역사일 뿐 아니라 ‘곤고하고 낮은 데 처한 인생 위에 이루어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지극히 사랑하시지만 그 사랑은 은혜가 아니라 단지 사랑일 뿐이다.  

 

왜냐하면 독생자 안에는 곤고함이나 불쌍히 여김을 받을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천사도 사랑하시겠지만 하나님이 천사를 사랑하는 것도 은혜는 아니다. 오직 은혜는 우주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만 발생한다. ‘낮은 데로 흐른 사랑,’ 이것이 바로 은혜이다.


성경은 사랑과 은혜에 대해 말할 때 대체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주 예수님의 은혜’ 라는 식의 수식어를 붙이는데 그것은 은혜는 주 예수님과 관계가 깊은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도 있지만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주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은혜도 있지만 성경이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위에서 말한 은혜와 같이 실제적이고 적극적으로 표현되지 못하고 다만 소극적으로 표현되었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긍휼이라고 말한다. 긍휼이란 현재 죄인들의 상태를 불쌍히 여겨 돌아보시는 것이다. 이에 비해 은혜란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어떤 실제적인 구원 역사를 이루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긍휼은 소극적이며 은혜는 적극적인 것이다. 구약시대에 은혜는 미래의 일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은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올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인에 대해 먼저 사랑 안에서 긍휼을 베푸셨다(불쌍히 여기셨다). 그 긍휼은 우선 급한 대로 돌보시는 것이며 장래 좋은 것을 주시기까지 약속(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주시며 그 약속의 성취를 전제로 죄인을 받아들여 교제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약속 안에서 그 백성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셨다. 구약의 제사제도는 바로 이 같은 성격을 띈 것이다.  


감사한 것은 지금은 그리스도가 오셔서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고대하던 은혜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구약의 긍휼 아래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약속을 소망하며 임시(모형)를 붙잡는 것뿐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 더 좋은 것」 곧 은혜를 바라는 위치에 서 있었을 뿐 누리지는 못했으나 지금 은혜 아래서는 더 이상 무엇을 바라는(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실제적으로 받아 누릴 수 있다.  


죄인으로서 인간은 감히 하나님께 선뜻 나아가 사랑을 받아들이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당당히 누릴 수 없었다. 그러므로 담력과 믿음이 부족할 때 인간은 하나님께 먼저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은혜를 아는 자리에서 우리는 더 이상 구약 백성들처럼 두려워하며 주저하는 가운데 ‘다만 어떻게든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주의 은혜 안으로 담대히 뛰어들어야 한다. 즉 은혜가 나타난 시점에서는 긍휼을 구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은혜를 받아들여 누려야 하는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일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다. 은혜는 이와 반대로 하나님이 사람을 위하여 일하시는 것이다. 은혜는 하나님이 아무 조건과 근거 없이 그 크신 사랑으로 의지할 데 없고 곤고한 죄인들을 위해 크신 일을 이루시는 것이다. 은혜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요 사람의 업적과 공로를 받아서 무엇을 이루시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사람과 전혀 관계없이 친히 무엇을 이루시는 것이다. 율법과 은혜는 서로 병행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율법을 어느 정도 이룰 실력이 있어 율법을 의지하려 한다면 은혜는 전적으로 제쳐놓아야 하며 은혜에서는 떨어지게 된다. 또 사람이 은혜를 의지한다면 율법은 전적으로 제쳐놓아야 한다. 


은혜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은혜는 사람의 과거 죄과(罪過)와 관계없이 베풀어진다. 이는 곧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악함과 상관없이 베풀어진다는 뜻이다. 둘째, 은혜는 사람의 공적과 관계없이 베풀어진다. 이는 곧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선함, 공로나 업적과도 상관없이 베풀어진다는 뜻이다. 셋째, 은혜는 사람의 책임과 의무를 조건으로 붙여서 베푸는 것이 아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 사람이 그 은혜를 갚도록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범죄했고 연약하며 의지할 데 없는 죄인을 위해 하나님이 친히 일하셔서 거저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은혜는 인간의 범죄 정도에 의해 영향을 받지도 않으며 또한 인간의 공로나 도움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며 동시에 인간의 책임 곧 갚음을 조건으로 하지도 않는 순수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1)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2)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공로와 무관하며 그것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

 

(3)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보답, 책임을 조건으로 하지 않는다.  

 

은혜는 그런 것들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순수한 선물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실 때 그것을 잠시 조건부로 빌려주신 것이라면 우리가 그것을 합당하게 유지하지 못할 때 그것을 빼앗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확실하게 내 것으로 받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구원받은 것은 은혜로 된 것이나 그 구원을 유지하는데는 우리의 공로와 책임 있는 행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선하게 살지 못하고 잘못 행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빼앗아 가 버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거저 주신 것 곧 은혜가 아니다. 어떤 분이 표현했듯이 구원은 현금 거래도 외상 거래도 아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아무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그것을 받았듯이 나중에도 무엇을 갚을 것이 없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말이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시116:12에서 기자는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 말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은혜는 갚을 수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우리는 종종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서도 끝까지 행실이 좋지 못하며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는 사람은 멸망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한 번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 잘못함으로 멸망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는 신자 같아 보였지만 처음부터 은혜로 구원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 그 죄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는 것이다.  

 

교회에는 가룟 유다와 같은 가라지가 많이 있다. 그들은 처음부터 은혜를 받은 사람이 아니다. 분명한 사실은 한 번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결코 그의 행위 여하에 따라 구원을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다만 그가 불순종하면 많은 환란과 징계를 받아 멸망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의 구원은 궁극적으로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는 왜 믿은 후 선하게 살아야 하며 거룩하고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이제 은혜의 사람, 사랑의 사람, 거룩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후 은혜를 아는 사람, 은혜를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의 생명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거룩을 경험한 후 거룩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 본성으로 인해 그렇게 사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을 경험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주님과 같이 희생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보답하기 위해서, 구원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주님의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지를 참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감히 하나님의 은혜를 갚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평강과 기쁨과 안식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느냐에 달린 것도 아니요 어떻게 행하느냐에 달린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며 얼마나 은혜를 베푸셨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평안과 기쁨과 안식은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셨는지를 깊이 아는데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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