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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과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장
 

148.성경 연구의 목적
 

많은 학자들이 요한복음 21장은 요한복음의 본래 내용 뒤에 덧붙여진 부록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0:30,31) 라는 이 말씀이 본래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이 된다.  


이 요한복음 20:30,31 말씀은 성경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요한복음 뿐 아니라 모든 성경의 목적이 바로 여기 있다. 성경 연구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것이다. 즉 영생을 얻기 위해, 참으로 살기 위해 성경을 읽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성경을 상고하면서도 영생을 얻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성경을 상고하지만 영생을 얻도록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이 안 되어 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유대인들이 실제로 그랬다. 그들은 성경을 열심히 연구했지만 끝내 그리스도를 몰랐고 영생도 얻지 못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5:39-44)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다.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면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많이 익혀도 그 속에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상태가 된다.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요5:38)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했지만 속에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 없고 마귀의 거짓말만 가득한 상태로 남는 것이다. 둘째, 그 동안 공부한 그 (말씀의) 지식이 생명은 안 되고 도리어 자신을 교만케 하고 형제를 판단하는 도구가 되어 생명을 더 축내는 상태가 된다.  


무릇 율법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고후3:6) 말씀은 생명(사랑)이 되든지 지식이 되든지 둘 중 하나다. 생명이 안 되면 지식만 남는다. 성경을 연구한 사람이 그것으로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데 실패한다면 그는 지식(율법)만 얻게 될 것인데 그 지식은 마침내 자기를 죽이고(정죄하고) 남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느니라”(고전8:1-3)  


그러므로 말씀을 공부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하며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한 거룩한 (지식이 아니라) 인격을 접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반드시 한 ‘사람’을 보아야 한다. 아버지를 기뻐하며 순종하는 한 사람(아들),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그대로 (아버지를 나타내는) 진실한 한 사람, 우리 자신의 원형(原型, type)인 한 영광스런 인격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기가 보여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말씀, 그 길, 그 자리와 다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기 것으로 보이고 그 안에서 자기가 발견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성경에서 영생을 얻은 것이다.  


149.베드로를 용서하시고 목자로 세우심
 

요한복음 21장은 아마도 요한이나 요한의 제자가, 주님을 부인함으로써 실추된 베드로의 권위가 어떻게 회복되었는지에 대해 형제들에게 설명할 목적과 요한이 죽기 전에 주님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소문을 바로잡을 목적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주님이 죽고 부활하신 후 베드로를 비롯한 주님의 몇몇 제자들은 고향 갈릴리로 돌아가서 다시 고기를 잡으려고 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주님을 따랐지만 이제 주님이 그들 곁에 계시지 아니함으로써 다시 어부로 돌아가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밤새 고기를 잡으려고 애써도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때 주님이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명하셨고 (제자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으나) 그 말대로 했더니 많은 고기를 순식간에 잡을 수 있었다.  


이 일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름 받은 사람(제자)의 길과 운명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주님께 부름 받기 전의 제자들은 어부로서 능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 날부터 그들은 고기를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다.(마4:18-20) 이 부름을 받은 후 그들은 사람을 낚는 일 외에는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  

 

주님을 따라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동안에는 그들이 다른 일을 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고향으로 돌아와서 막상 고기를 잡으려고 나서보니 그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능하던 일마저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주님의 인도가 없이는 (자기의 지혜와 경험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주님이 죽으신 후 제자들은 낙심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비록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보았지만 그래도 주님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회복되거나 다른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았고 또한 자신들에게 다른 미래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서 전처럼 고기잡이나 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처럼 그들은 자신들이 이전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갈릴리 호수에서의 이 일을 통해 제자들은 자신들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람 낚는 어부로 부름을 받은 이상) 다시 옛 세계로는 돌아갈 수 없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완전히 익숙한 ‘다 아는 일’ 즉 어부에게 있어서 고기 잡는 일과 같은 일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람,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로 지음 받은 우리의 모습이다.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그리스도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 바로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요한은 주님이 제자들과 아침을 먹으면서 베드로와 나눈 대화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21:15-17) 


식사 후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 한 번만 하신 것이 아니라 세 번을 거듭 물으셨다. 처음에 주님이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agapas)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philo)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주님이 거듭 같은 질문을 하시자 베드로는 계속 그렇다고 대답했고 그때마다 주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주님은 베드로에게 목자의 일을 맡기셨다. 

 

주님이 질문한 사랑과 베드로가 대답한 사랑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agapao는 정서 뿐 아니라 마음과 의지를 통틀어 전 인격 안에 뿌리박고 있는 지적이고 의지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동사이고, phileo는 의지적 요소보다 감정적 요소가 주 역할을 하는 무의식적이고 자연적인 애정을 가리키는 동사이다. 주님이 나를 ‘아가페’하느냐고 물었을 때 베드로가 ‘필레오’합니다 라고 대답한 것은 그의 사랑의 한계를 스스로 인식하고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아가페가 무엇이든 필레오가 무엇이든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주님이 요구하시는 ‘그 사랑’을 자신 있게 제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만 자기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주님은 베드로가 전에 주님을 부인한 것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으시고 다만 그가 ‘지금’ 주님을 사랑하는지, 또 사랑한다면 ‘얼마나’ 사랑하는 지에 대해서만 물으셨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답했다. 그는 이제 주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여러 말(맹세)로 자신 있게 확증하지 않고 다만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자기의 마음을 (‘예, 예, 아니오, 아니오’로 말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진실하게 표현했다. 주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다 아시니 달리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이전의 실패를 통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지금 주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전에도 주님을 사랑했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주님만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도 사랑하고 있었다. 주님도 사랑했지만 자기도 사랑했고, 하나님의 나라도 사랑했지만 세상도 사랑했고, 하나님으로부터 영광도 사랑했지만 사람으로부터 오는 칭찬과 인정도 사랑했다.  

 

그는 주님을 원했지만 십자가를 지는 주님이 아니라 영광과 능력으로 내 뜻을 이루는 주님을 원했다. 그는 이제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그가 크게 실패했기 때문이다. 실패하기 전에 베드로는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자기 뿐 아니라 육으로 행하는 모든 사람은 결국 그렇게 하나님을 배신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편안하고 안전할 때는 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 같지만 고난이 오고 위험이 닥쳐오면 결국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막14:27)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때 베드로는 주님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막14: 29)고 했다. 또 주님께서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고 하셨을 때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주를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13:37)라고 말했다. 베드로의 그 말은 허풍이 아니라 그의 진심을 표현한 말이었지만 마음과 별개로 움직이는 육신의 속성을 어찌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것도 자신할 수 없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사실이고 주님보다 육신의 영광을 더 사랑하는 것도 사실이다.

 
베드로는 주님에 의해 이미 사람 낚는 어부로, 천국을 여는 자로, 교회의 기초로(마16:18, 19) 세워진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그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새 사람이 되어야 했다. 주님과 같은 참 목자가 되기 위해 그는 범사에 자기를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주님이 그를 시험에 빠지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의 실상을 일깨우며 그의 마음을 단련하기 위한 것이다.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눅22:24-34) 


주님은 육(肉)을 따라 행하는 베드로가 자신의 실체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그의 실패를 허용하셨고 그가 주님의 뒤를 잇는 참 목자로서 모든 사람을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의 허물을 용납하시고 사랑으로 품으신 것이다.     

 

베드로의 증거를 기초로 하여 쓰여진 복음서인 마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는 나와 있지 않는 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 여자들이 그의 부활 소식을 전해주는 천사를 만났을 때 그 천사가 한 말 곧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라는 말씀이다. 다른 제자들이 기억하지 못한 ‘그리고 베드로에게’라는 말이 마가복음에 기록된 것은 베드로가 자기를 용서하시고 사랑으로 배려하여 특별히 덧붙이신 그 주님의 따뜻한 음성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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