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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족보 (3) :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이삭은 어떤 사람인가? 한 마디로 말해서,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며 아브라함의 생명과 믿음의 산물(결과)이다. 그는 참으로 자기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이다. 이삭은 자신의 어떠함(자격, 조건, 행위)으로 말미암아 부를 누리는 사람이 아니라 부유한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 아버지의 모든 부를 거저 누리는 사람이다. 그의 유일한 선, 유일한 행위와 공로, 유일한 업적은 부자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참으로 이삭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오직 자기가 지음 받은 자리에서, 가만히 앉아서 아버지 아브라함의 모든 것을 거저 받아 누렸다. 이것이 바로 '복된 후사(아들)'이다. 이런 점에서 이삭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사람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의 모든 것을 거저 누리게 된 우리의 복된 위치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지난 주에 우리가 생각한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었는가?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 하나님에 의해 이끌린 한 사람을 보여주었다. 아브라함은 이삭과 달리 그의 일생을 통해 많은 것을 이루었다. 고향을 떠나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개척했고 그 결과 유력하고 부유한 일가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것도 스스로 시작하지 않았고 아무 것도 스스로 유지하지 않았다. 그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하나님에 의해 보존되고 유지 확장된 것이다. 많은 일이 아브라함의 손을 거쳐서 이루어졌지만 그 모든 일은 실제로는 다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삭 역시 그러한 하나님의 일의 산물이었다. 아브라함은 다만 이삭을 낳았을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는 이삭을 낳겠다는 계획도 하지 않았고 그럴 형편도 못 되었다. 오히려 이삭은 아브라함의 모든 것 곧 그의 육적 계획과 능력이 다 끝난 자리에서 (하나님이 일하심으로 말미암아) 나온 아들이다. 그러므로 이삭은 아브라함이 낳기는 했지만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나온 사람이다. 이러한 아들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의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고 하나님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며 그 결과 하나님의 뜻(하나님의 나라)이 이루어지게끔 되어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아브라함은 한 사람의 자연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 곧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러므로 그의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져야만 했다. 아들을 낳고 대를 이어가고자 하는 것은 보통 자연인의 뜻으로는 문제가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아브라함에게 진정으로 의미 있는 것은 아들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후사를 얻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아브라함에게서 육신적 혈통이 아니라 영적 혈통을 따라 한 아들이 나게 하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아브라함과 같은 생명,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 아브라함과 같은 체험과 복을 가진 아들이 나도록 계획하고 계셨다. 하나님의 모든 부와 하나님의 모든 영광과 능력을 체험하고 그것을 나타내며 그것을 영원히 찬양하는 한 아들을 얻는 것이 바로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이삭은 바로 이 뜻을 따라 태어났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참 아들은 오직 이 이삭뿐이고 이스마엘은 참 아들이 아니다. 육정(사람의 뜻)과 혈통을 따라 난 이스마엘은 단지 갈대아 우르에서 이미 죽고 없어진 옛 아브라함의 아들일 뿐이다. 사람이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을 알지 못하고 자기 뜻을 따라 일을 스스로 계획하고 추진하면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여종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는 것이다.

이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있어서 있으나 없으나 무방한 존재가 아니라 있어서는 절대로 안되는 존재이다. 교회와 그리스도 안에는 이스마엘적 요소가 아무 것도 없어야 한다. 그것이 있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안 된다. 그리고 한 번 나온 이스마엘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아브라함의 육적 후손인 이스마엘은 오늘날까지 살아서 온 세상의 소란과 고통의 근원이 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을 비롯하여 중동의 소란은 다 어디서 온 것인가? 그것은 모두 아브라함이 이삭도 낳고 이스마엘도 낳은 데서 비롯된 것이다. 미국 이라크 전쟁은 어떤 점에서 미국을 장악하고 있는 유대인들이 이스마엘의 후손인 아랍인들과 겪고 있는 갈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도 좋지만 내 뜻대로 하더라도 별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반드시 이삭만 나와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는 오래 참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이스마엘은 오늘날 온 세상 도처에 존재한다. 내가 말하는 이스마엘은 이라크인이나 아랍인들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혈통적 이스마엘의 자손들일 뿐이다. 오늘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실패를 통해 우리에게 경고하고 계시는 진짜 이스마엘은 자신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칭하며 끊임없이 아랍인들과 갈등을 빚고 있는 저 이스라엘 사람(유대인)들,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아랍인들이나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골똘한 기독교 신자 부시 대통령, 그리고 그와 같이 자신을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라고 칭하면서도 실제로는 이삭의 원리가 아니라 이스마엘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을 다 포함하는 것이다.

무릇 아브라함의 정신, 아브라함의 체험, 아브라함의 생명과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육신대로 행하고 있는 모든 사람은 다 이스마엘이다. 약속을 따라 난 자가 아니면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니요 아브라함의 유업을 상속받을 수 없는 것처럼 성령을 따라 난 자가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요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받지 못한다. 오직 이삭이라야 한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이스마엘이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낳아야 하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위치에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은혜로 모든 것을 누리는 복된 아들 이삭의 위치에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삶은 은혜라는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아브라함은 자기 힘으로 인생을 시작하고 이룬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하고 이룬 사람이다. 그리고 이삭은 그 아버지가 이룬 것을 은혜로 고스란히 자기 것으로 누린 사람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인생을 사는 사람 곧 아브라함의 은혜의 세계에 있는 사람은 또한 이삭의 인생, 이삭의 은혜를 누리게 되며, 거꾸로 이삭의 인생 곧 이삭이 누린 은혜의 세계 위에 견고히 서 있는 사람은 자연히 아브라함의 인생도 살게 된다. 왜냐하면 자기가 복된 사람은 (아브라함처럼) 복된 자녀를 낳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끼치게(물려주게) 되기 때문이다. 자기 지혜로 모든 것을 시작하고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을 행하며 이루는 사람은 힘들고 옹색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고 그런 사람은 위로부터 오는 은혜와 복의 세계를 모른다.  

오늘은 이삭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므로 이삭이 누린 복과 은혜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삭의 일생은 은혜를 누리고 그것을 나타낸(표현한) 일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생애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이삭은 은혜 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육적 자아가 하나님에 의해 다루심을 받은 후 태어났다.(17:15-19, 18:10-14, 21:1-7) 이것은 이삭이 은혜로 태어났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인간의 육적 생명이 끝나고 인간의 일이 끝날 때 시작된다. 이삭이 은혜로 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가 태어났다는 점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부유한 아브라함이 가진 모든 것을 고스란히 누릴 수 있는 상속자로 태어났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이삭은 은혜 안에서 났을 뿐 아니라 또한 은혜 안에서 자랐다.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더라"(창21:8) 성경은 이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충분히 그가 은혜 안에서 자랐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성경은 그가 특별히 어떤 일을 열심히 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은혜 안에서 평안히 자랐으며 평안히 지냈음을 의미한다. 그는 노력하여 열심히 살았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복되고 자연스럽게 성장했다. 벧후3:18은 우리에게 '은혜 안에서 자라는 것'에 대해 말한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이와 같이 우리도 은혜 안에서 자라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둘째, 이삭은 은혜 안에서 기업(企業)이 되었다.  

이삭은 또한 은혜 안에서 기업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가졌던 모든 것이 바로 그의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그의 모든 것을 이 유일한 상속자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이삭은 참으로 노력하지 않고 모든 것을 거저 얻음으로써 자연스럽게 귀족이 된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는 애써서 부자가 되지 않았다.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애써서 신령한 사람이 되지 않고 은혜 안에서 자연스럽게 신령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됨을 의미한다.

세상에서는 애쓰고 노력해서 얻는 것이 매우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받으시는 교회 건축 곧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완전한 인격을 조성하는 일과 그로 말미암는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있어서는 인간의 노력이 불필요할 뿐 아니라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매우 해롭다. 그것은 일을 그르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집을 건축하시는 일에 있어서는 매우 까다롭고 엄격하셔서 완전한 것이 아니면 받으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개입하여 대충 일을 해버림으로써 하나님이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이 안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예컨대 우리의 옷에 쓰는 실은 그다지 좋은 실이 아니라도 별 상관없다. 그러나 몸 안에 수술을 위해 쓰는 실은 완전히 좋은 실이 아니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생명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집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부름 받은 우리는 그의 몸이요 그와 한 몸으로 연합할 자이기 때문에 적당히 조성되어서는 안 된다. 완전히 하나님과 같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적당히 선하고 적당히 악한 자로 되어지는 것을 허용하실 수 없다. 오직 완전히 그의 아들의 생명으로 충만한 자가 되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스스로 자라기를 원치 않으시고 오직 그의 은혜 안에서 자라게 하신다.

좋은 집의 아이는 방목하듯이 키우지 않는다. 철저한 계획에 의해 좋은 것을 공급을 받으며 좋은 과정을 거치며 제대로 키워진다. 하나님의 아들은 스스로 노동하며 밥을 벌지 않으며 아버지 집의 풍성으로 먹고 사는 것이다. 이삭의 위치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은혜를 누린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철저히 이삭의 위치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참 아들로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이삭은 은혜 안에서 순종했다.

이삭은 또한 은혜 안에서 순종했다.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창22:5-10)  
많은 사람들이 이삭이 어떻게 그렇게 순종할 수 있었는지 신기하게 생각한다. 그가 그렇게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범사에 하나님의 은혜로 키워졌고 은혜 속에 푹 잠긴 생활을 해 왔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과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결코 자기를 죽일 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순종은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만일 이삭이 모든 면에서 매우 각박한 상황에서 살았고 뼈를 깍듯이 노력하며 어렵게 컸다면 그는 범사에 여유 있게 하나님을 믿기 어려웠을 것이며 그렇게 자연스럽게 순종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순종은 하나님의 풍성하신 공급의 결과이다. 은혜는 순종을 낳고 또 순종은 더 깊은 은혜를 낳는다. 우리는 은혜를 경험할 때마다 순종할 수 있고 순종할 때마다 더 풍성한 하나님의 공급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로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할 수 있게 만든다.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딤후2:1) 그러므로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의 인도를 자연스럽게 따르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려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범사에 그를 자연스럽게 따르며 순종할 수 있도록 하는 믿음이 자라나게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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