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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2) -

지난 시간에 우리는 이삭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오늘 한 시간 더 이삭에 대해 생각하기로 하겠다. 참으로 이삭의 생애는 은혜를 누리고 은혜를 끼치는 '은혜의 생애'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그의 생애는 언제나 그 아버지 아브라함의 생애와 함께 생각되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삭의 생애는 곧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한 체험은 크게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그가 하나님께 부르심과 인도를 받았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가 하나님을 '믿으며' 살았다는 것이며, 셋째는 그가 하나님과 '교통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1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롬4:18)
이러한 아브라함의 생애가 보여주는 바는 새로운 종류의 한 사람, 그리고 새로운 종류의 한 삶 곧 (하나님의 역사인) '은혜'와 (그것에 대한 사람의 반응인) '믿음'으로 사는 삶이 세상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삭의 생애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삶의 연속이며 확대이다. 물론 외형상으로 볼 때 이삭의 생애는 아브라함의 생애와 전혀 같지 않다. 창세기 21장부터 28장에 나오는 이삭에 대한 기록을 보면 이삭은 아브라함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일생동안 별로 많은 일을 하지 않았으며 많은 체험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거나,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생활했다거나, 하나님과 친구처럼 깊은 교통을 하며 지냈던 것 같지는 않다. 이삭이 한 경험은 오직 그가 부유한 아버지의 집에서 복되게 태어나 풍요롭고 복된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아브라함의 연속이고 확대라는 것인가? 아브라함은 고생을 했고 이삭은 편히 살았는데 그것이 어떻게 하나라는 것인가? 아브라함과 이삭의 생애가 하나라는 것은 그들의 생애가 형태는 달랐지만 똑 같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은 고생을 하면서 하나님의 손 안에서 무언가를 이루었고 한 사람은 하나님의 손 안에서 그 아버지가 이룬 것을 평안히 누린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의 내용은 다르지만 성질(특징)은 같은 것이다.  

이삭의 생애는 외형적으로 볼 때 참으로 편하고 안전하고 평탄한 생애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는 아무 어려움도 없고 문제도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심지어 믿음도 발휘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달리 그의 앞에는 이미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없는 것)을 보는 것인데 이삭에게는 이미 모든 것이 눈앞에 놓여있으니 믿음조차 필요 없을 만큼 편안한 생애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나는 이삭이 주관적으로는 결코 바깥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편안하기만 한 생애를 살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에게도 나름대로의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아브라함이 체험한 어려움이나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벼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관적으로는 마찬가지이다. 공부 1등 하는 사람이 2등으로 떨어지는 것은 10등 하는 사람이 20등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이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 있다.  

이삭은 어렸을 때 이스마엘로부터 시기, 질투, 박해를 받았다. 그리고 장성해서는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경계와 배척을 받았다. 그리고 결혼도 나이 40이 되도록 하지 못했다. 결혼 후에도 자식이 20년간 없었다. 그 후에 태어난 쌍둥이 에서와 야곱은 사사건건 다투고 갈등함으로 인해 이삭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사람이라면 다 겪는 일이며 사소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평소에 편안하게 살던 사람에게는 그런 일도 큰 일이나 갈등과 고통을 안겨줄 만한 일이 될 수 있다. 사람은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삭은 그런 (나름대로의) 어려움 때문에 그다지 고통을 느끼거나 힘들게 살았던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의 객관적 환경이 (상대적으로) 편해서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삭의 진정한 복, 이삭이 아브라함으로부터 물려받은 진정한 유산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삭이 아브라함으로부터 물려받은 진정한 축복은 '은혜로 사는 삶'이다. 믿음은 누림을 낳으며 십자가는 부활을 낳는다. 아브라함이 체험한 '믿음'과 '자기 부인(否認)'의 삶은 어떤 환경에서든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이삭의 삶을 낳았다. 이삭에게 허락된 그 부유한 (물질적) 환경은 단지 이와 같은 이삭의 근본적 부(富) 곧 하나님의 아들이 가지는 근본적 안식과 풍요의 외형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삭의 삶은 인간 자신의 노력과 쟁취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소유하고 누리는 삶의 전형이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개념이 신약에서처럼 온전하게 계시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본격적인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로소 오기 때문이다.(요1:17) 하나님이 신구약 역사를 통해 사람에게 알게 하시고자 한 최종 계시는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것이야말로 아담 때부터 사람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이요 기어이 안겨주시고자 한 그 선물이다. 그래서 신약의 여러 성경들은 여러 말을 한 후에 은혜를 언급함으로써 끝을 맺고 있으며 더 나아가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22:21)이라는 말로 성경 전체의 끝을 맺고 있다.

비록 이삭에 관한 창세기의 기록에는 은혜라는 용어가 직접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삶에는 분명히 이러한 신약적 은혜의 개념이 풍성하게 들어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과 교통하는 그리스도인의 한 측면을 나타내며,  [이삭은 그리스도가 이루시고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은혜로 물려 받아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한 측면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야곱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행위나 어떠함이 아니라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 곧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해 선택된 것과, 기어이 그 부르심의 목적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하나님에 의해 다루심을 받고 결국은 하나님의 아들로 변화되고야 마는 측면을 나타내고 있다.

이삭이 담당하고 있는 체험은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 체험이며 가장 핵심적인 체험이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아브라함처럼 부르심을 받고 믿음을 발휘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래서 그와의 관계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야곱처럼 다루심을 받아서 부서질 것이 부서져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체험은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도록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믿음 없이도 그리고 고난 없이도 은혜를 온전히 누릴 수 있다면 믿음이나 고난은 필요 없을 것이다. 즉 아브라함이나 야곱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체험은 수단일 뿐 목적이 아니고 이삭의 체험만이 목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음에 있어서 여러 가지 체험을 가지만 가장 좋은 체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공짜로 내 것으로 누리는' 이 이삭적 체험 곧 은혜의 체험이다.

아브라함과 야곱의 삶의 특징은 하나를 얻기 위해 하나를 잃어버리는 삶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기 위해 세상을 잃어야만 했다. 야곱은 하나님을 약속을 누리기 위해 자기를 잃어버려야만 했다. 이에 비해 이삭의 삶의 특징은 '얻는 것'이다.

상실(喪失, 否認)은 그리스도인 삶에서 나타나는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며 더더구나 목적은 아니다. 구원에는 상실도 따르며 필요하지만 그 최종적 목적은 '얻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 뒤에는 반드시 부활이 있고 자기 부인 다음에는 아들의 생명을 누림이 따르는 것이다.

로마서 5:2은 "우리가 서 있는 이 상실 안으로 들어감을 얻었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를 단지 상실 안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우리를 최종적으로 그의 은혜 안으로 이끄는 것이다. 다만 은혜를 누림에 있어서 세상과 우리 자신이 장애물로 작용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십자가를 거치게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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